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192

은월 김혜숙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시공 時空을 꿰뚫는 생명의 길을 묻다

시공 時空을 꿰뚫는 생명의 길을 묻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며 『끝내 붉음에 젖다』는『어쩌자고 꽃』(2018)에 이은 은월 김혜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대체로 우리는 첫 시집을 통해서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관이나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구의 징후를 살펴보게 되며, 그 이후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런 징후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일군의 시인들은 자신의 세계관이나 삶의 지침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길을 걸어가고, 또 다른 시인들은 끊임없이 새로움 – 시법이나 인식-을 추구한다. 이 두 개의 길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일관된 의식으로 그 변화에 맞서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이며, 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존재의 의..

임승훈 시집『꼭 지켜야 할 일』:임서기 林棲期를 지나가는 생명의 응시

跋文 임서기 林棲期를 지나가는 생명의 응시 나호열 시인· 문학평론가 1. 나이가 들어갈수록 입말에 ‘어느덧’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소년은 쉽게 늙고 공부는 어려워 시간은 빨리 지나가니 가볍게 여기지 말자(소년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라거나 주마간산走馬看山과 같이 세월의 빠름을 인식하게 될 때 누구나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그 시간들을 반추反芻하게 된다. 어느 사람은 그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슬픔의 각인으로 되새김하고 또 어느 사람은 뿌듯한 성취의 기쁨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남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의 여운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삶이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단 한 번의 여행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임승훈 시인의 첫 시집『꼭 지켜야 할 일..

곽성숙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일상의 남루襤褸를 풀어내는 무위無爲의 시

일상의 남루襤褸를 풀어내는 무위無爲의 시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1. 곽성숙 시인의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 원고가 도착할 즈음, 우연하게도 두 편의 평론을 읽고 있었다.「이제 시론을 갱신할 때가 되었다」『예술가』, 김유중 202년 봄호와 「한국시의 미래를 묻다」『시와 문화』, 박명순 2022년 봄호가 그것들인데, 다행스럽게도 그 글들은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의 전모全貌와 의의意義를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두 편의 글은 오늘의 한국 현대시의 양상을 살펴보고, 앞으로 바람직한 시의 진로를 진단하는 것으로서 마침 곽성숙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지형을 견주어보고 시집이 지니고 있는 독창성을 쉽게 찾아내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두 편의 주장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시론..

김미선 시집『바위의 꿈』:잊음과 잃음 사이의 섬을 이야기 하다

잊음과 잃음 사이의 섬을 이야기 하다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1. 음계의 낮은 도 음音과 솔쯤 그 사이를 흐르는 진양조의 강물, 스물스물 코끝을 스치는 솥밥 익는 냄새, 나뭇가지 끝에서 빗방울 하나가 마악 떨어지려는 그 순간, 손닿을 듯해도 끝내 잡히지 않는 무지개...... 이 단상들은 모두 김미선 시인의 시집 『바위의 꿈』을 일별하고 난 후에 남는 조각조각의 인상들이다. 그의 시편들은 무거운 듯 가볍고, 웃음인가 했더니 어느새 슬픔이 배어있는 미소를 보여준다. 이렇게 『섬으로 가는 길』(2007),『닻을 내린 그 후』(2016)에 이어 6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인 『바위의 꿈』이 펼쳐놓은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이윽고 우리는 저녁 어스름, 길이 끝나는 곳의 외딴 집에 다다르게 된다...

서혜경 시집 『야생의 강』:발효된 시간의 프롤로그

발효된 시간의 프롤로그 나호열 · 문화평론가 망각의 힘 망각忘却은 삶의 슬픈 에너지다.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우리의 일상도 맑았다 흐려지는 법인데 잊고 싶은 것은 잊혀지지 않고, 잊지 않으려 해도 잊혀지고마는 사람이나 사건은 시간이라는 강물에 쓸려나간 듯, 오롯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 완벽한 망각은 있을 수 없다. 느닷없이 어느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나 사라졌던 사람들이 기억의 문을 두드려 슬픔을 다시 들어올리고, 정처없는 기쁨으로 춤추게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망각의 틈새를 뚫고 솟아오른 기억들은 최초에 마주했던 기쁨이나 슬픔과는 그 결이 다르다. 올해 피어나는 꽃들이 지난 해의 그 꽃이 아닌 것처럼 시간의 풍화風化로 사실과 왜곡되거나 아니면 한결 승..

장갑생 시집 『이슬은 영원하다』: 대자적 존재 對者的存在의 자아 찾기

대자적 존재 對者的存在의 자아 찾기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1. 우리가 ‘존재’를 이야기 할 때 ‘ ~이다’와 ‘~ 있다’라는 두 개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여기서의 우리는 사유하는 기능을 가진 인간 일반이기 때문에 ‘존재’를 묻는 행위는 일종의 표현 욕구에 다름 아니다. ‘어디에 있다’는 장소성과 그 장소에 위치하는 ‘무엇이다’라는 발화發話는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의식이면서, 무비판적인 본능에 충실한 것일 수도 있다. 어째든 이렇게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능력은 아니다. 수컷 사슴의 뿔이나 공작의 화려한 날개, 암컷에 잘 보이기 위한 바우어 새의 집짓기 등도 자신의 존재를 보다 강열하게 알리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일반이 지닌 사유의 능력은 자신을 비추는..

김정희 시집『비켜 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화해와 소통으로 가는 서정抒情의 길

화해와 소통으로 가는 서정抒情의 길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시인의 길 예술가의 재능이 천부적天賦的이라는 주장은, 범인凡人이 미처 가닿지 못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일 때 예술의 위의威儀가 빛나는 것이라는 말과 뜻이 닿는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의 정의는 문화의 발전에 따라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다. 혼성모방이라 일컬어지는 장르 간의 혼융, 더 나아가서 창작자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향수享受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시 보고 마음에 닿아도 놓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여행길’이라고 자신의 시 쓰기를 피력한 김정희 시인의 말은 굳이 상상력에 기반한 독특하고 강열한 창조가 아니더라도 얼..

박남주 시집 『존재의 이유』:순수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旅程의 시

순수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旅程의 시 - 사랑은 인생의 괴로움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김동길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1. 박남주 시인의 시집 『존재의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인생의 후반기를 맞이한 노년老年에 대한 탐구가 그 하나이며, 또 하나는 그 노년의 삶에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의 항구성恒久性에 대한 질문이다. 시詩가 감정의 표현을 넘어 예지叡智 혹은 통찰의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스스로 살아있는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할 것인데 『존재의 이유』의 100여 편에 이르는 시편은 삶의 예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으로 읽을 때 그 면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해방 이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전후로 ..

김기용 시집 『해지는 세상도 꽃이 핀다』:수처작주隨處作主의 상생相生을 묻다

跋文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상생相生을 묻다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 워즈워스, 코울리지 1. 바야흐로 우리는 삶의 행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 비판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던 시절로부터 참 멀리 온 것이다. 한 두 가지 예를 들면 입 밖으로 발설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웠던 동성애나 천륜을 어기는 것으로 비판받던 비혼非婚과 이혼의 증가는 불합리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본연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양성의 시대, 가치의 혼융渾融과 통섭通涉의 사유를 지향하는 오늘의 삶은 복잡미묘한 가치의 ..

윤혜숙 시집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일상 속에 숨은 익살의 시

일상 속에 숨은 익살의 시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윤혜숙 시인의 시집 『손끝 체온이 그리운 날』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클레오폰은 일상생활에서 취재한 일종의 서사시를 쓰면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을 모방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한 구절을 상기하게 하는데, 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남편과 같은 친족이거나 조금 멀다 해도 몇몇의 친구, 아주 드물게 병원에 입원하며 잠시 같은 병실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의 만남에 국한된다 – 시 「병원생활」 참조. 또한 이 시집에 펼쳐진 공간은 농촌으로서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아직 훼손되지 않은 공동체 삶의 미덕과 농경農耕의 느릿한 아름다움이 깃들여져 있는 곳이다. 이와..

최연하 시집 『햇볕의 지문』: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삶의 여정旅情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삶의 여정旅情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모든 예술은 시간의 기록이며 기억의 표현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70억의 모든 사람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그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존재이며, 그 표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예술가라 불려지고 자아실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일찍이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은 모든 사람은 시심詩心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과 내용에 구애받음 없이 누구나 펜과 종이만 있으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심을 한 마디로 말하면 ‘애틋한 마음’ 즉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될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사람, 더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희로애락의 대화를 나누되, 슬..

김명림 시집『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전원田園에서 피워 올린 생명의 노래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시인의 길 어느 시인이든 그들의 행로는 대체로 두 개의 방향으로 나눠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끊임없이 전위의식前衛意識으로 자기갱신을 거듭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변함없이 자신의 하나의 주관을 곧게 이어가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기법技法의 신선함으로 예술의 창조성을 향해 나가는 길과 오롯이 올곧은 하나의 시선視線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길을 가든, 작품의 성패成敗나 우열優劣의 나눔은 의미가 없다. 『어머니의 실타래』(2013)에 이은 김명림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는 아마도 후자의 길, 즉, 시인이 축..

진명희 시집 『고구마껍질에게 고함』:독락獨樂을 포획하는 찰나의 시어詩語

독락獨樂을 포획하는 찰나의 시어詩語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나의 시는 뒤돌아보는 기억 한 점 - 「기도 ·1」 1. 진명희 시인은 시마詩魔가 들린 사람이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여 년 전에 등단한 이후 시집 『고구마껍질에게 고함』을 포함하여 여섯 권의 시집을 생산했다. 어찌 보면 이십 년의 시력 詩歷에 여섯 권의 시집을 낸 시인에게 시마가 들렸다고 하면 과한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희로애락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삶의 와류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 부조리가 횡행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오롯이 시로 육화肉化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마가 들린 사람으로 시인 진명희를 호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

이서은 시집 『피노키오 기상청』: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跋文 복면覆面의 마음으로 사람 찾기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팬데믹의 풍경과 그늘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측면의 난경難境에 처해 있다. 그 하나는 코비드 19(2019년)의 창궐, 즉 팬데믹pandemic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온 사회구조의 변화 – 일자리 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은 노동시장의 축소와 기계에 소외되는 인간, 각 세대 간의 인식의 격차 등–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난제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를 요약해 본다면, 21세기 들어서 사스(2002년), 메르스(2012년)에 이어 코비드 19와 같은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가져옴은 물론 이..

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서정의 본질과 생명의 탐구 나호열 1. 이충이 시인이 영면에 든 지 일 년이 되어간다. 마침 「누구든 다 살아서 갈 수 있는 나라」등 10편의 시가 그의 컴퓨터에서 걸어 나와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제 온화한 그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지만, 새싹처럼 푸른 유고遺稿는 다시 이충이 시인을 상기하게 만든다. 2. 이충이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먼저 가는 자 빛으로 남고』(1986),『저녁 강에 누운 별』(1988) ,『누가 물어도 그리운 사람』(1989), 앞의 세 권의 시집에서 고른 62편의 시를 실은 시선집 『달의 무게』(1996), 그 이후『깨끗한 손』(1996),『빛의 파종』(1999)을 남겼다. 이번의 미발표 시들은『빛의 파종』(1999) 이후의 오랜 침묵이 단순한 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