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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볼 때 주해 먼저 보지 마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4. 5. 20:39

 

책 볼 때 주해 먼저 보지 마라 … 생각을 못해 얻는 게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14.04.05 01:09 / 수정 2014.04.05 01:25

내 마음의 명문장 (12) 한학자 하영휘 성균관대 교수
남의 설명에 기대면 새 의미 못 찾아
외운들 남의 것, 생각해야 내 것 돼
암기 위주 얕은 학문 말라는 가르침

 

하영휘 교수는 2007년 서울 가회동에 집을 지으며 널찍한 곁방을 하나 들여 가회고문서연구소를 열었다. “정치사 중심 역사학계에서 홀대 받아온 고문서의 복원을 위해서”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무릇 독서를 할 때 주해(註解)를 먼저 봐서는 안 된다. 경서(經書)의 문장을 반복해 읽고 상세히 음미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얻은 후에 다시 주해를 참고하며 교정해야 한다. 그래야 경서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 다른 사람의 설에 가려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지 않고 주해를 먼저 보면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설에 방해를 받아 나 자신은 끝내 새로운 의미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 유성룡 ‘독서법’에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이 쓴 ‘독서법’이라는 글이다. 짧은 글이지만 주장하는 바가 간결하고 명료하다. 경서를 읽을 때 제3자의 설명을 개입시키지 말고 경서의 문장과 일대일로 직접 대면하라는 말이다. ‘새로운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의미란 무엇일까. 문장을 처음 대하며 받는 신선한 충격이나 가슴 뿌듯한 감동일 수도 있고, 떠오르는 엉뚱한 상상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문장과 직접 만나 얻는 나만의 수확이고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기에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남의 설(說)을 먼저 봐 버려 남의 생각이 내 생각의 한쪽을 차지하면 내 생각이 방해를 받아 새로운 의미는 영원히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깝지 아니한가.

 서애의 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시 주해를 참고하며 교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혼자 생각해 얻은 새로운 의미가 과연 타당한가. 편협과 주관으로 흐르지는 않았는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때 남의 설을 참고해 나의 설을 교정한다. 말하자면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이 글과 짝이 되는 ‘학문은 생각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글에서 서애는 『맹자』의 “마음의 소임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말이다. 이런 깊은 생각의 온축이 그에게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명재상의 역량을 주었을 것이다.

 ‘지곡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며 나는 이 ‘독서법’으로 경서를 읽어 그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리라고 다짐했다.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는 데다 매주 세 번 있는 배송(背誦)의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책을 보지 않고 선생님 앞에서 경문(經文)을 외워 바치는 것을 배송이라고 하는데, 배송을 통과하지 못하면 바로 보따리를 싸서 나가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어』로 말하자면 한 주에 세 번 배송을 했는데 월요일에 ‘학이(學而)’편을 배송하면 수요일에는 ‘위정(爲政)’편을, 금요일엔 ‘팔일(八佾)’편을 배송하는 방식이었다. 자연히 배송을 통과하기 위한 암기 위주의 공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반복하여 읽고 상세히 음미하며’ 경서를 읽겠다는 나의 결심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생각하지 않고 외우는 공부에 대해 ‘학문은 생각을 위주로 해야 한다’에서 서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현의 학문은 전적으로 생각을 위주로 한다. 생각하지 않는 학문은 구이지학(口耳之學)이니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다섯 수레의 책을 외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의미를 물을 때 전혀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이지학’은 『순자(荀子)』의 ‘권학(勸學)’ 편에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듣고 그것을 그대로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들은 대로 외워서 말하는 얕은 학문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 없이 건성으로 하는 독서를 가리켜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라는 표현도 있다. ‘글은 글, 나는 나’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나는 이런 식으로 한문 공부를 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며 한문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단문고’에 취직하고 나서부터였다. 거기에는 조선시대의 많은 고서와 고문서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송의 부담도,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서애의 ‘독서법’을 어느 정도 실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나는 느긋하게 자료 정리에 착수했다.

 먼저 종이·먹·서체·서식 등을 살피고, 이어서 한 자 한 자 석문(釋文)을 하며 내용을 파악해 갔다. 해결이 되지 않는 부분은 생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머리에 남아 있다가 저절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맹자』에 이른 대로 ‘옛사람의 시를 읊고 그 글을 읽으며’ 생각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얼마 전 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아들과 손자에게 쓴 편지를 모은 『가서(家書)』를 다 읽었다. 삼 년에 걸쳐 한 주에 편지 한 통씩 번역은 보지 않고 사진판으로만 읽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낱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퇴계의 글씨도 내 뇌리에 사진처럼 찍혔다.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쓴 시의 아름다운 글씨, 손자가 과거에 낙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쓴 맥이 풀린 글씨, 손자를 타이르며 쓴 준엄한 글씨를 기억한다. 이것이 모두 묵히고 곱씹으며 생각한 끝에 얻은 즐거움이다.

생각이 학문과 독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만사가 생각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 등산을 하며, 여행을 하며,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며, 고서화를 감상하며, 봄날에 돋는 새싹을 보며, 정성스런 음식을 먹으며, 잘 빚은 막걸리를 마시며 나는 생각의 유희에 잠긴다. 남의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혼자서 생각으로 노는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가지고 생각으로 놀아 보라. 행복이 거기에 있다. 설사 그것이 인생의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말이다. 단 거기에 욕망을 섞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집착이 되고 고민이 된다.

초서 막히면 다들 찾는다는 …

하영휘씨는 한국학계에서 손꼽는 초서(草書) 전문가다. 한문에 눈이 밝은 이들도 옛 글을 읽다가 막히면 그를 찾는다. 1983년부터 태동고전연구소에서 3년간 한문을 연수했다. 고서적 컬렉션으로 이름난 ‘아단문고’에서 17년간 고서와 고문서를 연구했다. 2007년 가회고문서연구소를 열고 조선시대의 간찰·일기·고문서 등을 꼼꼼하게 뜯어보는 작업을 동학들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바둑도 수준급이다.
 1954년 경남 의령 출생. 서강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로 일한다. 저서 『양반의 사생활』 『옛 편지 낱말사전』, 번역서 『근묵(槿墨)』 『한마고전총서』 2~14 등.

한학자 하영휘 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