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3.12.18. 03:00
눈보라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
-문태준 (1970~)
‘눈보라’로 이런 시도 쓸 수 있구나. 강한 바람에 눈이 날려 시야가 흐려지고 심할 때는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카페의 유리창 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 좋은 낭만이지만, 세찬 눈보라 치는 바깥을 걸어가는 일은 피하고 싶다. 어릴 적에는 눈보라가 두렵다기보다 신기했지만, 지금은 눈보라에 내 몸이 젖는 게 싫어 우산을 펼쳐든다.
그 매서운 눈 부스러기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넓이’를 이야기하는 시인이 여기 있다. ‘눈보라’의 탄생에 대해 문태준 시인은 어디선가 이렇게 썼다. “아득하게 너른 들판을 지나가는 눈보라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다… 눈보라는 앞뒤 사정이 많은 한 사람의, 신산한 세상살이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가끔 갖게 되는 쓸쓸한 내면의 풍경 같기도 하다.”
‘헝클어진 사람’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의 점층법도 효과적이다. 모두 가고 눈보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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