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공부할 시 24

[150] 눈보라

오피니언전문가칼럼 [최영미의 어떤 시] [150] 눈보라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2.18. 03:00 일러스트=박상훈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문태준 (1970~)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

공부할 시 2023.12.26

[146] 감

[최영미의 어떤 시] [146] 감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1.20. 03:00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許英子 1938~) 일러스트=박상훈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 이웃집 담벼락 위로 뻗은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보며 가을을 느끼곤 했는데, 요즘 도시인들은 감나무를 보기 힘들다. 어디 하나 뺄 곳 없이 순도 높은 시어들로 완성된 시. “떫고 비리던”이라니. 얼마나 생생한 표현인가. 덜 익은 감의 떫은맛에 “비리던”이 들어가 청춘의 아픔과 서투른 우여곡절이 연상되었다. 더 이상 떫고 비리지도 않은 ‘내 피’가 갑자기 약동하면서 빈속에 소주 ..

공부할 시 2023.11.20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의 어떤 시] [143] 날아가는 낙엽(Das treibende Blatt)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30. 03:00업데이트 2023.11.02. 14:57 일러스트=이철원 날아가는 낙엽 (Das treibende Blatt) 마른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내 앞을 날아간다. 방랑도 젊음도 그리고 사랑도 알맞은 시기와 종말이 있다. 저 잎은 궤도도 없이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만 가서 숲이나 시궁창에서 간신히 멈춘다. 나의 여로는 어디서 끝날까.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1877~1962) (송영택 옮김) 내 나이 또래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독일 작가, 한국에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소설로 더 알려졌지만 시도 곧잘 쓴 헤세. 중학생 시절에 그의 ‘..

공부할 시 2023.11.07

[141] 감사

[최영미의 어떤 시] [141] 감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16. 03:00 일러스트=양진경 감사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대기를 마시며 내가 자유롭게 산보를 할 수 있는 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것만으로 나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다 -노천명 (盧天命 1912~1957)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나이가 들수록 포기가 빨라지고 욕망도 흐지부지, 내가 뭘 원했는지도 잊고 살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것이다. 젊어서는 노천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그의 시선집을 읽고 그 투명한 언어에 실린 쓸쓸한 마음의 풍경에 측은지심을 느끼며 ..

공부할 시 2023.10.19

[140] 너에게

[최영미의 어떤 시] [140] 너에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10.09. 03:00 일러스트=백형선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

공부할 시 2023.10.16

[139] 향수(鄕愁)

[최영미의 어떤 시] [139] 향수(鄕愁)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9.25. 03:00업데이트 2023.09.25. 09:02 일러스트=이철원 향수(鄕愁) 나의 고향은 저 산 너머 또 저 구름 밖 아라사(俄羅斯·러시아)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나는 문득 가로수 스치는 저녁 바람 소리 속에서 여엄-염 송아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선다. -김기림 (金起林 1908~?)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제목 ‘향수(鄕愁)’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고 아련하다. 어떤 요란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편안한 시어들. 3행이 1연을 이루는데, 아래 행으로 갈수록 행이 길어지고 넓게 퍼진 모양이 마치 산자락이 펴지듯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김기림은 1930년대 조선 문단에서 가장 앞서가는 모더니스..

공부할 시 2023.10.06

[2]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최영미의 어떤 시] [2]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최영미시인 입력 2021.01.11.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원주 가는 길(原州途中) 봄바람에 지팡이 짚고 관동 가는 길 원주로 들어서니 안개 낀 수풀 인적 드문 객사에 마차 또한 드물고 드높은 누각 비 온 뒤 붉은 해당화 십 년 길 누비며 다 닳아버린 신발 드넓은 세상에 텅 빈 주머니 하나 시 짓는 나그네 마음 어지러운데 산새 노래하듯 기생소리 들려오네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최명자 옮김) 김시습이 26세에 이런 시를 썼다. 그도 남자니까 기생 소리에 마음이 흔들렸겠지. 마지막 줄에 ‘기생’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한시에선 ‘어화’(語花·말하는 꽃, 기생을 일컫던 말). 해당화와 대구를 이뤄 심심한 시에 생기를..

공부할 시 2023.09.10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최영미의 어떤 시] [132]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8.07. 03:00 매실을 따고 있네요(摽有梅) 매실을 따고 있네요 일곱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날 좀 데려가세요 매실을 따고 있네요 세 개만 남았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지금 빨리 오세요 매실을 다 땄네요 광주리에 담고 있네요 나를 찾는 임이시여 말만이라도 해주세요 -작자 미상, 출전 (이기동 옮김) 일러스트=이진영 지금부터 2500여 년 전, 공자가 편찬했다는 ‘시경(詩經)’에 실린 노래다. 매실이 익을 무렵 그녀의 청춘도 무르익어 날 좀 데려가 달라고 임을 부른다. 중국의 어느 지방에서 매실을 따며 부르던 민요일 텐데, 초여름에 매실을 따는 고된 노동이 사랑 노래를 부르며 좀 가벼워졌..

공부할 시 2023.08.07

[1] 기대지 않고

[최영미의 어떤 시] [1] 기대지 않고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1.04.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기대지 않고 -이바라기 노리코 (1926-2006)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성혜경 옮김) 그래, 차라리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게 낫지. 내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며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대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노리코 여사는 엄청난 독서를 했을 게다. 이런저런..

공부할 시 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