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슬픔을 부끄럽게 하는 시
나호열 ( 시인· 문화평론가)
모든 슬픔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복합적 감정의 유령이다. 생멸, 미래에 대한 불안, 외로움과 분노, 폭력과 갈등 등등의 부유물이기도 하다. 고철의 세 번째 시집『극단적 흰빛』은 그 슬픔의 극단을 ‘흰빛’으로 요약한다. ‘흰빛’의 사전적 의미는 ‘눈과 같이 밝고 선명한 빛깔’이지만 동시에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는 깨달음을 내포하고 있다. ‘끝닿은 낭떠러지처럼 / 한발 물러설 수 없는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 때’ (「극단적 흰빛」2연)를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실감나지 않는 흰빛이 생기’는 광경을 볼 수가 없다. 고철 시인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우리들에 의한 / 전쟁을 겪었었’(「보육원 생각」부분)음에도 ‘세상은 고요하고 고요’(「보육원 생각」부분)한, 스스럼없이 폭력에 길들여진 가장假裝의 세상을 거쳐왔고 겉멋과 허위에 가득한 잘 나가는 사람들(「대통령 하사품」 참조)의 배경 사진에 들러리 서는 지난 날을 기억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고철은 고아이고 현재는 강원도 산골에서 밭뙈기에 채소를 일구고 막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 시인이다. 시인 고철의 이력은 아래 김미옥의 발문에서 한눈에 꿰뚫을 수 있다.
2006년도에 낸 첫 번째 시집 핏줄이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한 공개 전단이었다면 2009년 두 번째 시집 고의적 구경은 공사장 노동자로서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높고 외롭고 위태로운 곳”에서 부른 노래였다. 이번 시집은 체념이나 허무가 아닌 희망과 달관의 시편이다.
그렇다! 폭력과 가증스런 위선의 세상을 견디거나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분노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집『극단적 흰빛』에 등장하는 페르소나인 시인은 그에게 펼쳐진 삶을 절망하기는 하지만 희망을 애써 구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라는 관념을 가지지 않을 때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전치displacement된다. 그가 겪은 간난艱難 또는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하고 돈을 모아야 한다. 대처로 나가 기회를 엿보고 재빨리 잡아야 하는데 그런 내색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해탈을 이룬 것이 아니라 해탈을 잊었다.
고철 시인이 고철을 팔러 왔다가 짜장면을 사줬다
1kg에 280원하던 고철 값이
130원밖에 안한다며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평창시장 골목 칠천각에서 짜장면을 사주고
고철이 다 된 1톤 트럭을 타고 멧둔재를 넘어 갔다
도로공사를 하다 그라인더 날이 튀는 바람에
여섯 바늘이나 꿰맨 다리에 시의 붕대를 감고 절룩거리며
가난한 나를 찾아온
고철 시인은 고철 판 돈 절반을 헐어 짜장면 곱빼기를 사주었고
덕분에 가난한 허기를 때운 나는 원동재를 넘어 영월로 갔다
- 시 「고철이 고철에게」전반부
이 시는 강원도 평창에 살던 김남권 시인이 고철 시인과의 일화를 술회한 시이다. 더 이상의 덧말이 필요 없이 머리를 박박 밀고 근육으로 뭉친 단단한 몸매에 험상궂은 검은 테 안경을 쓴 시인 고철의 풍모를 가감 없이 그린 시이다. 한 마디로 시인이 살아온 지난 날은 험난한 역경이었을지라도 수천 번의 매질을 통해 한 자루의 낫이 되고 칼이 되는 쇠처럼 스스로 스며들듯 단련된 사람.
지고지순한 적 없는 나도 떤다
- 「참회록」부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신년 계획을 가을에 또 적는다
그래야 반의반이라도 건질 수 있다
스스로의 결의에 비웃거나 비꼬아선 안 된다
-「신년 계획을 가을에 쓴다」부분
여러 번 겨울을 살아봤더니
겨울을 여러 번 헹구었더니 견딜 만 했다
- 「국화꽃 우리는 아침」부분
스스로 불량함을 고백하면서 작심삼일의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표명에 은근히 속으로 놀란다면 당신도 아직은 개과천선의 여지가 남아있는 사람이다. 그는 패배 의식에 길들여진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현실에 만족하자는 낭만주의자도 아니다. 그의 운명을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 Amor Fati 는 냉소적으로 우리가 은폐하고 있는 삶의 진상 眞相을 체득한데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인용한 시에서 말하는 님은 무엇입니까?
교과서 안에서 님의 침묵이란 시를 읽었고
주관적 생각으로 시험을 치른 적 있다
학교가 원하는 답 조국을 적기가 싫어서
최재옥이라 써냈다
교무실 불려가 엄청 맞았다
최재옥이는 노천재건중학교 1학년 때의 짝이다
읍네 희망리로 이사 오면서 헤어졌다
진짜다
최재옥이가 누군데? 물어서
헤어진 여자 친구라 말했다
또 때렸다
너 몇 살이냐고 물어서 몇 살이라 말했더니
꼬박꼬박 어른한테 말대꾸한다고
더 때렸다
정답을 적었는데도
나는 틀린 답이 되었다
- 「정답을 적었는데도 맞았다」전문
우리가 사는 사회는 수많은 규칙을 만들어 우리를 압박한다. 도덕과 윤리, 법과 양심은 때때로 변하고 뒤집혀진다.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으며 완성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때때로 합리화한다. 일거리를 찾아 인력사무소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는데 아마도 인력사무소 사장이 잘 보았는지 차례를 건너뛰어 그를 호명한다. 시인은 일용노동자들을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것들’로 하대하면서 – 일종의 승리감으로 - 그들을 물리쳤다고 너스레를 떤다.
차례가 아닌데 부른다
(...중략...)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것들 물리치고
나는 大光의 인력이 되었다
-「대광인력사무소」부분
그는 사실 복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을 버렸다(「터닝포인트」 참조)고 고백한다. 고의던, 타의던 시인의 이런 은둔은 낯설어 보이지만, 그에게는 살벌한 ‘받은 대로 돌려주어야 하는- tit for tat – 상쟁相爭의 세상 너머에 있는 자연을 친구 삼고 있다. 강아지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교감언어」)’, ‘고요와는 상관없이 / 세월 한 철 살아가자고 / 있는 힘 쏟아내며 주둥이를 움직이는’(「나와 딱따구리가 사는 법」) 딱따구리를 무심히 바라보거나 ‘낑낑 소리를 참으며 / 천산 넘어가는’(「밟는게 능사는 아닌데」)개미를 밟으며 먹먹해하는 시인은 세상을 버린 것도 아니고 숨은 것도 아니다.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침소봉대, 각주구검의 농담(?)이 횡행한다. 「사회주의와 나의 모순」에 나열된 개념들에 대한 냉소는 ‘모든 모순에는 핑계는 있고 순서가 없다’는 의식으로 귀결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인의 인생 교과서는 오염되지 않고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연이다. 우열을 가리지 않고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지 않는 자연은 완상玩賞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긴 하루를 살아가려고
뱀이 스-슥 거리며 지나가고 있다
긴 하루를 살아보려고
나도 스-슥 거리며 뱀을 피해서 갔다
각자의 볼일들이 수월해 졌다
천 년의 한쪽을 살아가듯이
다르면 다른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와글와글 천 년이 흘러서 간다
-「천 년을 살아가듯이」 전문
이와 같이 시집『극단적 흰빛』은 현학적 수사가 횡행하는 오늘의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추상을 배제하고 직설적 독백으로 다가오는 시편들은 슬프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괴롭다. 우리가 체험한 모든 슬픔은『극단적 흰빛』에 펼쳐진 서사 敍事 속에서 그저 뜨겁게 달궈진 눈물 같기도 하고, 가슴을 벼리는 날카로운 칼이 되는 듯한 죽비로 현현된다. 시인 고철은 오직 그가 마주치고 있는 사실(현상)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속에 웅크리고 있는 뼈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 시인에게는 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껍질들은 동그랗게 말려 있다 / 견디며 단단하게 / 껍질은 견고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종의 치밀한 계획 같’(「껍질이 전하는 식사법」1연)기 때문에 시인이 할 일은 껍질에 현혹되어서도 안되며 오직 존재의 실체를 찾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명에 힘을 쏟는다.
한 겹의 때를 벗겨야만
너가 보인다
한 겹의 너를 벗겨야만
잘못 살아온 내가 보인다
한 겹의 너를 지워야만
흰 도화지 같은
큰 세상 하나가 보이게 된다
- 「지우개 설법」 전문
아직 시인 고철에게는 고철古鐵이 되어야 하는 희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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