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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와 김치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31. 12:01

이문구와 김치수
 
김주영 / 소설가

허전하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두 사람을 떠올리면, 가슴이 허전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실연한 사람처럼 길거리로 나가 혼자 술을 마신다. 시쳇말로 ‘혼술’이다. 그게 몇십 년 전이었던가. 문단 데뷔 초기였던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난생처음 시골 주소지로 배달된 원고 청탁서 한 장을 받았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10시간 가까이 돼서야 당도하는 궁벽한 산골 마을에서였다. 그 청탁서 한 귀퉁이에는, 짧았으나 살가운 이문구 씨의 덧붙임 글이 잉크를 찍어 쓰는 철필로 쓰여 있었다.

보름 동안 걸려 쓴 원고는 우체국을 믿지 못해 손에 들고 상경했다. 무교동 뒤쪽 이면 도로에 위치한 잡지사 사무실로 초면인 그를 찾아갔다. 엄동설한인데도 불 꺼진 난로가 놓여 있는 썰렁한 사무실에 그는 혼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마감 시간이 임박했는지, 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몇몇 문단 선후배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서 그들과도 내용이 서로 다른 대화를 나누면서 시종 원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 몸으로 몇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그의 초능력에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나중에 알게 되었으나 그 와중에 그가 쓴 원고는 우리나라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명작 ‘관촌수필’이었다.

서울의 무교동 뒷골목에 어둠이 내리고 불이 켜지기 시작하자, 그는 나를 비롯해 찾아온 문우들을 이끌고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근처의 단골 맥줏집을 찾았다. 술값은 모두 자기가 치렀다. 그때부터 서울만 가면 나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죽치고 앉아 무교동 거리에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스승인 김동리 선생과는 끝까지 이념을 달리했고, 반체제 인사들이 벌이는 데모와 농성에 빠짐없이 참여했었으나, 동리 선생을 스승으로 받들기를 소홀히 하지 않아 누가 보수 우익인 선생을 폄하하거나 헐뜯을라치면 눈에 불을 켜고 반격에 나서는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이 참으로 신선했다.

김치수 씨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는 그의 존재를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여성으로부터 들었다. 그녀가 당시 재원들이 선망하던 불문과에 합격하고 난 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떠나던 날이었다. 교정에는 신입생들이 탑승할 수십 대의 버스가 정렬해 있었다. 그 버스 중에는 물론 불문과 신입생들이 탑승할 버스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문과 학생들을 안내하기 위해 배치된 사람은 다른 학과와는 달리 하필이면, 뻐드렁니에 피부색도 시커먼 점퍼 차림의 학교 수위 아저씨였다. 그것이 창피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수위는 버스가 출발하자, 교수님들의 지정좌석인 운전석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버스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고 나서도 자리에서 비켜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현장에 도착해서 교수 소개가 시작되었는데, 그 수위 아저씨가 불문과 교수란다. 가슴속에 꿈도 많았고, 감수성이 넘쳐 났던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학과 4년을 졸업할 동안 그녀는 김치수 교수의 수업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그와 마주치게 되기를 내심 기대했었고. 그 뒤 정말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 후 우리는 마주치기만 하면 어울려 마시기 시작했다.

이문구와 김치수…. 고향도 서로 다른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어떤 낯선 사람이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그 무리한 요구들을 해결해 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도와 달라는 말은 열명길 오를 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다.

두 번째는 두 사람 모두 군사독재정권의 피해자였다. 이문구 씨는 군사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보형사의 끈질긴 미행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그와 단짝이 돼 상가에도 같이 붙어 다니고 결혼식장에도 데리고 다녔다. 나중에는 그 형사가 이문구 씨의 생일날 술병을 사 들고 집으로 방문해 둘이서 대작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억에 남는 반전이었다. 김치수 씨 역시 군사정권에서 한때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낭인 생활로 허송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런데도 그 수난과 수모들을 단 한 번도 겉으로 드러내어 우는소리를 하거나 이를 앙다물고 보복과 응징을 다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닥친 질곡과 수난을 속으로 삭인 대덕의 소유자들이었다.

셋째, 두 사람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일을 예사로 알았다. 그래서 닳고 닳은 세상 물정과 인심에 어두웠고 그런 일들에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곧이곧대로 살았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잘 속아 넘어갔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아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던 바보들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누구도 폄하하거나 허물 잡거나 고자질하지 않았다. 해 지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내 삶의 어느 한 모퉁이가 몽땅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밑바닥에는 이 두 사람을 알게 됐고, 나 역시 그 두 사람과 함께 마시러 쏘다녔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얼마 전에 이제는 그만했으면 됐다 싶어 술 마시기를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이승을 함께 했더라면 나는 술 끓기를 결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가슴이 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