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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文學은 대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20. 22:27

人文學은 대화다
 
황동규 /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십 년 전쯤부터 우리나라에 인문학(人文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기업가들이 경영학만으로는 미래에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대학에서 다투듯 CEO들을 위한 특별 강좌를 만들고, 강좌를 제대로 들은 사람에게 제 몇 기 수료장을 주는 식의 교육 관행도 생겨났다. 그러자 시청이나 구청, 심지어 백화점에서까지 인문학 강좌를 들여놓고 공무원 연수교육 과정에 인문학을 끼워 넣기도 했다. 이뿐이랴, 인문학 서적이라 부를 수 있는 책들이 쏟아져 나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여럿 있다.

그러나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가 많이 모자란다는 사람이 많다. CEO 인문학 강좌가 취지와는 달리 기업인들의 사교장으로 변했다는 말도 있다. 서양 CEO들은 인문학 강좌 같은 것이 따로 없는데도 인문학적 시야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학교, 기업인 단체, 공무원 연수원에 불려 나가 인문학 강연을 한 나는 우리나라 ‘인문학 강좌’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하는 인문학 강좌는 주입식이다. 처음 만나는 청중을 향해 한 시간 십오 분쯤 강의를 한 후에 십오 분 정도의 질문 시간이 주어진다. 질문 자체가 적은 데다가 형식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생각의 주고받음이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주입식 교육이 아닌 서양에 인문학 강좌가 따로 없는 이유다.

오래전에 읽어서 이제는 거의 줄거리만 남았지만,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해 보자. 이야기의 필자는 삼십여 년 전 영어회화 교수로 도쿄(東京)대학에서 근무했던 미국인이다. 그는 몇 년간 열심히 회화를 가르쳤다. 강의 내용을 우리말로 하자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얼맙니까’ ‘전철역이 어디지요’ 등등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꼭 필요한 회화부터 시작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을 받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운전면허는 어떻게 땁니까’ 같은 조금 복잡한 단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을 가르치다 보니 언어가 다른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짬을 내어 관광지 닛코(日光)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우연히 일본인 불교 승려 하나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 승려의 영어 발음은 당시 많은 일본인이 그랬듯이 어색했다. 삼십여 년 전 일이다. 얼마 전 가보니 보통 일본인의 영어 발음이 우리와 별 차이 없었다.

관광지를 함께 걸으며 발음뿐 아니라 때로 영어 문장 구조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대화에 응하는 승려와 회화 교수는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지금 확실히 기억하지는 못하나 일본 불교에 관한 이야기, 일본 생활 관습에서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것들, 그리고 유명한 미국 소설과 영화 이야기였을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히피들에 관한 것도 있지 않았을까. 그 교수는 그때 자기가 일본에 와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회화가 아닌 대화를 나눴다고 술회하고 있다. 교수는 대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일본을 더 알게 되었고, 승려는 구체적으로 미국을 더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회화를 대화로 만드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서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하는 촉진제다. ‘아는 것이 힘’을 앞에 내세우는 장치가 아니다. 한두 번의 강의로 얻는 지식의 대부분은 이제 스마트폰으로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승려와 교수는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다. 자기가 보고 느끼고 깨우친 것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당시 도쿄대에서 영어회화 강의를 듣던 학생 가운데는 그 승려보다 더 박식한 사람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뿐이 아니라 미국 정치와 역사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영어 실력만 해도 그 승려보다 나은 이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풍습에 따라 학생 신분으로 주눅이 들어 교수와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더구나 회화 시간이었으니까.

우리가 소통에 대한 강연을 한두 번 듣는다고 해서 소통을 잘하게 되지 않는 것처럼 칸트에 대한 강연을 듣는다 해서 외국인 거래 상대자와 칸트 철학에 대한 대화를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삶 속에서 칸트를 만나고 나서야 칸트가 자연스레 대화에 껴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 강좌를 어떻게 만들면 바람직할 것인가?

CEO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인들이 중심이 된 청중은 이미 세상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상당히 획득한 사람들이다. 강의자보다 삶에 대해 더 성숙한 이해와 행동규범을 익힌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강의자가 미리 간단히 준비한 것을 읽고 나서 청중과 대화를 하는 데 시간을 쓰면 어떨까. 나폴레옹법과 CEO들이 잘 아는 오늘날 상법 체계가 대조되어 논의된다면 구체적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서양과 동아시아의 종교인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토론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보다 풍부한 토의가 될지도 모른다. 중간에 거래처가 중동 지역인 CEO로부터 이슬람과의 비교가 터져 나올 수도 있다. 한꺼번에 모두 참여하기는 힘들겠지만, 구체적인 사례가 여러 각도로 논의되는 대화들만 잘 경청해도 얻는 바가 크지 않을까. 인문학 학습은 인간과 인간이 인간답게 대화해 서로의 세계를 넓히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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