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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시

[140] 너에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0. 16. 15:25

[최영미의 어떤 시]

[140] 너에게

입력 2023.10.09. 03:00
 
 
일러스트=백형선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 (柳致環 1908~1967)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생뚱맞아 한참 노려보았다. 푸른 아침도 푸른 저녁도 희귀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희뿌연 도시의 아침과 저녁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마포의 어느 도서관에서 ‘너에게’를 읽었다. ‘좋은 이웃’에 공감하며 나의 행운을 저울질해 보았다. 살아갈수록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아파트 천장 누수로 위 아래층과 갈등을 겪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한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 있으리라.

나 또한 올여름에 누수로 고생을 했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집과 살림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는 중학교 동창과 같은 건물에 사는 덕분에 인생이 훨씬 편해졌다.

시의 제목 ‘너에게’도 살갑다. 아무 수식어도 달리지 않은 ‘너에게’가 멋있으면서도 무섭다. 시인은 ‘너’가 있어 행복했던 것 같은데, 시인이 ‘너’라고 불렀던 그이도 시인처럼 행복했을까?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의 제목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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