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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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지장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7. 21:55

내소사 지장암

 문화일보 게재 일자 : 2015년 09월 18일(金)
황동규 / 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세월이 가면 추억도 희미해지기 마련이지만, 원모습으로 생생하게 찾아오는 추억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단연 내소사 지장암이다. 그렇다고 그곳을 여러 번 간 것도 아니다. 약 20년 간격을 두고 늦봄과 한여름, 이렇게 두 번 다녀왔을 뿐이다. 두 번째 다녀오고 쓴 시 ‘20년 후’에 붙인 글을 읽어보면 두 번째 방문도 벌써 6년 전 일이 되었다. 그래도 두 번 다 이삼 년 간격의 바로 얼마 전 일같이 생생하다. 첫 번째 방문 이야기부터 꺼내보자.

전주에 가면 으레 만나는 사람 둘이 있다. 한 사람은 안도현, 이미 뛰어난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이 자리에서 더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또 한 사람은 영문과 제자 전북대 교수 이종민이다. 이 교수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문화를 보존하고 심화시키는 일에 그야말로 정열적으로 또 그 정열에 걸맞은 성과를 낳으며 일하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의 고장 전주는 쉽게 주무를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그의 열성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켜 헤아릴 수 없는 곤란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성이 전주 교외의 숨은 보물 일지 스님을 찾아내어 나를 만나게 했을 것이다.

첫 방문은 이십오 년 전쯤 전북대에 문학 강연을 갔을 때 이뤄졌다. 강연과 뒤풀이가 있은 다음 날 이 교수 부부가 꼭 들를 데가 있다면서 나를 차에 태우고 내소사 지장암에 갔던 것이다.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조금 올라가니 넓은 마당 가득 그야말로 기화요초가 만발한 암자가 나타났다. 황홀!

그러나 더 놀란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요사에서 훤칠한 비구니 주인 일지 스님에게서 금빛 우려낸 차 대접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나는 인사를 하려고 일행이 꽃이 가득한 마당에 나섰을 때다. 바로 앞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이 하도 아름다워 일지 스님에게 “환장하게 곱네요” 했더니 스님이 한마디로 “파 가세요” 하는 게 아닌가. 유난히 눈에 띄는 그 꽃은 스님의 사랑을 온몸에 받고 있을 터인데…. 호미가 어디 있느냐 묻지도 못하고 당황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 장면이 6년 전 임플란트 때문에 한 열흘 금주를 하며 토막잠을 자던 어느 날 밤 생생하게 나타났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잠시 잠을 밀쳐두고 생각에 잠긴다.

일지 스님 꽃은 그냥 꿈이 아닌데

생시와 꿈 사이 차단벽이 모르는 새 슬며시 열렸나.

그 꽃 하나만을 위해 다시 지장암으로?

영산홍 수국 장미 부용 맨드라미들을 지나

나무 꼬챙이 기어오르며 조그맣게 동그라미 그리는 넌출들을

절묘한 장식음으로 쓰는 덩굴 꽃들의 합창을 지나

일지 스님 앞

저 세상 불빛처럼 피어 있는 꽃에 다가갈 수 있을까?

꿈결처럼, ‘파가세요!’ 말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들고 간 호미는 어디 발밑에 파묻고 올까?”(‘토막잠’ 뒷부분)

호미를 준비해 갔더라도 그날처럼 꽃을 파내지 못하고 오히려 호미를 어디 묻을까 당황해하는 꿈을 꾸고 나서 떠올린 광경이다.

그 꿈이 재촉해서 이 교수 부부를 부추겨 20년 만에 지장암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들어서며 우선 놀랐다. 그 넓은 마당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이 그동안 꽃을 기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모두 입양 보내고 무식하게 멋들어진 석등 하나만 마당 가운데 세워놓고 있었다. 전처럼 금빛 우려낸 차를 대접받다가 또 한 번 놀라게 한 것은 스님의 미니 의자였다. 손님들에게는 보통 의자에 앉게 하고 스님은 가로세로 등받이 모두 20㎝인 아주 조그만 의자에 앉았다. 필리핀에 갔다 온 지인에게서 선물로 받은 후 스님에게 독점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의자였다. 기회를 엿보다가 스님이 연잎 밥 점심 준비하러 잠시 방을 나간 사이 그 의자에 앉아 보았다.

“의자에 슬쩍 몸을 내려놔 본다.

위 아래 옆 척척 맞는군!

나와 함께 사는 것들, 책상 의자 텔레비 오디오 기기들

하나같이 너무 크고 높지.

‘그래 맞다.’ 이름 잊었지만 모습 눈에 어른대는 새가

창밖에서 지저귀듯 말했다.

‘세월이 이곳을 담백하게 만들었다.

그 속에 희견성(喜見城) 있네.’”(‘20년 후’ 끝 부분)

삶을 위해선 사람들이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크기의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이 나에게 왔다. 가로세로 등받이 각각 20㎝ 크기의 의자에 걸맞은 것들만 가지고도 더 욕심내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희견성은 불교에서 수미산의 정상 불법의 수호신 제석천이 사는 곳이다.

두 번째 지장암에 다녀온 후 한동안 즐기는 술까지 포함해서 삶에서 모든 것을 줄여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컴퓨터 테이블부터 없애거나 줄일 수 없었다. 지장암처럼 세속에서 떨어져 살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마음으로나마 그렇게 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그 의자보다 더 큰 것들과 같이 사는 것 자체가 복 받은 삶이라는 감사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 감사의 마음은, 이름을 잊었지만 중국 송대의 한 선승이 한 당부, 들어오는 복을 전부 다 받지 말고 일부는 남기고 받으라는 말과 통하지 않을까. 다 받으면 그다음은 내리막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