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님의 차이는 획 하나 차이인 것처럼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나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국 여행을 하다가 한국인을 만나거나, 만일 같은 동네에 살았던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야말로 제일 친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지 않는가. 그러나 정작 자기 고향에 돌아오면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소가 닭 보듯 쳐다본다. 이상한 일 아닌가. 고향에선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도 모르는 척 하던 사람이 왜 외국에선 한국 사람만 만나도 반가워하는 것일까. 결국 사람끼리 친해지는 것은 상황과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에 대해선 무관심하던 사람이 동창회 모임에 가서 몇 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서 반가워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수십 년 전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그 동안 연락도 없이 지내던 학생이 매일 마주치지만 모르는 척 하는 사람보다 더 가까워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럴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다리를 놓아주지 않아서 그렇지 다리를 놓아주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은 나와 상관이 있을 수 있다.

결국 사람은 절대적으로 고독한 게 아니라 자기가 누구와 가깝고 싶은지를 고르는 존재이다. 외로운 사람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기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뿐이다. 남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남을 안 좋아하는 것이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가 아무개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반문하셨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꾼다면 “누가 나의 친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남에게 친구가 되어주지 그러느냐”라고 답한 것과 같다. 매우 단순한 생각의 변화가 고독함의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변화를 실천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집가지 못한 처녀들이 항상 하는 말은 “괜찮은 남자가 없다”는 말이고, 장가가지 못한 총각들도 늘 “여자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통계적으로 남녀의 비율은 1대1로서 거의 비슷하다. 그러므로 “남자가 없어서 시집을 못 간다”는 말은 틀린 지적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조건이 맞는 사람을 못 찾겠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음식을 가려 먹는 사람이 있듯 사람을 가리는 사람이 많다. 음식을 가려 먹는 아이를 바로잡는 비결은 며칠을 굶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을 가리는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우리가 일평생 배워도 부족한 부분이 이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스로 자초하는 소외. 자신이 선택하는 고독. 그리고 남과 쉽게 가까워질 수 없는 이질감. 이것이 인간의 고민이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있다면 천국은 모든 사람을 귀중히 여기고 서로 가까워지는 곳인 반면에 지옥은 모든 사람이 영원히 남으로 남는 곳일 것이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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