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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사이’를 탐색하는 묵상默想의 언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0. 19. 17:18

 

 

‘사이’를 탐색하는 묵상默想의 언어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귀가 순해지니

들리는 걸 다 포용하라

 

- 「이순 즈음에 · 1

1.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1시 15분』(2018)에 이은 이은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첫 번째 시집을 상재한 이후 5년이 흘렀으므로 시인에게도 심신心身의 변화가 있었으리라 짐작이 되고 그 변화의 중심에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들이 자리잡고 있음이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에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이은경 시인은 이순을 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순耳順은 한 생애의 원숙기 또는 정신의 일관성을 확인하는 시기로서 급변하는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분기점分岐點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지면 지나온 세월을 반추함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길잡이 나침판을 욕구하는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집『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철저하게 냉철한 시각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을 포함한 자연 일반의 본질을 파헤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의 존재를 각인하려는 시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총 80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정·正- 상태나 현상을 바라본다, 반·反- 변화는 발전을 담보하는 과정이다, 합·合 -도출된 결과물은 새로운 시작이다’와 같은 변증법 辨證法의 구도로 구성한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 언급한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철학적 의미의 갈래가 많기 때문에 가볍게 쓸 수는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 중에서 ‘만물은 태어나서 유전하며,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사물의 대립’이라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와 이에 따라 모든 사물은 결국 정·반·합의 3단계로 발전한다고 주장한 헤겔의 입장이 이은경 시인이 시도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즉 어떤 주어진 사태는 그것에 반동하는 현상이 존재하며 결국은 그 양단兩端을 포섭하거나 배척하는 ‘도출된 결과물은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연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이순의 마루턱에 서서 힘들게 걸어 올라온 저 아래 세상을, 자신이 남겨두고 온 그림자를 바라보지만, 그 세상과 그 세상을 헤매던 자화상을 상처로 기억한다.

 

그늘진 듯

감춰진 듯

삶은

가시처럼

도도하고

쓸쓸했다

 

- 「가시나무」전문

 

 

2.

 

시인은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시나무라고 의식한다. ‘가까우면 볼 수 없고 / 멀어지면 마음 닿을 수 없’(「간격의 미」1연)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간격이 생기는데, 그 간격으로 말미암아 불통不通이 또 다시 야기된다고 본다. 이 불통이 개별적 존재들을 도도하고 쓸쓸한 가시나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너 나의 다름은

속마음을 드러내느냐

아무렇지 않은 듯 덮어버리느냐

살아가는 방식에 정답은 없다

 

- 「관조의 미학」 1연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이익사회에서 개별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로 파편화된 오늘날 삶의 양태는 가면무도회의 한 장면으로 드러난다. ‘분별없는 교언 입술에 모으고 / 거짓된 장면 눈으로 가리고/ 부끄러운 기억 가면에 / 숨겼다...(중략) ... 나는 가면을 쓰고 웃는’(「가면무도회」부분) 가면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정답이 없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간격만을 고집하게 될 때 우리는 서로의 가시나무가 되어 다가설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는 고립의 상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상처와 아픔은

늘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 「미운 오리새끼」1연

 

이와 같은 개인화되는 시대상을 조감하는 시인의 암울한 인식은 「상처 받은 자여」,「당신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습니까? 」와 같은 시에서 그 강도强度가 높아진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애써 가시나무가 된 우리는 스스로 가시를 안고 살아야하는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란 서로를 여는 것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

가끔 만나는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

곡 만나야 하는 사람

 

귀로 듣고 보는 그대로 믿는 오류

마음 가는대로 느낀 그대로 믿는 오류

 

흐린 날이 지나면 더욱 푸르게 빛나는 하늘

마음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참 어렵다

 

나는 사람을 만난다

사람이 나를 만난다

 

사람이 간다

사람이 온다

 

- 「사람과 사람 사이」전문

 

생각의 다름은 대부분 판단의 오류에서 온다. 오류誤謬는 무수히 발생하고 무수히 소멸하는 것으로서, 오류를 자각하고 교정하려는 의지가 한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방편이 됨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깊이를 자로 재려 함은 위선이다

무게를 저울로 달려 함은 어리석다

강도를 두드려 시험하려 함은 교만하다

수치로 나타낼 수 없으며

계산으로 구해지지 않는다’

 

-「믿음」1연

 

이와 같은 시인의 언명은 잘못된 믿음이 생각의 다름을 가져오고 생각의 다름이 서로를 미워하고 다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몇 마디 오류의 개념을 설명한다면 이런 것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정쟁政爭의 실상은 부분의 사실로 전체의 ‘참’(眞)으로 인식하는데서 기인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전체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오류는 걷잡을 수 없는 편견으로 전락한다.

 

오늘날과 같은 실용성과 유효성이 가치의 척도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도구가 되는 난경에 처하게 된다. 시「사람과 사람 사이」는 극명하게 서로를 공감하지 않는 오늘의 삶을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나기 싫어도 만나야 하는 사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만나게 되므로써 우리는 살가운 존재로서의 즐거운 만남이 아니라 ‘너’가 아닌 ‘사람’ 일반을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저 사람이 가고, 사람이 올 뿐인 이 세상은 얼마나 적막한 것인가!

 

3.

 

이 글의 앞머리에서『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의 구성이 ‘정·正- 상태나 현상을 바라본다, 반·反- 변화는 발전을 담보하는 과정이다, 합·合 -도출된 결과물은 새로운 시작이다’와 같이 되어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시편들은 지금까지 시인이 살아온 세상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불편과 불신이 가득하여 서로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인간사를 냉철하게 묘파한 시편들인 것이다.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의 대부분의 시에 서사敍事 - 스토리-가 없는 이유가 시인이 겪었던 수많은 서사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오직 내성內省과 묵상 默想에서 분출되는 자신의 생생한 목소리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삶의 모순을 혁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시인은 이제 사람에게서 눈을 돌려 자연의 이치에 가닿으려 한다.『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2부는 봄에서 겨울까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거나 계절의 흐름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관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편들은 작위적 作爲的인 인간계人間界와 달리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은 신의 섭리 / 머무는 것은 자유의지 ...(중략)...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계自然界의 생명력을 훼손된 인성人性을 회복시키는 힘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질 때를 아는 꽃은

아름답고

 

때를 놓치지 않고

피는 꽃은

더욱 아름답다

 

기다림 속에

피어나는 꽃은

표현할 수단 없이

그냥 설렌다

 

-「개화」 전문

 

시인은 계절에 맞춰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작지만 위대한 생명의 섭리를 간구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인간의 희로애락과는 다른, 단지 인간에게 완상玩賞의 기쁨을 주는 것을 넘어선 경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텅 빈 속대는 향기로 가득하니

비울 수 없어 채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준다

 

- 「연꽃」 2연

 

오래 전 노자老子가 설파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우리 눈 앞에 가득하여도 그 진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어찌 할 것인가! ‘달빛을 손안에 넣을 수 있을까 // 공기를 주머니에 담을 수 있을까’(「 욕심」첫 부분)되지 않음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또 어찌 할 것인가!

 

그러나 어느 한 편에서는 인간과 말없는 자연이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 경지를 보여주는 쉬우면서도 재미있는 시 한 편이 여기에 있다.

 

소울메이트

-마늘 1

 

아닙니다

첫 만남의 두근거림도

첫 인연의 설렘도

없었습니다

 

모릅니다

볼품없는 외양에 왜 끌렸는지

맵고 쓰린 감정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부재(不在)란 상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제는 압니다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도와

모두의 가치를 성장시키는

그대의 희생입니다

 

이 시는 마늘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 중 그 첫 번째 시다. 마늘은 오천 년 전 단군신화에도 등장하는 식용물이다. 날로 먹으면 아리고 센 맛을 낼뿐만 아니라 입안에 고약한 냄새를 남기기도 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런 마늘은 다른 식품에 양념으로 들어가 새로운 맛을 내는 보조식품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시인은 ‘가까우면 볼 수 없고 / 멀어지면 마음 닿을 수 없’는 사이를 넘어서, ‘속마음을 드러내느냐 / 아무렇지 않은 듯 덮어버리느냐’를 곁눈질하는 너와 나의 다름을 지워버리는 소울메이트가 사실은 ‘맵고 쓰린 감정의 트라우마를 /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존재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마음이 일으킨 편견을 벗어던질 때, 흑과 백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색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흑과 백 사이의 그 무수한 색들이 우리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서로의 울타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을 가두는 우리가 아니라 서로가 하나가 되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넌 나에게 햇살 따듯한 봄비

난 너에게 바람 시원한 그리움

 

인생의 깊은 의미 서로 나누며

기나긴 길 함께 걷는다

 

한겨울 눈길 걸어도

서로의 손 꽉 잡으면 춥지 않아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소중한 존재

 

못 보면 궁금하고

궁금한 만큼 걱정되는

언제나 약속 같은 우리

 

아름답게 신뢰를 이어가는

희망의 빛이다

 

-「우리는」 전문

 

시집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시인의 사유가 철저하게 부정과 긍정의 경계를 넘어서서 치열한 내면의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하는 의지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시「우리는」는 개별적 시로 읽을 때에는 낭만적 외연이 넓은 시로 간주할 수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많은 시들이 함유하고 있는 고독한 부정否定의 편린을 감지하고 난 후에는 우리가 단순히 ‘너와 나’가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존재 – 종교적 신神 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를 간구하는 기도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를 수 있다.

 

4.

 

앞에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은경 시인의 『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에는 거의 구체적 서사가 드러나지 않는다.「수건의 독백」을 비롯한 몇몇의 시편을 제외하고는 관념 觀念- 인간 일반의 존재성-이 시적 대상이 되는 까닭에 현란한 비유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편들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과 신기루를 좆는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욕망을 지우려는 결기를 보여주고 있다.

 

 

집착을 버릴 때 길이 생기고

신념 속에 삶이 보인다

천 길 낭떠러지

현애살수(縣崖撒手)

무엇이 두려운가

절벽에서 손을 놓아라

그래야 세상이 다시 보인다

 

-「번지 점프」 전문

 

현애살수는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와 같은 맥락의 불가 게송의 일부분이다. 천길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데 그 나뭇가지를 놓아야 비로소 도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주관과 객관적 사실의 사이, 나와 너의 사이, 옳고 그름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 그 경계를 허물어뜨릴 때, 마음의 모든 사슬이 풀리는 자유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풀어낸 시 「번지 점프」는 시집을 관통하는 시인의 의식을 집약한 시로서 시인이 예비한 시인의 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시집『꽃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요즘 시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묵상에서 빚어진 실존의 고뇌를 그려낸 시집으로 견줄 만하다. 앞으로 정밀한 화법話法을 궁구해 나간다면 빛나는 경經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