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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4. 22. 11:04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정은광 교무 dmsehf4438@hanmail.net

중앙선데이 | 제371호 | 20140420 입력

 

 

인디언들의 4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라 했다. 그러나 봄은 동백도, 매화도, 벚꽃도 머리맡에 머무르는 계절이다. 누군가 그랬다. 동백은 가슴으로 피었다 떨어지기에 ‘퉁’ 하고, 매화는 긴 겨울의 이야기를 전해주며, 그 시간의 절반만큼 벚꽃이 따라 핀다고. 목련도 아쉬운 만큼 담벼락에 ‘척’ 걸치며 떨어진다.

 

배꽃은 어떠한가, 언제 피었는가 싶어 길가의 꽃 손님에게 물어보면 “글쎄요…”라고 할 정도로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피었다 진다. 고려 원감국사는 “바람에 배꽃이 날리니 뜰에 가득 흰 눈이 쌓이네(風打梨花滿庭雪)”라는 선시를 남겼다.

 

“꽃이 진다고 너를 잊겠느냐”는 젊은이들의 말이 내 귀에도 들리지만 꽃은 어찌 보면 피는 맛보다 지는 맛이 더 화려하다. 얼마 전 일본 오사카성에서 본 벚꽃도 그 화려함 못지않게 성을 둘러싼 해자 물결에 떨어지는 꽃잎들이 무상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까운 지인이 한동안 소식이 없다. 궁금해 안부를 물으니 그때서야 이렇게 말했다. “장인이 얼마 전 치매와 노환으로 돌아가셨어. 가족들끼리 상의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친척들끼리 조용히 의례를 치르다 보니 그리 되었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이 든든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조용히, 그리고 성심성의껏 가족과 주변을 챙겨주는 사람을 보면 닮아가고 싶어진다.

 

벚꽃놀이에, 주말에, 또 청명에 다들 분분하니 조촐한 의례로 대사를 치렀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 도리 하기 힘들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사는 모습이 정리되고 싱싱한 사람이 있다. 내 삶에서 본받을 만한 사람은 꽃보다 더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살면서 ‘출가(出家)’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종교인들을 주변에서 종종 본다. ‘출가’의 본뜻을 헤아려보면 ‘모질다’는 뜻이다. 인연의 끈과 자신의 공부길에 인생 전부를 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출가자’다. 명예와 분수를 모르는 아집, 치기에 가까운 집착 등 어찌 보면 ‘나만 모를 뿐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들이 출가한 사람들이 진정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차츰 나를 간섭할 스승과 어른이 돌아가시고 곁에 없다는 깨달음에 나의 성찰은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신독(愼獨)은 젊은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나이 50이 가까울수록 스스로 신독의 생활을 체득해야 할 거다. 늦은 저녁 밖을 보니 봄꽃 바람이 적막하고 찬 기운이 달빛에 누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어떤 이의 영롱한 글에 어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삶이 담담해지려면 세상의 시비에 대한 내 판단 기준의 번뇌표가 지워져야 한다. 번뇌는 내가 가진 그릇의 물만큼 출렁거릴 뿐이다. 시인이자 예언자인 칼릴 지브란은 이런 말을 했다. “온유한 사람은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봄바람도 할미꽃도 그늘에 숨는 오후, 우린 꽃처럼 피고 물처럼 흘러 산비탈 종달새가 지나간 시간을 함께 건너고 있다.

 

최근 본 책 『잡초이야기』엔 이런 내용이 있다. 잡초의 삶도 사람과 다를 바 없어 큰 야망을 품은 잡초가 있는가 하면 작고 소박한 크기로 살기를 꿈꾸는 잡초가 있다는 거다. 밑바닥을 기면서도 행복한 잡초도 있고, 경쟁이 싫어 사람의 발에 밟히는 고생을 참아가며 홀로 사는 잡초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제비꽃·둑새풀·쇠뜨기·냉이·개망초 등의 삶은 저만치 세상 밖에 서 있는 이름 없는 선승(禪僧) 같은 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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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광 원광대학교 미술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