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꽃
박 세 연
공짜 상품권
담배를 챙겨들고 나는 옥상으로 올라간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과 그 너머 도시의 야경이 내게 영감을 줄지도 모른다. 바람이 상쾌하다. 어쩐지 내가 지금까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발한 상상이 나를 찾아들 것 같다. 수 십 미터의 강폭을 이루며 흘러가는 한강도 처음엔 태백산의 작은 샘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이야기의 모티브를 얻는다고 놀랄 일은 아닌 것이다.
오늘 나는 방송국으로부터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낸 사연이 채택된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여러 번 상품을 받아왔다. 꽃바구니에서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물론 그만큼 열심히 사연을 보냈다는 뜻이다. 가끔씩 내가 어떤 매체에 무슨 내용의 글을 보냈는지 헷갈릴 정도다. 그렇다고 똑같은 사연을 여러 곳에 보냈다거나 내가 날마다 새로운 사건을 접하는 특별한 업종에서 일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사연 보내기’를 통해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낼 시도를 하는 중이다. 일찍이 누군가는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달리는 말이라고 했었다. 이렇게 저렇게 결정을 내려놓고도 매번 마음을 바꾸는 상황에서 오늘 받은 문화상품권은 내게 하나의 객관적인 증거가 되고, 격려의 메시지가 된다.
고백하자면 내 사연들은 모두가 허구였다. 방송국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사연을 보낸 분들이나 관계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 글은 대부분이 지어낸 이야기였다. 한마디로 방송을 타기 위해 내가 꾸며냈다는 의미다. 물론 누구라도 프로그램의 특징과 방송 시간대를 고려해 진솔하게 쓰다보면 어느 정도의 확률이나 우연에 의해 행운을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경우처럼 여러 번 채택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기본적으로 글의 성격에 따라 문체가 자연스러워야 하고, 사연을 보내는 사람의 성별이나 연령에 맞게 글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이쯤 되면 혹자는 내가 지어낸 글에 호기심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가 없다. 이미 방송이나 지면을 통해 소개된 터라 혹시라도 내가 보낸 사연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단순히 상품에 눈이 멀었던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우롱하기 위해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실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내 거짓 사연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식으로 나를 실험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창작을 하고 싶어서다. 창작은 픽션이고 지어낸 이야기다. 다시 말해 상상의 산물이고 오랜 숙련과정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 자신을 검증해 보기위한 시도였던 것이다.
그 출발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여름이면 의례히 여성지에서 공모하는‘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주제에 약간의 유머를 섞어 보냈던 것이 채택되면서 였다. 그 뒤 나는 홍보실에 있으면 자연히 접하게 되는 여러 매체에 사연을 보내기 시작했고, 점차 채택의 확률을 높여왔던 것이다.
옥상은 이미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있다. 물론 5층 건물의 다세대 연립주택 옥상을 독차지할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나처럼 담배를 피우러 올라오거나 혼자 맥주를 마시는 경우도 있다. 어떨 땐 삼겹살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담배든 술이든 마시고 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다. 도시의 야경을 배경삼아 두 남녀가 섹스를 하고 있다. 그것도 옥상의 가운데 지점에서. 여자가 난간에 기대어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감고 있는 자세다. 나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흐린 불빛 속으로 드러난 여자는 아는 얼굴이다. 302호의 그녀는 여전히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다.
갑자기 호흡이 빨라진다. 내가 섹스를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닌데 얼굴까지 붉어진다.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하고 돌아서지도 않는다. 어디선가 정액냄새를 닮았다는 밤꽃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땅이 흔들리는 것도 같다. 난 언제 섹스를 했던가? 술에 취해서 자신을 방치하듯 나눈 섹스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눠본 적이 있기나 한가?
나는 옥상을 내려와 편의점으로 향한다. 이미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는 사라지고 없다. 대신 캔맥주를 사서 돌아서는데 이미지 하나가 떠오른다. 방금 옥상에서 본 남녀 덕분이다. 그들의 행위가 내게 자극이 된 것은 분명하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노트북 앞에 앉는다. 그러나 한 문장도 써지지가 않는다. 그저 머리 속을 맴돌 뿐이다. 그러고 보니 두 남녀의 교접하는 행위를 통해 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장소를 가리지 않는 애정행위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픽션의 한 장면인지 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이라면 너무 평범한 이미지다. 차라리 대본을 써는 게 나아. 내게는 그게 훨씬 더 익숙해. 나는 노트북의 전원을 끈다.
다이아몬드와 사탕
팀장이 찾는다. 70년 전통을 가진 생명보험사에서 내가 카피라이터로 일한 지도 6년째 접어들고 있다. 2년간의 계약직에서 정식직원이 되었고, 그 사이 나는 가상의 고객을 대상으로 수없이 많은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고, 교통사고와 질병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자식한테 의존하지 않는 당당한 노후를 팔아왔다. 이제 카피라면 매체의 특성이나 지면의 크기에 따라 내 안의 내장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 생산이 가능해졌다. 아울러 그 카피에 입힐 이미지를 가공하는 것도 별다른 고민 없이 이뤄졌다.
카피는 오래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손쉽게 속성으로 태어난 것은 기성품의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참신하지도, 그렇다고 형편없지도 않는 오래된 신발 같은 느낌. 지금의 내 카피들이 그런 처지임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안다. 물론 팀장을 비롯한 다른 직원들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먼저 느끼고, 그들 나름의 위치로 나를 밀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팀장 앞에 카피를 내놓는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다. 팀장은 이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 자리에 앉히기 위해 줄을 세워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마무리가 덜 됐다고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도요 속의 도자기가 다 빛을 보는 것도 아니다. 형태를 만들고 문양을 넣고 굽는 과정을 다 거쳤다 해도 도공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박살나는 도자기가 어디 한 둘인가? 초고상태에서 팀장의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 많은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니다. 그의 반응에 민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유종의 미라고, 지금 상황에선 떠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팀장은 거듭 커피를 읽는다. 좋은 징조다. 팀장은 입사초기부터 나와 함께 일해 왔다. 내 의도를 간파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잘못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은퇴를 앞둔 블루칼라 쪽에서 모델을 찾았으면 합니다.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공장 쪽에서 평생을 바쳐 일해 온 명장을 섭외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너무 밋밋하지 않아. 예감은 빗나간다. K사 광고 못 봤어. 오늘 신문에도 났던데. 심플, 서플라이징, 쇼킹. 광고의 쓰리에스 알잖아. 강대리! 요즘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애. 연애라도 해? 평소라면 몰라도 오늘은 어떤 대구도 하고 싶지가 않다. 잘 안될 땐 기본으로 돌아가는 거라구.
나는 입 안에 든 사탕을 빼낸다. 더 이상 그것을 물고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사탕을 실제로 물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징이고 이미지다. 오래 전 아프리카의 소녀들은 단단하고 광채를 발하는 돌을 가지고 놀았다. 그것을 본 문명국의 이방인들은 그 돌을 갖고 싶어서 소녀들에게 제안을 했다. 내가 이 사탕을 얼마든지 줄 테니 그 돌과 바꾸지 않겠니? 다이아몬드는 그렇게 이방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좋은 광고는 발상의 차이가 아니라 완성의 차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동안 써오던 것과는 다르지만 폐기처분 할 정도는 아니라구요. 갑자기 웃음이 난다. 턱을 고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는 팀장은 관객이고, 나는 연출자 앞에서 대본을 연습하는 배우 같다. 내가 아무리 어설프게 굴더라도 혹은 열연을 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 같은 팀장의 냉담한 얼굴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대사를 읊조릴 수가 없다.
나는 곧 배우가 아니라 희곡작가가 될 몸이다. 더 이상 화장실이나 방에서 속상해하고 억울해하면서 혼자 주절거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쓴 대본을 통해 배우가 대신 말하게 하고 관객과 공감하게 만들 것이다.
내일까지 다시 생각해봐.
카피를 찾아서
간간이 자리가 비어있는 지하철 안은 출근시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K사의 지하철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눈을 감고 싶다. 나는 그 옆의 결혼정보회사 광고로 시선을 옮긴다.‘화려한 싱글은 없다’는 카피에 긴 생머리의 여자가 물방울이 맺힌 장미꽃을 한아름 안고 있다. 카피 한 줄에 잘 생긴 남녀만 있으면 족한 광고.‘화려한 싱글은 없다. 화려한 노후(?)는 없다……’같은 운율과 리듬을 가진 카피를 짜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소비자를 세뇌시켜라. 화려한 싱글은 없다. 화령한 싱글은 없다……. 나는 과장하고 미화되는 광고의 속성을 잘 알면서도 그 속으로 빨려든다.
내일쯤 나는 결혼정보회사의 인터넷 사이트를 찾을 지도 모른다. 그곳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또 커플매니저로부터 전화를 받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를 시장에 내놓으면 어떤 반응이 생길까? 시장은 수용과 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딱히 결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의 값이 나가는지 확인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그 순간 공개구혼장이 머리를 스친다. 결혼정보회사보다 더 확실한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일흔이 넘은 유럽의 백만장자가 신문을 통해 공개구혼을 했다면 나라고 시도하지 못할 것도 없다.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전철은 한강 위를 달리고 있다. 환청처럼 노랫소리가 들린다.‘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검은 안경에 지팡이를 든 맹인이 통로 한가운데를 걸어온다. 노래는 맹인의 손에 들려있는 녹음기에서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내게 강 같은 평화라니. 수면 아래의 깊은 물살과 소용돌이를 보지 못한 탓이다. 사람들의 무심한 표정 뒤에 사연이 없을까? 누군가는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중이고, 누군가는 자신을 혐오하며 몸서리를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의 몸속에는 병이 깊어가고, 누군가의 뱃속에는 생명이 자라고 있을 수도 있다. 표정이 없다고 그들 삶이 무심하리라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그래서 더 간절히 강 같은 평화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 없는 숲처럼 고요하고, 휘둘러 살아온 시간 속에 가뭇없이 쓰러져갔을 꿈조차 잊은 채 그저 봄처럼 활기차고 가을빛처럼 투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리움에 가슴 떨지 않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없고 과장하고 미화하는 카피라이터인 또 다른 나만 남는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내 모든 것이 카피를 생산하기 위해 작동되는 시스템이거나 그것의 통제를 받는 느낌이다.
맹인의 플라스틱 바구니는 비어있다. 누구도 지갑을 열지 않는다. 하나같이 신문을 읽고 자는 척하며 맹인을 외면한다. 나는 착하다,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는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다, 허위에 찬 나는 맹인의 바구니에 동전을 넣는다.
빛나는 사직서
늦잠을 잤다. 도로가 막히는 시간이다. 택시를 타려다 나는 지하철로 향한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저절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비슷한 색상의 양복에 비슷한 무늬의 넥타이를 맨 그들이 간밤에 마신 술과 옷에 베인 음식냄새가 뒤섞여 숨을 막는다. 나는 출입구 가까이로 다가간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이라도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다. 문이 닫히면서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턱시도 차림의 남자가 술병에 키스를 하고 있다. 마치 매력적인 여인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듯 남자는 술병에 몸을 밀착시킨 채 병목에 입을 맞추고 있다.
손잡이에 기댄 채 졸고 있던 남자가 내게 몸을 기대온다. 광고 속의 턱시도 남자는 여전히 술병에 키스를 하고 있다. 나는 술병을 거꾸로 들이붓는 것처럼 취기를 느낀다. 몸을 비틀어도 소용이 없다. 아직 카피는 정리되지 않았고, 생활수기 심사와 고객에게 보내는 신임 사장의 인사장을 써야 한다. 역을 지나칠 때마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든다. 전철 안은 곧 피난을 떠나는 열차처럼 복잡해져 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출근해서 메일을 연다. 극단하늘의 홍보담당자로부터 쪽지가 와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내 글을 보고 가을쯤 다른 연극을 올리는데 그 때 초대장을 보내겠다며 주소를 알려달란다. 나는 가능하다면 연극을 더 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낸다. 오래 전 일이지만 지방무대에서 1년 정도 배우를 했었고, 지금은 희곡을 공부하는 중이라는 것도 덧붙인다. 물론 내 휴대폰 번호와 주소도 남겼다. 극단에서 연락이 올까?
나는 생활수기 원고를 펼쳐든다. 은퇴 후 운전을 배워 아내와 전국 일주를 할 것이라는 남편과,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감과 보험금이 희망이 되어 주었다는 전업주부도 있다. 적어도 이들의 사연은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다. 원고 뒤에 첨부된 고객의 가입이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는 원고들을 읽어나간다. 예순의 할아버지가 여든의 아버지를 병간호하면서 느끼는, 살던 집을 장마로 떠내려 보낸 어머니의 사연에 점수를 매길 수가 없다. 나는 정해진 원고분량보다 짧은 것들만을 골라낸다.
나는 다시 사무실 건물의 옥상으로 향한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가끔씩 찾는 곳이다. 건너편 건물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상체를 꺾는다. 그 순간 나는 남자가 뛰어내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남자는 내가 옥상에 올라오기 전부터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소리를 지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남자는 왜 한낮의 사무실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는 것일까? 나는 난간으로 바짝 다가선다. 누구라도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옥상을 내려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신화를 빌어 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묻습니다. 아침에 네 발, 점심에 두 발, 저녁에 세 발인 것은? 젊어서 두 발로 당당히 설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서는 지팡이에 의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평생 당신의 든든한 지팡이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있을까? 그 동안 나는 너무 많은 미래를 판 것이다. 내가 쓴 카피야말로 거짓이고 꾸며낸 허구다. 그것이 진실이 아닌 이상 어떤 색깔과 향기와 맛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내가 쓴 카피에 취하고 세뇌당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어쩌면 내가 임의로 팔아버린 미래가 지금 내게 복수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서른 살의 내가 그 사이 평균수명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갈 곳이라고는 오직 하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후회와 추억을 더듬는 것이 전부인 나이. 나는 지금 그 생의 끝,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이른 기분이다.
나는 팀장 앞에 카피를 내놓는다. 당신은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갈수록 길어지는 당신의 노후를 응원합니다. 이제 내 카피는 아무런 마술도 부리지 못한다. 내 자동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고 이런 상태로 생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카피에 대해 팀장이 뭐라 하기 전에 나는 사직서를 내놓는다. 결혼 하냐?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한다. 그냥 쉬고 싶어서요.
이미 퇴근 시간은 지나 있고, 극단하늘로부터 연극을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홍보담당자의 전화를 받은 상태다. 나는 팀장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며 이따금씩 상상해오던 대로 조용히, 우아하게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늑대의 어머니
언젠가 우리도 늙을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함께 빛을 잃어가겠죠. 저는 이제 서른 살의 미혼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 드는 걸까요? 그것은 얼마 전에 본 연극 때문입니다. 연극을 보면서 마치 데자뷔 현상, 왜 가보지 않았는데도 가 본 듯한 그런 느낌말입니다. 그것은‘늑대의 어머니’를 보면서 였습니다.
연극은 백발의 할머니가 오두막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냥을 나갔던 남편이 짐승한테 물려 죽게 된 것에서부터 아들을 기다리는 지금까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할머니의 독백을 들으면서 영화의 장면처럼 이야기들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 그것은 영화와 같은 간접체험이 아니라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고 직접적인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그 아들의 어머니로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제가 그 할머니의 아들이었던 것일까요?
혹시 연극을 보신 분 중에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분은 없나요? 연극이란 게 뭔가요. 배우와 관객의 소통이고 공감 아닌가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깊은 산 속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직접 지은 통나무집 주변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고 있습니다. 밤 새 사랑을 나눈 남녀는 행복한 얼굴로 깨어나 남자는 사냥을 나가고 여자는 식사를 준비하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남자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이후 여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몸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고, 여자는 혼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잘 자랐습니다. 아이가 클수록 죽은 남편을 닮아갔고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들을 세상 무엇과도 나눠 갖고 싶지 않아서 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좀 더 자라면서 부인은 아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아들 그 이상으로 사랑한 것이지요. 그럴수록 어머니의 시름은 깊어갔습니다. 해가 뜨면 다시는 아들과 사랑을 나누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방을 찾아오는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결심했습니다. 아들을 데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시근처에 집을 빌려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밤마다 어머니를 찾았고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웃의 또래 여자애들과 아들이 데이트를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머니 자신이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이웃의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고 아들을 의식하면서 섹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 모자의 운명을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와 섹스를 했던 남자를 잔혹하게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지명수배자가 되었습니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잘못은 어미인 나한테 있으니까 아들을 제발 용서해달라고 그 아이한테 처음부터 다시 세상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이 글은 내가 블로그에 올렸던 극단하늘의 늑대의 어머니에 대한 공연 평이다. 1달여 사이 나는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몇 편의 연극을 봤고, 그것에 대한 짧은 단상을 올려왔다. 그러나 늑대의 어머니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지하도를 올라오다가 늑대의 형상과 사람의 모습을 합성시킨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고, 홍보전단을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데자뷔 현상을 끌어다 붙인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공짜는 처음이다. 무단 배포되는 초대권이나 할인권이 아니라 극단 측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연인이 내게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소극장 가는 길
지하철을 탄다. 어떤 광고에도 나는 시선을 뺐기지 않는다. 이제 내 삶의 주제는 사람인 것이다.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여자의 맨 살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다리를 벌린 채 콤팩트를 꺼내들고 있다.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뚜렷한 이목구비다. 여자는 아이샤도우를 바르고 마스카라로 정성스레 속눈썹을 올리고 있다. 그 사이 전철은 강변역을 지나 왕십리역에 닿는다. 나는 여자의 옆자리에 앉는다. 공공장소에서 화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여자의 다리만큼은 오므리게 하고 싶다. 남자들의 시선이 더 이상 여자의 맨 살에 머물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다. 나는 여자가 다리를 모을 수 있도록 다리를 벌린다. 내가 벌리는 만큼 여자의 다리 간격이 좁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바지를 입은 나야 10센티쯤 다리를 벌린다 해도 그녀만큼 도발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리를 벌리는 만큼 여자의 다리가 오므려질 것이라는 생각은 빗나간다. 여자는 오히려 나를 치한을 대하듯 노려보며 옆자리로 옮겨 앉는다. 여자의 다리는 그대로 벌어져 있다. 나는 눈을 감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한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탤런트를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한수정과 닮았네. 한수정을 닮은 네가 풀어 봐. 그녀는 자신이 찍었던 CF 광고주와 드라마 상대배역 탤런트와 정치인과 가수와 염문을 뿌렸다. 실제의 그녀가 어떠하든 여성적인, 그녀의 이름처럼 빛을 발하는 수정의 이미지를 가진 그녀는 드라마 속에서 늘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는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더 연약해 보였고, 그녀를 닮았다는 나 역시 연약함을 종용받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연약한 척 할수록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체육시간 운동장 돌기에서 제외되거나 단체기합에서도 빠질 수 있었고, 남학생들로부터 러브레터를 받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자주 거울 앞에 앉았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나는 학원에 등록하는 대신 극단을 찾아갔었다. 연극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끼게 되었고, 술에 취한 나는 연출자였던 그를 따라 극단으로 갔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동안 나는 누군가를 닮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내가 아니었다. 내 안에 솟구치는 강렬한 힘을 느꼈고 그 때문에 기꺼이 그를 받아 들였다. 그는 내 안의 불완전 것을 온전하게 해주는 엔지니어 같았다. 낡은 부품을 찾아내듯 나 아닌 나를 바꾸고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듯 했다. 어쩌면 그런 것에 대한 내 기대가 불러낸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의 섹스는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느낌이었다. 연극 같았고, 나 자신이 배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감독은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을 챙겨 입으며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단원이 되고 싶어요.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주세요.
진짜 연극
지하 2층, 100석 규모의 소극장이다. 조금 전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던 여자가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며 분장실로 뛰어간다. 나는 매표소에서 이름을 말하고 홍보담당자를 찾는다. 잠시 뒤 남자가 나온다. 그는 보통 키에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체형이다. 공연 보시고 괜찮으시면 뒤풀이도 같이 가시죠?
조명이 커지고 무대에는 은발의 노파가 오두막의 방에 앉아 있다. 노인이 곳곳에 촛불을 밝히자 방은 더욱 낡고 초라해 보인다. 노파가 객석을 향해 앉는다. 전철에서 화장을 하던 바로 그 여자다. 연극은 내가 올린 공연평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연극을 여러 번 본 것처럼 익숙함을 느낀다. 노파의 대사를 속으로 따라하고 빛의 일렁거림과 기다림의 황홀함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겨자 덩어리를 삼킨 것처럼 코끝이 아리고 어느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고 눈물까지 흘린다.
나는 조명이 꺼지자마자 박수를 친다. 박수로 다른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것은 무대 위의 그들에 대한 나름의 예의고, 작품이 흥행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나는 극단에서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대학을 가라는 부모님의 성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포스터붙이기에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1인 몇 역의 단역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미리 절망했었다. 그 때 나는 공부를 하겠다고 그래서 관객이 좋아하는 대본을 쓰겠다고 단언하며 극단을 나왔고 서울로 진학을 하면서 그곳과 결별했다.
연극이 끝났다. 20년이 지나 오두막을 찾아온 남자, 아들이면서 연인이었던 그의 품에서 할머니는 눈을 감는다.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껏 박수를 친다.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질 때까지 감동이든 예의로든 오래 박수를 보낸다. 다시 조명이 켜지고 배우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한다. 연극은 끝났지만 나는 한참동안 그대로 앉아 있다. 제2, 제3의 늑대어머니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홍보담당자를 따라 뒤풀이 장소로 간다. 지하주점에는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이미 취해 있다. 감독이 강의를 나가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 이삼 십 명이 함께 어울린 모양이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감독에게서는 빛이 난다. 내가 선생님이라 불렀던 10여 년 전의 그는 지방도시의 문화회관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다. 중앙의 공연들을 유치하고 본인이 직접 연출해 작품을 올리기도 한다고 들었으나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이어서 지금도 그 도시에 있는 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쓴 연극을 그가 보게 될까? 내 이름을 기억하기나 할까?
학생들이 인사를 하며 한꺼번에 나간다. 감독과 여자가 일어선다. 홍보담당이 그들에게 나를 소개시킨다. 우리 구면이죠? 아까 지하철에서. 여기는 앞으로 희곡을 쓰실 강민주씨. 여자가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곧바로 감독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감독님! 오늘 정말 힘들었어요. 중간에 계속 박수가 터지니까 감정이 잡혀야 말이죠. 여자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친다. 그러게. 전혀 박수가 나올 때가 아닌데 말야. 막간에 박수치는 거 아니었어요? 박수를 유도하기 위해 연출된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막 터져 나오려던 말을 술잔으로 막는다. 일부러 공연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여자는 계속 박수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이들은 같이 잤을까? 생각은 무대 위로 흐른다. 조명은 꺼져 있고 여느 연인들처럼 서로를 껴안은 채 감독과 여자는 서로를 핥고 탐하고 상대의 몸 속 깊숙이 자신을 밀어 넣고 있다. 상상이다. 그러나 그림은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감독과 그녀 둘만의 연극을 나 혼자 관람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무대 위에서 감독과 섹스를 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내 경험이 여자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어쩌면 혐의가 아니라 실제로 그녀와 감독이 잤을 수도 있다. 작품을 위해, 불투명한 미래와 갈수록 남루해져 가는 자신의 참담함을 견디기 위해,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이유와 핑계와 연유로 인해 그들이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감독님! 왜 번역극이죠. 흥행에 성공한 몇몇 외국 작품을 계속 울려먹겠다는 건가요? 그것도 고전극이니 정통극이니 하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농락해도 되나요? 희곡 공부한다고 했던가? 자네가 써보지 그래. 제가 쓰면요? 무대에 올려주실 건가요?
여자가 일어선다. 내일 공연을 위해서 쉬어야겠단다. 함께 술집을 나왔는데 모두들 사라지고 홍보담당자와 나만 남았다. 우리 집으로 갈래요. 옆 집 살던 사람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워서요. 나는 홍보담당자의 팔에 매달린다.
제 얘기 들어볼래요. 옆 집 할머니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어요. 그 옆집에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송작가가 살아요. 물론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죠. 여자가 다큐멘터리 대본을 쓸 때는 할머니가 도움을 주기도 해요. 할머니는 가끔씩 여자에게 김치를 나눠주고 그녀가 일 때문에 며칠씩 집을 비울 때면 강아지를 대신 돌봐주시기도 하셨죠. 이야기는 지금부터예요. 연극을 보면서 생각한 건데 밤마다 할머니의 아파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경비실에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않아요. 다들 여자가 할머니랑 친했기 때문에 정을 떼느라 그렇게 무섬증이 든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여자가 아파트에 갔더니 그곳에 정말 누가 있는 거예요. 여자가 어떻게 열쇠를 손에 넣게 되었는가는 나중에 생각하고, 내 이야기는 그곳에 아들이 있었다는 거죠. 여자가 남자를 단번에 알아본 것은 그가 TV뉴스를 통해 알려진 연쇄살인범 용의자였기 때문이죠. 1년 넘게 쫓기던 남자였는데 그가 바로 할머니의 아들이었던 거예요. 할머니는 여자한테 늘 아들이 외국에 가 있다고, 가끔씩 국제전화가 걸려왔다고 자랑을 하고는 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죠. 여자는 살인범의 포로로 잡혔어요. 그리고 그들의 동거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퇴근 무렵 놀이터에 나와 계시곤 했는데,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평생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남편이 퇴근해오나 내다보곤 하다 보니 저절로 몸이 밖으로 나오게 된다구요. 그러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자수를 권하게 되죠. 그러나 남자는 매일 악몽에 시달리다가 결국엔 어머니를 따라 창문을 뛰어내리고 말아요.
내 생애 첫날
기억은 홍보담당과 함께 갔던 카페에서 끊어져 있다. 가파른 2층 계단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집까지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옆집에 살지도 않는 할머니 이야기에 막연히 구상했던 대본 이야기를 늘어놨었고, 무엇 때문이었는지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다.
오늘은 내 생애 첫 날이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어떻게 매울까? 일단 잠부터 자두자.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출근 안 해? 익숙한 목소리다. 그러나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강민주씨 휴대폰 아닌가요? 팀장이다. 이제야 의식이 돌아온다.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오늘은 쉬고 내일 나와.
햇빛이 창문을 넘어 거실의 소파에까지 들어와 있다. 나는 청소를 하려다 그냥 집을 나선다. 집안일을 하면서 빈둥거리기 위해 사직서를 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선언을 하고 만 것이다. 그 동안은 익명으로 거짓사연을 보내왔지만 이제는 좀 더 진지하게 정면으로 생활과 부딪혀야 한다. 물론 내가 지어낸 사연들이란 일상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인의 상상력이란 현실을 크게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법한 이야기지만 그것에 누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정도다. 희곡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 문제다.
나는 지하도를 내려간다. 매일 아침 나는 개찰구의 오른쪽 계단을 내려가 회사로 가곤 했다. 나는 잠시 방향을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회사와는 반대방향을 선택한다. 가다가 중간쯤에서 다른 노선을 갈아타고 책을 읽으면서 졸다가 어느 지점에서 내릴 것이다. 그곳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다른 눈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건강상태를 한 눈에 확인시켜드리는 신비의 묘약입니다. 이 작은 병에 든 시약은 한 방울의 피만 있으면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약에 피를 떨어뜨려 응고되지 않으면 건강한 것이고, 피가 응고되거나 약간이라도 뭉치는 기미가 있으면 세포가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본인이 건강한 지 아닌 지 한 방울의 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약은 미국의 생명공학 연구소와 합작으로 개발한 것인데 피가 뭉치는 분께는 무료로 건강진단을 해드리겠습니다……. 무료라니. 임상실험 대상자를 모으는 것인가? 일종의 마루타 같은. 현대의학은 누군가의 희생이 가져다 준 대가다.
사람들이 계속 모여든다. 나는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든다. 이들 속에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꾸며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생활의 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런 나를 누군가가 눈여겨봤다면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과 마치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에 차서 반짝거리는 눈을 봤을 것이다. (끝) (200자× 8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