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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 시집 『긍정을 걸었다』:일상에서 삶의 비의秘義를 찾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21. 17:56

일상에서 삶의 비의秘義를 찾다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1.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으나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은 여러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표현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를 읊조릴 수 있으나 예술가로서의 시인에게는 단순한 표현 욕구를 넘어서는 일관된 세계관, 전인미답 前人未踏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교,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 삶을 향한 지적 탐구를 시로 환치하려는 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시작 詩作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始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완성이 있을 수 없듯이, 시인은 영원히 시인이라는 이데아를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집『긍정을 걸었다』는 시인이 갖추어야 할 위상이 선명하게 드러난 시집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시집『긍정을 걸었다』는 최수경 시인의 여서 번째 시집이다. 2000년에 첫 시집 『묻어둔 사랑 향내 있겠네』를 상재한 이래 세계의 자아화로 요약할 수 있는 서정 抒情을 발판 삼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대화에 귀 기울이며 삶의 희로애락을 정화淨化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이 시집『긍정을 걸었다』로 결집되어 있음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최수경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연과의 친화와 그로부터 빚어지는 농경사회의 미덕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이 두 개의 화두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최수경 시인의 시적 성취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2.

 

짐작하건대, 최수경 시인이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은 동두천이다. 지금은 도시화가 이루어진 곳이지만 여전히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자연의 숨결을 마주할 수 있는 농경農耕과 공동체의 풍경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동두천시 지행동 238번지

이 자리에서만 70여 년 살고 계십니다

 

-「인명은 재천」1연

 

“아랫집 착한 동서가 푸짐하게 뜯어준

곤드레 나물과 씀바귀를 삶아

 

-「시골 풍경」1연

 

맞은편 마을에서 눈 치우는 소리

 

-「눈 치우는 소리 」부분

 

구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정정한 어머니와 아랫 집에 사는 동서와 다 같이 나와 눈을 치우는 마을에서 정주定住의 삶을 누리는 시인의 의식은 자연이 지니고 있는 미덕과 공동체의 나눔을 체감하는 자양분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심리적 측면에서 이런 의식은 청소년기에 습득해야 할 자아정체성 ego identity를 인위人爲를 배제한 삶의 순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수경 시편에 깔려있는 자연과 오고가는 계절의 순환은 단순한 낭만이나 감상과는 그 결을 달리 한다고 보여진다.

 

흙으로 메꿔져버린 물웅덩이에서 들리던 개구리 울음이 ” 개굴 개굴 이니다 / 또로롱 또로롱 청아한 소리다“(「봄이 오면셔 생긴 일」 1연)에서 보듯이 밤잠을 못자게 시끄럽게 울어대던 개구리 소리가 청아한 것은 새로운 생명을 간구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며, ”평범을 추구했을 뿐 / 아예 터무니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회상」부분)다는 술회도 생명의 궁극적 욕구 또한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진실임을 체득하였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농경의 풍경 속에서 삶에 대한 긍정은 부정적인 체념과 은일隱逸함과는 그 결을 달리한다.

 

노을 길이면 어때

때론 가볍고 때론 무겁게

희로애락을 걸었다

 

-「산책」 부분

 

노을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을은 하강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쓸쓸한 시간의 영역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정조가 꼭 인생의 후반에 느껴지는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생의 전반적 풍경으로 인식했다고 보았을 때 그 의미가 깊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집 『긍정을 걸었다』의 대부분의 시들은 이와 같은 자연과 계절을 음미하고 있지만 시인이 감각하고 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평범한 우리의 인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봄은 약동과 희망, 여름은 상승, 가을은 쇠락, 겨울을 사라짐과 소멸로 바라보는 인식은 최수경 시인에게는 무용한 일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이나. 열매 맺고 떨어지는 일이나, 비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모든 현상은 거대한 자연의 순환에서 바라보자면 모두 생명의 외침이며 약동이다.

 

혹독한 겨울이 너무 길고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을 때
봄기운이 들락거리면
언 땅을 뚫고 파란 싹이 뾰족하게 나오고
너무 반가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와
눈 맞춤하며 즐거움을 찾는다

나는 구근 화초를 좋아한다

 

구근만이 할 수 있는 원초적인 힘

아무리 추워도 땅속에서 깨어나

양수도 없이 새싹을 탄생시키는

그 위대함이여

너를 분양하여 내 곁에 둠을

후회하지 않으니 언제까지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

 

오늘도 빨간 구슬같은 작약이

서너 곳에서 땅을 열고 있는

기적 같은 풍경을 본다

 

 

- 「나는 구근 화초를 좋아한다」 전문

 

구근화초球根花草는 땅속의 뿌리나 땅속줄기에 영양분을 저장하여 다육 조직이 발달한 화초라고 정의되어 있다. 추운 겨울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봄이 되면 개화하는 식물이 구근화초인 것이다. 시「나는 구근 화초를 좋아한다」가 함의하는 바는 추위를 견디는 구근의 힘과 그 구근을 감싸안은 흙의 생명력이 서로를 떠받치는 공생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에 있다. 이 세상에 오로지 자신의 의지 하나로 태어나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모든 존재는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는 인과因果의 고리를 적절하게 드러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봄은 겨울을 지나야 오고, 인내와 기다림의 열망이 클수록 기쁨 또한 커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또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나의 잘못된 판단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야기한다.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들을 최수경 시인은 삶의 반면교사로 삼는데 능숙한 필치를 보여준다. 그 몇 가지 이야기들을 간추려 본다.

 

시 「내 탓」은 전화를 받지 않는 지인에게 호통을 치는데 알고 보니 전화번호를 잘못 누른 자신의 잘못임을 알아채는 이야기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몸에 밴 아집까지 무조건 사랑했던 / 내 탓이다.’ 라고 고백한다. 이 시는 요즘 세태에 넘쳐나는 상호 간의 불신과 증오를 단숨에 내려치는 죽비가 아닐까 싶다. 시「어떤 부부는 겉으로는 합이 맞아 대장간에서 장단을 맞추며 흥겨워하는 것 같지만 평생 마음이 맞지 않아 헤어질 궁리를 해온 어느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남편이 치매에 걸리자 마음이 바뀌어 간호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그려내며 ‘버리려 했던 그 인연을 꼭 붙들고 사는 / 언제부턴가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를 통해 시인은 불현듯 측은지심을 상기해낸다.

 

인연은 선악을 초월하여 내게 다가온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경지로 이끌어간다. 개는 인류가 길들인 으뜸가는 가축이다. 여전히 늑대는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채로 살아가지만 개는 늑대의 야성을 버리고 인간의 품으로 들어왔다.「고라니를 쫓아간 진돗개」는 “진정한 삶이란 무엇일까?”를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학습을 통해 도덕과 윤리를 체득하고, 그 그물망 안에서 안전을 보장 받는다. 진돗개는 고라니를 보는 순간 목줄을 매단 채 고라니를 향해 달려간다.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사냥의 본성이 개를 무한한 위험 속으로 이끌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시는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욕망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시인은 앞에서 말한 측은지심을 배양하는 것이 남은 생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시「앞서 가는 남자」와 「밥해 주는 여자」는 지나온 우리의 시대상을 축약해서 보여준다. 권위의 상징으로 치부되던 가부장적 남자와 수동적이고 약자로서의 여자가 이제는 서로를 염려하는 관계로 변화한 풍경, ‘앞서가는 남자가 가끔 뒤를 돌아본다 / 걸음걸이가 예전 같지 않은 아내가 / 걱정스러운 표정’(「앞서 가는 남자」부분)을 지으면서도 여전히 ‘삼식이다 / 색다른 반찬을 즐기고자 / 나의 노동을 기다리는’ (「밥해 주는 여자」 1 연)남자를 여자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더러는

꼭꼭 숨어버린 행복을

힘들게 찾아서 먹어 본다
나도 맛있다
황혼도 동행도 짭짤하다

 

- 「밥해 주는 여자」 마지막 연

 

그러나 이 두 편의 시에 등장한 남자와 여자를 대립적 관계에서 곧바로 동화同化나 화해의 관계로 이입시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타인과의 이해와 공감은 시간의 축적과 갈등을 통해 숙성되는 것이지 짧은 시간의 경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짧게 언급한 시들은 시인이 직, 간접적으로 체험한 애피소드인 동시에 이익을 좇아 이합집산하는 오늘날의 경박한 세태를 암유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그 의의가 돋보인다고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고 충만하게 이끄는 항심恒心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시인은 무쇠솥을 통해서 변하지 않고 굳센 의지, 즉 항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투박하지만
십 수년이 되었어도
깨질 일이 전혀 없는
어느 집이나 있을법한
그러나 어느 집이나 없기도 한
네게는 전기선도 없고
유명한 메이커 제품도 아니다

누룽지를 선호하는 주인은 아니지만
적당한 누룽지로 밥맛을 끌어 올린다
밥 짓는 동안 네 곁을 지켜야 하는
수고로움의 대가는 분명하다
고슬고슬한 밥 짓기의 명수라
옆에 멋진 전기 압력밥솥을 제치고
주방에서 제일 사랑받는 이유다
내게 길들인 으뜸 밥맛을 하루라도
벗어날 수 없어서야

 

- 「무쇠솥의 진가」전문

변화하지 않으면 원시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덕목은 인간의 노동을 경감시키고 생각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자동기계의 활용이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크거나 작거나 무쇠솥은 어느 집에나 있는 필수용품이었다. 아궁이에 산에서 거둬온 나뭇가지를 넣어 때고, 일정하게 화력을 유지하기 위해 솥을 지켜보아야 했던 수고를 이제는 전기밥솥이 뜸까지 들여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시인은 여전히 무쇠솥에 쌀을 얹치고 누룽지와 고슬고슬한 밥맛을 잊지 못해 그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쨌든 무쇠솥의 사용가치는 그 유용성에 있어서 전기밥솥에 미치지 못한다. 불 때는 노동과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밥을 만드는 약간의 수고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무쇠솥은 우리의 삶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가치를 환유하는 상징으로 시인은 인식하고 있다. 무쇠가 지니고 있는 우직함, 쉽게 달궈지지 않고 쉽게 식지 않는 끈기가 사라진 오늘날의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환난은 우리의 삶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은 확실하게 미래를 예견할 수 없다는 불안으로 대체되었다. 그런 상황을 그린 시로「부디 건강하시라」, 「기다림」,「갇힌 일상」 등의 시를 들 수가 있다. 마스크로 입을 봉하고,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고, 친구가 세상을 떠나고, 병든 세상에 지쳐가면서도 시인은 ‘내일을 믿고 사는 사람들아 / 부디 그대 건강하시라’(「부디 건강하시라」마지막 부분) 고안부를 전하고, ‘화원에 가서 수선화를 샀다/ ....... 마당 한쪽에 화단을 만들고 수선화를 심었다 / 매일 물을 주면서 너와 친구 하련다 / 옆에 대추나무도 죽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기다림」부분)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오늘도 코 막고 입 막고 / 그나마 새소리가 있는 산으로 ’ (「갇힌 일상」마지막 부분)가는 분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3.

 

그러는 사이 시인은 어느새 칠십 고개를 넘었다. 예전에는 칠십 세를 고희 古稀라 하여 장수의 기준으로 여겼는데, 그러나 지금은 75세까지 장년 壯年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이다. 혹자는 이 시기를 황금시기 Golden Age 라고 부르기도 한다. 힌두교에서는 임서기 林棲期, 즉 가족 부양과 사회적 역할에서 해방되어 숲을 오가는 자아성찰의 시기로 본다. 이 시기에 처한 시인은 시집『긍정을 걸었다』의 몇몇 시편에서 노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시 「수영장 풍경」,「선녀탕」, 「나이 들어 좋은」등은 수영장과 목욕탕의 여러 풍경을 묘사하면서 광활한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로 노년의 실체를 역동의 에너지로 발산시킨다. 시력이 떨어져서 팔순이 넘은 노인에게 선녀라고 말을 걸고 난 후에 시인은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나이 들어 불편하지만
덜 듣고 덜 보여도
두루뭉술 삶이 좋다

 

- 「나이 들어 좋은」마지막 부분

 

이와 같이 최수경 시인의 시적 건강성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체험과 본유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 친화적 감성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데 있다. 달리 말하면 연상이나 추리와 같은 사유의 과정을 건너뛰면서 찰나적 직관의 세계를 상승시키는 힘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상승의 이미지는 시집 3 부에 수록된 「별」,「어떤 별」,「별을 품다」와 같은 시에서 나타나는 바,

별이 상징하는 어둠, 빛, 경배 등의 의미망을 통해 생노병사의 현실을 초월하는 이상세계를 염원하는 시인의 의식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까닭에 최수경 시인의 시집 『긍정을 걸었다』는 시인 최수경의 마지막 시업이 아니라 노년을 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소중했던 시간도
덧없이 흘러가고
들숨과 날숨의 공간일 뿐
설렘이던 순간도 희미해

나그네라면 머물러주오
마음 한 자락 얻기 위해
나는 무얼 했나
간밤의 몽환은
즐거운 탈선

종일 불볕더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더니
먹구름이 비를 몰고 올 기세다
요란한 천둥 번개는
시원한 비를 뿌리지 못하고
호우주의보가 무색해진
하늘도 못 믿을 하루가 저물어도
빈 잔에 내일을 위한 풍요를 채워
찰랑찰랑 넘칠 듯 환희를 마신다

 

- 「긍정을 걸었다」전문

 

시인은 허무도 삶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늙을 수밖에 없다. 어느 사람은 그 늙음을 한탄스러워하고 허무감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또 어느 사람은 조금이라도 늙음을 느리게 맞이하려고 온갖 방법을 찾아 헤맨다. 논어 위정편에 ‘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불踰矩’라 하였다. 도道 깨우치지 않은 범인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 마음 가는 대로 하면서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법도란 무엇인가? 이 세상에 그물처럼 펼쳐진 도덕과 윤리라는 관습, 거기에 더하여 희로애락을 어쩌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이 그러하다. 시「긍정을 걸었다」는 시집의 표제시인 동시에 시인 최수경의 삶의 전경全景을 보여준다.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삶의 허무를 안아들이는 자세는 누구나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수경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멀어지는 풍경』의 해설 말미에서 김석환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치열한 자아성찰로 빚은 시편들이 타자의 욕망에 사슬처럼 묶여 진정한 ‘나’가 아닌 위장된 ‘나’의 얼굴로 살아가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리라 믿는다. 때로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의 참된 모습을 만나 고유한 주체로 살아갈 힘을 주고 자유를 누리게 할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여섯 번쩨 시집을 상재하면서 위와 같은 시인의 풍모가 일관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인에게는 완성이 없다. 선담후농先淡後濃- 처음에는 옅게 그리고 점차 짙게 먹을 칠하는 화법- 의 기세가 다음 시집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가기를 기원한다.

 

*무이재 시선집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