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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의 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6. 01:31

플라스틱의 꿈

                                     유대영


                             

 카키색 군복을 입은 병사의 왼쪽 눈엔 송곳 구멍이 뚫려 있다.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다. 허리를 구부린 그는 진열장 구석에 놓인 나무판 위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쓰러진 병사의 새끼손톱만한 얼굴은 눈에서 흘러내린 핏물로 온통 뻘겋다. 움푹 팬 눈매와 두꺼운 입술. 흙바람에 오랫동안 시달린 듯 거칫한 뺨. 채 감기지 않은 한쪽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군복 상의까지 뒤덮은 붉은색이 선연하다. 병사의 오른쪽 목덜미에는 검은 베레모를 쓴 군인이 총부리를 대고 있다. 기관총이 장착된 지프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반쯤 무너져 내린 황색 건물 안에서 두 명의 카키색 병사들이 깍지 낀 양손을 머리에 얹고 걸어 나온다. 저항의 의지를 찾아볼 수 없는 지친 얼굴들. 육중한 탱크가 건물 앞에 버티고 있고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린 주위를 살피는 검은 베레모의 두 눈이 형광등 불빛에 번들거린다. 가로 오십, 세로 삼십 센티미터 크기의 나무판 위엔 축소되고 가공된 살기로 가득하다.


 허리를 편 그는 오른손에 쥔 걸레로 진열장 유리를 다시 훔쳐나간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나무판을 들여다본 지가 열흘이 넘었다. 그러나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톱밥과 모형 벽돌들로 처리된 바닥에 무언가 어른거리고 있다. 하루는 희멀건 여자의 얼굴이기도 했고 하루는 부옇게 떠오르는 자잘한 물방울들 같기도 했다. 진열장 안에 엇비슷한 내용을 담은 나무판들이 여섯 개 놓여 있지만 유독 여자의 작품이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든다. 하긴, 처음 만들어본 것치곤 꽤 솜씨가 배어 있긴 하다. 지프의 반쯤 부서진 전조등과 운전석 창에 살짝 걸쳐진 철모와 총신이 옆으로 휘어진 기관총…. 초보자에겐 백여 개의 부품들을 제대로 맞추고 접착하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밤색과 녹색 무늬들이 군복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고 건물 벽을 적당히 낡아 보이게 하는 웨더링 기법도 뛰어나다. 하지만 조금 자세히 살피면 군데군데 접착 부분에 미세한 틈이 보인다. 마감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표면이 매끄럽지 못한 곳도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을 가게 안으로 돌리게 하는 이유가 무언지 그는 아직 모른다. 병사 옆에 나뒹군 철모 위로 또다시 희멀건 얼굴이 떠오른다. 늘 초점 없이 열려 있던 커다란 동공. 소원대로 건물을 빠져나간 여자는 지금 낯선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을 낱낱이 부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만의 조용하고 끔찍한 전쟁을 치르면서.


 가게 문을 열고 그는 구석으로 걸어간다. 책상 옆에 어제 들어온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다. 여자의 나무판 위에 놓인 것과 같은 M60A1 탱크 스무 개, 이차 대전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 Bf109E 열 개, 헤르니 천사 인형 다섯 개, B-52 전폭기 열 개…. 개수를 확인한 그는 상자를 하나씩 들어 진열대에 올린다. 얼마 전부터 탱크나 전투기 모형을 찾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 덕분에 개업 반년 만에 적자를 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씁쓸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쟁 모형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지만 여자도 있다. 가끔 새벽에 잠을 깨우는 전화들, 브라인딩이니 웨더링이니 집요하게 캐묻는 목소리는 중독된 음성들이다. 진물이 말라붙어버린 플라스틱 음성. 거미줄 같은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술병을 쥐는 사람이 있고 체육복 차림으로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 잘 때 방에 틀어박혀 칼과 접착제를 드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진열대를 정리하고 돌아선 그는 왼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툭툭 친다. 전화기를 쳐다본다. 수화기를 붙든다. 그러나 선뜻 들지 못한다. 그는 손을 놓고 다시 책상을 툭툭 친다. 폐쇄 병동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으니 면회를 거부하든 오늘 당장 퇴원을 하든 여자의 마음이다. 망설이던 그는 진열대로 걸어간다. 맨 위에 놓인 헤르니 인형 상자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린다. 쌀쌀맞은 간호사에게 매일처럼 퇴짜 맞는 것도 지겨운 일이다. 아니, 차라리 속 편하다. 두려운 건 여자가 퇴원해버렸다는 말을 듣는 일이다.


 휴대용 가스 버너 위에 냄비를 올린다. 물을 붓고 중성 세제를 세 방울 떨어뜨린다. 버너 스위치를 올린 다음 상자의 포장을 벗겨낸다. 하얀 날개를 접은 천사가 덮개 위에 그려져 있다. 도시의 천사. 인기가 좋아 완제품도 심심찮게 팔려나간다. 근처 은행 지점장이 특별히 부탁한 거다. 퇴근길에 가끔 들르는 지점장은 캐릭터 인형을 즐겨 찾는다. 간혹 미국에 있는 손자 얘기를 곁들이기도 하지만 열 살이 넘은 사내아이에게 한 달에 두세 번 여자 인형을 보내진 않을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작고 단순한 꿈이 필요한 모양이다. 서랍 속에 넣어두고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위안.


 상자를 열어 뒤집자 미황색 팔 다리 날개가 책상 위로 쏟아진다. 덜 마른 오징어 색깔이 감도는 부품들은 플라스틱의 일종인 소프트 비닐이다. 불에 그슬린 오징어처럼 부품들마다 약간씩 휘어 있다.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번 구워진 오징어는 펴지지 않지만 소프트 비닐은 펴진다. 뒤틀린 생활도 가끔은 푹 삶아버리고 싶다. 냄비 위로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젓가락으로 날개를 살짝 건드려본다. 어느새 말랑말랑하다. 하나씩 꺼내 찬물이 든 대야에 빠뜨린다. 원형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그대로 굳게 될 것이다. 물속에 잠긴 인형의 얇은 입술에서 보글보글 공기방울이 피어오른다. 왜 미래는 기억할 수 없는 거죠?


 임원경. 백 육십 칠 센티미터의 키에 유난히 발이 가늘고 긴 여자. 하루에 열 시간을 비릿한 물 냄새를 맡으며 자동 인형처럼 서 있어야 했고 일 년이 넘게 숙면을 취한 적이 없으며 오래전부터 오른쪽 눈에 비문증(飛蚊症)을 앓고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나 맑은 하늘을 쳐다볼 때 시야 속에 희미한 실 먼지 같은 것들이 보인다고 했다. 눈알을 굴릴 때마다 따라다니는 게 꼭 물속에서 해마(海馬)들이 노는 모양이라고…. 그의 가게가 입주한 쇼핑몰 한쪽에 최신 시설의 수족관이 들어서 있다.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던 여자는 짬짬이 수족관 안을 도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두꺼운 아크릴 벽 너머로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상어가 지나가는 소리, 붉은바다거북이 숨을 토해 내는 소리, 벨로 피시가 기다란 주둥이로 새우를 잡아먹는 소리까지 들려온다고 했다.



 촉수처럼 예민한 여자의 귀는 그의 가게에 처음 들렀을 때부터 활짝 열려 있었다. 목이 마르다고? 들어서자마자 진열장에 놓인 헤르니 천사 인형 앞에 붙박여 있던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TV를 보고 있던 그는 별 뜻 없이 흘렸다. 며칠 동안 지루한 화면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탱크가 달려가고 희읍스름한 하늘을 헬기들이 날았다. 모래바람이 쓰는 낯선 거리의 사람들과 마이크를 들고 달려가는 여기자의 출렁거리는 머리칼과 무너진 집 앞에 쭈그려 앉은 소녀의 낡은 반바지…. 걱정 마. 구름이 몰려오고 있으니까. 그제야 그는 고개를 돌렸다. 속삭이듯 여자는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귀밑까지 쳐 올린 짧은 머리칼, 서늘한 눈빛을 깊게 만드는 높고 긴 콧대, 목소리만큼이나 가느다란 손목…. 반들반들한 진열장 유리 같은 뺨에는 핏기가 흐르지 않았다. 자신을 빼닮은 인형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여자는 정작 나설 땐 육군 보병 세트와 붓과 도료 그리고 모형용 칼을 챙겼다. 창(槍) 같군요, 아트 나이프…. 기다랗고 둥근 손잡이를 쓰다듬던 그녀는 칼끝을 검지에 대고 살짝 그어보기까지 했다. 여자가 사라지고 나서 한참 뒤에야 그는 접착제로 붙여진 인형의 목과 몸통 사이에 미세한 틈이 나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이상해.”

문을 밀고 김이 들어선다.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있다.

“뭐가.”

 

 대야에서 건진 부품들을 마른 천으로 닦아내던 그는 종이컵을 받아든다. 아침부터 취한 김의 눈엔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핏발이 서 있다. 블랙 콘드라의 눈과 닮았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불칼을 쥐고 서 있는 시미온 제국의 전사. 화재 경보기의 붉은 등 같은 눈에선 늘 희미한 경보음이 흘러나오는 것 같다.

“우… 움직이는 거 같지 않아?”

 진열장을 쳐다보며 김은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들이마신다.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엔 단단하게 접착된 모형들뿐이다. 그는 고개를 돌려 김의 표정을 살핀다. 그가 만든 인형이나 나무판을 보고 저런 기색을 내비친 적은 없다. 할 말이 남은 듯 우물우물하던 김이 잔을 내려놓고 나선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김의 부인이 가구점으로 들어간다. 여덟 살이나 아래인 부인에게 김은 늘 꼼짝 못한다. 주위 사람들에게조차 제대로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눈매에서 풍기는 인상과는 딴판이다. 하긴, 언젠가 바지주머니 속에 든 끌을 본 적은 있다. 손아귀에 들어갈 만큼 작은 삼각끌이었다. 피… 필요할 데가 많아. 그렇게 넣고 다니면 찔리지 않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김은 들고 있던 맥주병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가구 수리할 때 쓰는 끌의 다양한 용도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늘어놓았다. 가게를 나온 김이 상자들을 카트에 싣는다. 삼 년 전 교통사고로 남자의 능력을 상실해버린 김. 힐끗 그를 쳐다본 뒤 카트를 밀고 간다. 진열장 속에만 살아 있는 블랙 콘드라의 모습이 유리 밖으로 사라진다. 책상 모서리를 짚은 채 그는 텅 빈 통로를 바라본다. 연한 자줏빛 조명으로 밝혀진 통로 양옆으로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다. C25 구역. 삼만 평이 조금 넘는 거대한 지하 쇼핑몰의 한쪽 구석 길도 잠시 뒤면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 매끈한 은백색의 청소 로봇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걸 쳐다보던 그는 돌아선다. 가끔은 가게에 들르는 사람들조차 잘 만들어진 모형들로 보인다. 자잘한 부품들로 조립된, 언제든 산산조각 날 준비가 되어 있는 인형들. 35분의 1로 오그라들어 탱크와 건물들과 함께 좁은 나무판 위를 꾸며가는 플라스틱 영혼들.


 책상 서랍을 뒤져 아트 나이프를 꺼낸다. 창(槍) 같군요, 아트 나이프…. 기다란 손잡이 끝에 달린 칼날 위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오른다. 조명을 켜고 물기가 마른 인형의 얼굴을 작업판 위로 올린다. 이마 위쪽에 필요 없는 부분이 튀어나와 있다. 머리를 빈틈없이 붙이려면 깨끗이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칼끝을 대자마자 움찔거리고 만다. 손을 놓고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전화기를 쳐다보다 결국 다시 서랍을 연다. 허연 붕대를 감아 맨 얼굴이 명함의 흰 여백에 떠오른다. 수화기를 들고 숫자판을 꾹꾹 누른다. 신호음이 길게 느껴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병원입니다. 덜컥, 내려놓고 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바닥을 서성거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자에게 물건을 팔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들렀을 때 칼끝을 쳐다보던 눈빛을 알아봤어야 했다. 하필 그녀는 아트 나이프를 골랐을까. 자신의 얼굴을 끔찍하게 혐오하는 여자에게 꼭 모형용 칼만 눈에 보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부엌칼도 있고 과도도 있고 하다못해 김의 바지주머니에 든 끌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의 가게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반드시 아트 나이프를 구입했을 것이다. 망설이던 그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깨끗이 다듬어진 부품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은 뒤 석고 가루를 고무그릇에 푼다. 물을 붓고 막대로 천천히 휘젓는다. 인형의 몸통을 거꾸로 들고 석고 용액을 조심스레 흘려 넣는다. 구석구석 채워지도록 몸통을 책상에 가볍게 두드린 뒤 형광등에 비추어 본다. 모서리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공기 덩어리다. 석고가 굳기 전에 밖으로 빼내야 한다. 몸속 어딘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검은 구멍들. 일회용 주사기를 든 그는 바늘 끝을 인형의 몸통 속으로 푹 찔러 넣는다.

“두 달 동안 월경이 없었어요.”


 끌려온 사람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삐쭉한 눈길로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보름여 만에 그의 가게에 들른 날이었다. 탱크 상자와 희석제 등을 챙겨 든 그녀는 진열장에 놓인 나무판 하나를 가리켰다. 저렇게 만들려면 얼마나 걸리죠?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통 한 달이면 완성할 수 있다, 접합선 수정이나 색칠 기법 등을 제대로 익히고 대회에 응모할 실력까지 갖추려면 반년은 잡아야 한다는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그는 여자의 얼굴과 헤르니 인형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근데, 하필 왜 전쟁 모형입니까.

“아침 여섯시가 여자들 월경이 시작되는 시간이래요.”

“….”

“남자들 성욕이 왕성한 때는 아침 여덟시. 정오엔 혈중 헤모글로빈 농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고 오후 다섯 시부터 미각이 예민해져 입맛이 돌기 시작하고…. 저녁 일곱 시. 정신적 신체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시간. 길 가는 사람을 이유 없이 찌를 수도 있다, 이 말이죠.”


 생체 시계 역할을 하는 기관이 뇌 속에 있어 사람의 활동을 스물 네 시간 주기로 조절해 준다. 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는 따위의 일들. 그러니 사람은 본래 시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긴 지구도 하루에 한 바퀴씩만 돌지…. 바로 옆에 놓인 금연 팻말에 아랑곳 않고 담배 연기를 쉴 새 없이 뿜어대던 여자가 뜬금없이 수족관 일을 곧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은 지금 고장난 시계 같다고. 며칠 내내 정신없이 잠이 쏟아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날밤을 새운다고도 했다. 각성제와 수면제를 양쪽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다녀도 별 효과를 못 본 모양이었다. 이젠 눈을 뜬 채로도 잘 수 있으며 손님이 들어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했다.



“욕구들이 사라졌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누굴 만나고…. 어떤 맛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

“… 인형이 되어가는 거죠.”


 월경 불순이니 고장난 시계니 전쟁 모형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형은 또….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여자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그는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광장이었다. 하루에 이십만 명이 드나드는 지하 쇼핑몰의 한복판. 수풀길, 환상의 섬, 물속 미로…. 붉고 푸르고 노란 빛들이 들어찬 여섯 개의 통로들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가고 밀려나오고 있었다. 열 일곱 개의 상영관들을 거느린 극장과 지하 오층까지 파고 들어간 수족관과 나이트클럽과 미아보호소와 세 군데의 파출소가 있는 곳. 숙박 시설과 흡연 구역만 빼곤 모두 들어찬 삼만 평의 공간을 그는 여태 한 번도 돌아보지 못했다.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안내 지도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고 쇼핑백을 든 사람들의 그러저러한 표정들을 관찰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가로 오십, 세로 삼십 센티미터의 나무판 위에 좀더 실감나는 모습들이 있었다.


 원형의 천장에 떠오르는 별들을 지켜보던 그의 시선이 중앙에 놓인 분수대 쪽으로 옮아갔다. 사나운 청년들의 발길질에 양복을 걸친 한 남자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호루라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벤치에 앉아 깔깔거리는 여학생들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바쁜 젊은 여자와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늘 있는 일이었다. 순간, 여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벽에 걸린 대형 TV 화면에 뉴스가 흘러나왔다. 시작부터 ‘공습 임박’이라는 글자들이 화면을 메웠다. 구경꾼들이 두 패로 갈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비극을 두려워하면서도 늘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는 거죠?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 좀 더 크고 비참한 일들…. 고통을 위로해주는 사건들.”

“….”

“죽고 죽이는 일보다 비열한 욕망들.”


 푸르스름하게 굳어가는 낯빛을 힐끔거리던 그는 무심코 시계를 쳐다보았다. 저녁 일곱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가 조금 전부터 진열장 앞을 서성거린다. 탱크, 지프, 나무판, 도료 세트, 희석제, 에어 브러시…. 계산기를 들고 그는 사내가 고른 물건들을 하나씩 살핀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여자의 나무판을 가리키며 그대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는 병사나 탱크를 하나씩 만들어보고 값비싼 도구는 나중에 필요할 때 구입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일차 세계 대전을 치르던 영국은 전차를 처음 만들어놓고는 급수차라고 했답니다. 사내의 눈 밑에 난 거뭇한 자국을 힐끔거리며 그도 모르게 입을 연다. 그래서 이름도 탱크(Tank)죠, 물탱크 말입니다. 의문스럽다는 듯 사내가 다가선다. 전쟁이라는 게 뭐 속고 속이는 짓거리 아니겠습니까. 마크Ⅰ이라는 전차는 시속이 6㎞에 불과했지만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겨 적군이 파놓은 참호쯤은 우습게 넘고 그랬다죠, 아마…. 근데 손님, 이건 꼭 안 사셔도 됩니다. 발끈한 표정으로 사내는 신용 카드 한 장을 계산대에 내던진다.


 엉겁결에 떠맡은 듯 종이 가방 두 개를 양손에 움켜쥔 사내의 어깨가 모퉁이로 사라진다. 오늘 밤부터 사내는 책상 위에 재료들을 잔뜩 펼쳐놓고 끙끙대기 시작할 것이다. 부품이 삼백 개가 넘는 탱크의 복잡한 조립도에 질려버릴 것이고 이내 포기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모든 재료들을 챙기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며칠이 지나 환불해 달라며 들고 오는 고약한 작자들도 있다. 애들이라도 없으면 흉물처럼 방치되다가 결국 쓰레기 봉투에 묻혀 버려질 플라스틱 팔다리들. 그리고 좀 더 짜릿한 쾌락을 좇는 사내의 발걸음은 얼마 뒤 서바이벌 게임장이나 실탄 사격장으로 향할 것이다.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서둘러 가게로 들어선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끊어진다. 우두커니 숫자판을 쳐다본다. 다시 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든다. 찰카닥. 빠르게 이어지는 신호음을 내버려둔 채 숫자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해마(海馬). 그녀 동공 속을 오래전부터 떠돌고 있다는 놈들의 가느다란 꼬리들이 어른거린다. 말들이 바다 속에 들어와버렸으니, 제대로 숨이나 쉬겠어요?


 편의점, 패밀리 레스토랑, 은행, 패스트푸드점…. 지하 도시의 얼굴 같은 간판들이 스친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젊은 여자가 다급히 다가선다. 멈춰 선 그는 주머니에서 약도를 꺼내 든다. B72-9. 한참 만에 찾은 미아보호소의 위치를 알려준다. 빠르게 멀어지는 여자의 어깨 너머로 멀리 수족관 불빛이 보인다. 그는 서둘러 화장실 입구로 들어선다.


 삐걱거리는 하늘색 문에 여자의 알몸이 조잡하게 그려져 있다. 문을 닫고 그는 담배를 문다. 욕설들과 함께 암호처럼 휘갈겨진 글귀들을 훑는다. 변기에 앉아 담배 대신 볼펜을 꺼내드는 사내들…. 왜 그럴까요? 임신도 안 한 처녀가 월경도 빼먹고. 혹시 나도 모르게 속에 뭐가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침에 건물 입구를 들어서면 구역질부터 나요. 쓰레기 봉투를 채우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두 눈이 뻘게지도록 잠이 안 올 때마다 생각하죠. 사람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잠을 자거나 아직 술집에 있거나 여관에서 뒹굴거나 교회에 가려고 성경을 챙기겠죠. 살인 사건이 9시간 30분마다 일어난다는 거 아세요? 강간은 1시간 30분, 단순폭력은 1분 35초…. 주인집 할아버진 종일 마루 끝에 앉아 땅만 쳐다보고 있어요. 세상에 고장난 시계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조금 늦게 혹은 빠르게 가는 시계들. 혹은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 전투기 몇 대 뜬다고 맞춰지겠어요?


 여기저기 긁힌 자국들로 성한 데가 없는 여자의 알몸을 쳐다보며 그는 일어선다. 당신 뭐야.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싸기나 하지 왜 밟고 지랄이야. 죄… 죄송합니다. 김의 목소리다. 똑바로 보고 다녀. 제기랄. 구둣발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가느다란 물줄기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 황급히 뛰쳐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뒤에야 그는 문을 밀고 나선다. 맞은편 벽에 붙은 커다란 거울을 예리한 빗금이 갈라놓고 있다. 천천히 다가선 그는 오른손 검지를 유리에 대고 빗금을 따라 내리긋는다. 머나먼 시미온 제국의 전사. 블랙 콘드라의 바지 주머니 속에 든 불칼은 어쨌든 살아 있다. 서늘해진 목덜미를 매만지며 그는 돌아선다.



여자의 몸속에는 모두 서른 두 개의 칼자국이 스며 있었다. 정교하게 봉합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흔적들은 오래전부터 그녀 속을 잘게 가르고 있었다.

“물방울 같은 얼굴이었죠. 눈앞에 잠깐 맺혔다가 터져버리곤 했으니까.”


 빈 맥주 캔들이 탁자 위를 구를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여자는 갑자기 과장된 손짓을 섞어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한번 말문이 열린 그녀는 미처 그가 끼어들 틈도 없이 탐욕스러울 정도로 지껄였으며 자주 커다랗게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어지러운 말들로 뱉어낸 말들을 지워내려는 듯.


 삼 년 전이었다고 했다. 백화점 의류 코너에서 일하던 여자는 어느 날 매장 구석의 전신 거울에 스친 얼굴을 목격했다고 했다. 네 살 때 버려진 그녀에게 기억나는 얼굴 따윈 없었다. 매장 입구의 마네킹과 그보다 예쁜 손님들과 수백만 원씩 하는 옷들을 너무 많이 쳐다본 탓일 수도 있었다. 돌아서려던 여자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약간 갸름해 보이는 양쪽 볼이나 쌍꺼풀 없는 눈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왼쪽 콧방울이 오른쪽보다 약간 처져 보였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얼굴이나 몸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왜 그랬을까. 순간 그녀 얼굴 위로 또다시 낯선 표정이 겹쳐졌다. 현기증이 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자취방에 혼자 들어가는 게 싫어졌고 친구들을 만나 영화를 보거나 카페 구석에 죽치는 일도 시답지 않아졌다. 출퇴근하고 적금을 붓고 대학을 준비하는 일들. 삼 년 전 뛰쳐나온 양부모의 생선 가게에서 갈치 배나 가르던 일과 다를 게 없었다고 했다. 거울 속 두 얼굴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고…. 며칠 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얼마 전 여자 손님과 함께 온 남자가 슬쩍 찔러준 명함. 남자의 새하얀 셔츠 깃에 스며 있던 상큼한 향기, 싫지 않았다고 했다.


 “… 나는 눈썹을 심고 쌍꺼풀을 만들고 광대뼈를 깎아냈어요. 콧방울을 도톰하게 만드는 건 물론이었죠. 이마를 넓히고 뱃살에 지방을 빼고 예쁘다고 사람들이 말하던 보조개는 메워버렸어요. 메스나 마취제 따위 두려워하지 않았죠. 그 얼굴에 가까이 가는 게 중요했으니까…. 살 거 같았죠.”


 그녀는 한군데의 병원만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열 한 번째 수술을 받겠다고 하자 의사 쪽에서 거부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 정신과를 찾는 대신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월급으로는 수술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밤이 있었다고 했다. 얼굴이 차츰 변하는 동안 받은 명함들도 늘어나 있었다. 자취방 앉은뱅이책상 모서리에 쌓아두고 여자는 하루에 한 장씩 찢어나갔다. 남자들은 잘못이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그녀도 별달리 잘못 살지는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세상은 쓰고 버릴수록 솟아나는 욕망들로 가득하게 마련이니까.



광택제와 걸레를 양손에 들고 김은 흔들의자를 닦고 있다. 이마에 맺힌 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고개를 돌린다. 왼손을 살짝 들어 보이고 그는 가게로 들어선다. 석고가 단단하게 굳은 인형 얼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살핀다. 책상 서랍을 열어 순간접착제를 꺼낸다. 유리판 위에 접착제를 조금 떨어뜨린다. 인형의 얼굴과 몸통을 맞대고 각도를 가늠한 뒤 핀에 접착제를 묻혀 틈새에 흘려 넣는다. 몸통과 다리, 손과 팔, 등과 날개…. 천사는 서서히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오른손이 끈적거린다.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본다. 전상자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던 야전 병동. 상처 입은 병사들의 팔다리를 임시로 붙이려 만들어졌다던 순간접착제. 지독한 전쟁의 흔적들…. 엄지를 살짝 밀면서 떼어 낸다. 살점이 뜯겨나간 자리에 낯익은 눈빛이 고여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새벽의 어둑한 자취방에서 그는 오래된 사진을 보고 말았다. 솜털처럼 가벼운 소녀의 미소를 들여다보며 비로소 술이 깨고 있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돌아누우려던 여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앉은뱅이책상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낡은 종이 상자에 든 끔찍하게 일그러진 여자 인형. 남은 말들을 이어가려는 듯 그녀는 인형을 끌어안고 돌아누운 채 다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사나흘 어디 갇혀 있던 사람처럼 어느새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휴일 아침, 여관을 나온 여자는 남자와 함께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봄날은 상쾌했고 잘 나가는 증권사 직원인 남자는 친절했다. 매끈한 사이드 미러 구석에 건물이 들어온 건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더 가서야 그녀는 차를 세웠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아무 설명 없이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바깥이 의외로 무더웠다고 했다. 윗도리를 벗고 구두를 손에 쥐고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미회색의 단층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좁은 마당을 메운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들. 느티나무 아래 그네에 매달린 여자아이의 하늘색 셔츠 위로 언뜻 스치고 지나갔던가. 매장 거울 구석에 떠오른 아름다운 얼굴…. 건물 뒤편 쓰레기 소각장 옆에 걸음을 멈춘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고 했다. 흑백 사진처럼 새까만 기억들이 그제야 한꺼번에 기어나오고 있었다고. 갈기갈기 찢어진 흙투성이의 옷과 반쯤 뜯겨나간 금발과 예리하게 팬 한쪽 눈알을 목격할 때까지.


 그녀는 이제 밤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했다. 흙 묻은 인형을 끌어안고 자취방 구석에 몸을 말고 있어야 했다. 손끝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아련한 온기와 비좁은 보육원 방 어둠 속에서 그녀의 사타구니를 더듬던 선혜 언니의 끈끈한 손길과 인형의 얼굴을 손톱으로 뜯어가며 잠들던 자신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문득문득 한데 뭉개진 얼굴로 출몰하는 남자들의 살 냄새가 몸에서 완전히 달아날 때까지. 인형보다 흉측하게 허물어져내리는 자신의 얼굴을 저주하면서.


 알몸의 천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 드러누워 있다. 그는 두 손으로 인형의 몸을 쓰다듬는다. 자잘한 석고 가루와 손에서 배어나온 기름때로 지저분하다. 유리그릇에 물을 붓고 중성 세제를 푼다. 칫솔에 물을 묻힌다. 눈과 코와 발가락과 날개…. 칫솔모가 닿을 때마다 희미한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던 여자의 몸. 겨드랑이에 고여 있던 땀방울과 휘어질 듯 달아오른 등허리와 가느다란 입술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마른수건으로 닦아내자 인형의 몸은 연하게 빛을 낸다. 스탠드 불을 켜고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핀다. 군데군데 접착제로 붙여진 부분에 미세한 틈이 보인다. 표면이 거친 곳도 많다. 색을 칠하기 전에 접합제로 틈을 메우고 사포로 표면을 다듬어야 한다.


 그는 에어 브러시를 책상에 올린다. 흰색 도료에 희석제를 섞는다. 이 모습 그대로가 그녀와 가까운지 모른다. 몸속 깊이 스며들어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틈들…. 물총처럼 생긴 에어 브러시의 물감 통에 도료를 채운 다음 손잡이를 살며시 잡아당긴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흰색 도료가 안개처럼 인형의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손가락을 떼고 만다. 허겁지겁 붓에 시너를 묻혀 가슴에 묻은 도료를 닦아낸다. 책상 모서리를 두들기다 그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문다. 희부연 연기가 인형의 얼굴을 감싸며 사라진다.


 에어 브러시를 거꾸로 들어 도료를 쏟아낸다. 붓과 마른수건과 칫솔을 책상에서 쓸어낸다. 순간접착제로 단단하게 들러붙어 언제까지고 삐뚜름히 굳어 있을 줄 알았던 물음이 왜 지금에야 슬며시 풀어지려고 하는가. 칸막이들이 빽빽이 들어찬 거대한 사무실과 온종일 숫자들이 오르내리던 모니터들과 아침마다 커피 자판기 앞에서 수군거리던 짙은 색 양복들. 왜 실감이 나지 않을까? 출근길 아스팔트에 눈부시게 반사되거나 아무도 없는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설 때 코끝에 감기곤 했던 물음은 어느 새벽 골목길 불 꺼진 문방구 진열대 구석에 처박힌 낡은 조립 상자 하나를 발견할 때까지 이어졌다. 칼과 접착제와 방 안 가득한 시너 냄새…. 좁은 나무판 위에 붙박여 움직이지 않는 병정들과 함께 그는 비로소 편안했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무엇이든 상대할 일이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하필 지금 왜? 쇠창살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여자와 알몸으로 책상에 드러누운 인형. 그들 사이에 놓인 건 또 무언지 그는 알 수 없다.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소음이 들린다. 그는 귀를 가까이 댄다. 전화벨이 울리고 슬리퍼를 끌며 누군가 지나가고 멀리서 여자들이 한꺼번에 웃고 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공간의 소리들이 왠지 낯설지 않다. 많이 기다리셨죠? 카랑카랑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소음들 위로 튀어오른다. 담당 선생님이 자리를 비워서 말예요. 임원경 씨라고 하셨죠? 면회 가능하답니다….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어, 어디….”


 문을 닫으려는데 김이 다가선다. 바지 주머니에 든 오른손을 움켜쥐고 있다. 아침보다 더 뻘게진 김의 눈 때문인지 갑자기 허기가 돈다.

“이거….”


 여자의 칼이다. 그는 물끄러미 김을 쳐다본다. 날카로운 도구만 보면 챙기는 얼굴이 무서워진다. 무슨 얘기를 뱉어내려는 듯 눈을 끔벅대던 김이 말없이 돌아선다.



낯선 얼굴들이 빠르게 스친다. 짙은 자줏빛으로 물든 통로를 그는 서둘러 걸어간다. 수요일 저녁마다 김은 수족관을 찾았다. 인형처럼 입구에 꼼짝 않고 서 있던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순간마다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던가. 작은 삼각끌 하나를 쥐고 버텨야 하는 지하 공간의 굳은 일상을 깨뜨려주는 한 순간. 플라스틱 술병을 뒷주머니에 숨긴 채 김은 그렇게 가게와 수족관 사이의 먼 길을 태엽이 감긴 모양 정확한 시간에 오고갔었다. 쓰러진 여자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야 했던 그날 저녁까지.


 푸르스름한 물빛이 감도는 통로의 세 번째 수조에 놈들은 들어 있었다. 한 뼘이 채 안 되는 노랑해마 여섯 마리였다. 하나같이 우뭇가사리 모양의 검붉은 해초 줄기에 꼬리를 감고는 가만있었다. 깨알만한 눈알을 굴리면서.

“왜 움직이지 않죠?”


수조 가까이 얼굴을 붙인 그가 물었다.


“헤엄을 잘 못 치거든요. 그래서 몸을 지탱하기 위해 저러는 거죠. 교미도 쟤들은 꼬리로 하더라구요.”


물고기가 수영을 못한다고? 허리를 펴며 그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네 마리 말들이 끄는 수레를 바다에 빠뜨리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랬나 봐요, 옛날에…. 그래선지도 모르죠. 말들이 바다 속에 들어와버렸으니, 제대로 숨이나 쉬겠어요?”


 그날 오후, 나무판을 들고 가게로 온 여자는 수족관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이제 직원이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청바지와 흰색 셔츠 차림의 얼굴이 의외로 맑았다. 덕분에 앉은뱅이책상과 함께 낡은 인형을 버릴 수 있었다고 했다. 무슨 이유로 어디에 어떻게 버렸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꽤 만든 거죠? 그의 허락도 없이 자신이 만든 나무판을 진열장에 올려놓으며 환히 웃는 얼굴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윽고 한 놈이 줄기에서 떨어지더니 서서히 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 얘기 때문인지 주둥이를 기다랗게 내민 놈의 얼굴이 언뜻 말 대가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 쟤들이 감고 있는 해초는 사실 인조예요. 몇 천 원 주면 살 수 있죠. 천연 해초는 녹아버리니까. 바닷물이 아니라 가공한 수돗물이거든요.”


 수조 앞에 쭈그려 앉은 얼굴이 물빛으로 푸르스름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신기하죠? 두꺼운 아크릴 벽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저렇게들 잘사니…. 자세히 보면요. 생긴 게 다 달라요. 눈, 코, 입….”


 굵은 물줄기들이 뿜어져나오는 분수대 옆 인공 바위에 그는 기대어 있다. 출구 쪽을 바라보지만 선뜻 발길이 잡히지 않는다. 저녁 일곱 시. 광장은 끈적끈적한 열기로 달아올라 있다. 벤치에 앉아 깔깔거리는 여학생들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 청년과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출구 옆 간이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젊은 남녀들이 서서히 모여든다. 무대 한쪽에서 기타 음을 고르고 있는 청년의 빨간색 머리칼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벽에 붙은 TV 쪽으로 옮아간다. 여전히 탱크가 사막 위를 달리고 모래바람이 낯선 거리를 쓸고 표정 없는 아이들이 골목에 쭈그려 앉아 있다. 고장난 시계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요? 조금 늦게 혹은 빠르게 가는 시계들. 혹은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욕망을 꿈꾸는 사람들. 전투기 몇 대 뜬다고 맞춰지겠어요? 따끔거리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빼낸다. 김을 닮아가는가. 움켜쥔 손아귀에 아트 나이프의 날카로운 칼끝이 쥐어져 있다. 그도 모르게 바위 틈 깊숙이 몸을 박은 채 손바닥에 고인 핏물을 바라본다.


 그날 왜 여자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묻지 못했던가. 푸른 수조 앞에 쭈그려 앉은 그녀 동공 속을 오래전부터 떠돌던 해마. 놈들이 들어 있던 수조처럼 비좁은 그녀의 자취방. 그 속에 고여 있던 낡고 오래된 시간들을 훔쳐본 값을 치르려면 한 번쯤은 물어봤어야 하는 건 아닌가. 왜 그리 파고들기만 하느냐고…. 하지만 그 순간 왜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싸늘한 바람이 좁은 통로를 휩쓸고 지나갔는지, 푸르스름한 얼굴 살갗 위로 수없이 그어져내리는 미세한 빗금들에 움찔거리며, 왜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까부터 바위에서 풍기는 페인트 냄새에 갑자기 어지러워진다. 바닥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란한 불빛들 위로 기타 소리와 관중들의 함성이 뒤섞인다. 눈앞이 흐려진다. 빠르게 도는 회전문 속에 갇힌 것처럼 정신이 없다. 안간힘을 쓰며 출구 쪽을 바라보던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만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의 지갑이 털렸을 것이고 접촉 사고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대로에서 욕설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방구석에 박혀 있던 어느 청년의 손에 부탄 가스통과 일회용 라이터가 동시에 들려 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날, 허겁지겁 수족관을 빠져나온 그가 광장을 가로지르던 날이기도 했다. 날씨는 새벽부터 우중충했고 주가(株價)는 온종일 오르락내리락했다. 남미의 해변에서든 북유럽의 뒷골목에서든 그렇게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녀의 일도 아주 작고 단순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저녁, 아트 나이프의 날카로운 끝은 임원경의 얼굴 위에서 춤을 추었다. 왼쪽 귀밑부터 턱까지 한 번, 오른쪽에서 또 한 번…. 예리한 빗금들이 짙푸른 낯빛을 잘게 갈라나갔다. 가구점 김이 아니었다면 칼끝은 그녀 가슴속까지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밤새워 만든 병사처럼 검붉은 피가 여자의 얼굴과 흰 셔츠를 뒤덮었다. 여자가 쓰러진 바로 그곳, 좁은 플라스틱 수조 속의 해마들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해초에 꼬리를 감고 있었을 것이다.


 사위가 조용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뜬다. TV 화면이 움직이지 않는다. 흙먼지 속에 육중한 탱크가 멈춰 서 있다. 포신에서 피어난 연기가 허공에 걸려 있고 모래언덕을 넘는 병사들 얼굴이 검게 굳어 있다. 분수대 앞에 서 있는 노인의 움츠린 어깨도 펴지지 않고 쇼핑백을 든 젊은 여자의 손도 움직이지 않는다. 음악 소리도 관중들의 함성도 없다. 기타를 둘러멘 빨강 머리 청년의 이마에 언뜻 핏방울이 스치는 순간 그도 모르게 휘청한다. 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여자의 나무판은 어디선가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지루하고도 끔찍한 전쟁은 언제까지든 계속될 것이고 김은 바지 주머니 속에 든 끌을 매만지며 하루를 버텨갈 것이다. 고장난 시계를 품은 여자는 또다시 헤맬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힘든 먼 미래를 좇아서.


 비치적거리며 그는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2007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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