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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 23:19

매듭

  박경숙

   

   나는 마침내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한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 아니 그 여자의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쓰려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례식은 바로 어제 부슬거리던 가을비 속에서 치러졌다. 퇴색한 잔디 위에서 젖은 발을 뭉그적거리고 있던 몇 되지 않던 조객들 중에서 나는 금방 그녀의 남편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껑충한 키에 마른 몸집, 광대뼈가 불거진 얼굴에 움푹한 눈은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풍길 법도 했는데 둥근 콧등 밑의 두툼한 입술은 왠지 그를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했다. 그가 어떻게 생겼건 간에 그녀의 남편이란 것을 안 이상 나는 그의 아내였던 여자의 삶에 대해서, 적어도 그가 모르고 있는 그녀의 다른 일면을 말해주어야 한다. 

 어느새 저녁이 오려는가. 어제의 빗줄기에 맑게 닦인 창안으로 노을이 쳐들어 오고있다. 아직 잔디도 제대로 입히지 못한 그녀의 무덤 위로 막 두 번째의 밤이 오려나보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메운 지금 저 노을의 타는 듯한 기운을 안고 편지를 쓰자. 

 서두를 어떻게 시작해야할까. 나는 그의 이름 석자 정도는 알고 있는 바이지만 그냥 이니셜만 딴 'H선생'이라고 부르련다.


   H선생!  

 당신은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서른 일곱의 나이로 땅에 묻힌 당신의 아내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함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알고있고, 당신의 아내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살아생전의 아내에 대해 잘 알고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면 당신은 화를 내거나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당신의 아내를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만났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녀를 만나는 일은 처음엔 내 직업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나를 찾아왔지요. 나는 그녀가 나를 처음 찾아왔던 날을 기억합니다.

 1년 전쯤 스산한 바람이 불던 아주 흐린 늦가을 날이었답니다. 카키색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들어서던 그녀의 홀쭉한 모습은 찬바람을 안고 그 가을날의 흐린 기운을 온통 뒤집어 쓴 듯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아주 투명한 한 꺼풀의 얇은 막을 뒤집어 쓴 듯 아리송하고도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화장기 없이 꺼칠한 피부에 입술은 메말라 있었지만 그녀에게선 적잖은 젊음의 냄새가 풍겨 나왔습니다. 삼십대 중반의 여인에게서 싱그러운 젊음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그녀보다는 훨씬 늙은 나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아니면 비록 그녀가 우울해 보이기는 했어도 나이보다는 젊어 보이는 그런 타입의 여자란 얘기도 됩니다.

 그래요! 그녀는 젊었지요. 나를 찾아왔던 그날은 서른 여섯, 그리고 땅에 묻힌 어제는 서른 일곱입니다. 그녀는 결코 그렇게 죽어야할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습니다.    사실 나와 당신이 함께 그녀를 그렇게 죽게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 편지를 써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죽음을 공모한 공범이면서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으며, 사실 당신은 자신의 그러한 범죄사실에 대해서 자각조차 하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아뭏든 그녀가 처음 나를 찾아왔던 날, 그 첫마디는 그저 새처럼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알기도 전에 나는 그 울음소리에 먼저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처음 몇 주간 그녀는 그렇게 울기만 했습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던 그 아름다운 젊음의 향기 뒤에 도사린,  노을처럼 붉고 뜨거운 가슴이 갖가지 형태로 매듭 진 밧줄로 꽁꽁 묶여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맨 처음 그녀를 위해 했던 일은 새처럼 울어대며 들먹이던 그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며 인내심 있게 그녀의 언어를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인내심은 나에게 있어선 오랜 세월의 훈련에 의한 내 트레드 마크와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들먹거림이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어깨를 참을 수가 없어 그만 손을 얹고 말았습니다. 그 어깨가 나를 유혹했다면 변명일까요. 

 여윈 어깨였지만 여성 특유의 보드라움이 내 손바닥에 묻어 났습니다. 내가 그녀의 체온이 묻어난 내 손바닥을 바라보며 쩔쩔매던 한 순간, 정말 아주 짧은 찰나였는데 그녀는 눈물 젖은 눈을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이 그 흔한 인조 쌍꺼풀 하나 없이 아주 평평하고 동양적인 눈이란 것을 당신은 나보다도 더 잘고 있을 테지요. 그 눈은 순간 나를 조소하는 듯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더 바라보지 못 하고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서류로 눈길을 떨구어 버렸습니다. 왜 그런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지요. 그녀와 나의 첫 번째 눈맞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내내 새처럼 울기만 하던 그녀는 삼 주일 째 되던 날, 겨우 울음을 그치고 내게 말을 했습니다.

 "사는 게 고통스러워요. 춥고 배가 고파요. "

 그녀의 목소리는 울음소리보다 훨씬 더 가늘고 매력적이었지요. 그리고 그렇게 말을 시작했던 날 그녀는 몹시 아름다웠습니다. 가냘픈 몸매는 우아한 초록빛 수트에 숨겨져 있었고, 하얗고 귀여운 귓불엔 금장식된 에메랄드 귀걸이가 달랑거렸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그녀가 춥고 배가 고픈 가난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고통스럽다고 한 말에 초점을 맞추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 물었지요. 그녀가 나를 찾아온 이상 나는 그 고통에 대해서 당연히 알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끝까지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만 물었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고통만을 해결해 주었더라면 그녀는 절대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녀의 행복에 대해서도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마땅히 고통만을 해결해주고 그녀를 당신 곁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즐거움은 당신 영역의 것이었고 내가 맡아야할 것은 오직 고통의 부분이었던 것을....... 아니면 당신이 그녀의 고통까지 책임질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왜 당신은 그녀의 고통을 짊어지지 못했던지. 그리고 나는 왜 그녀의 고통만을 짊어져 주지 못했던지 나 자신도 더없이 원망스럽습니다.  

 새처럼 울어대던 그녀의 모습은 한 남자로서 식어버린 내 가슴에 보호본능을 자극했습니다.  나는 젊지 않은 남자의 식은 가슴에 불을 지피는 그 묘한 여인의 고통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계절이 겨울로 들어서자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제법 재잘대며 이야기를 하다가 때론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당신도 알다시피 그녀의 미소는 정말 아름다웠지요.   나는 그 미소 속에서 그녀의 가슴을 동여매고 있는 하나의 매듭을 슬며시 더듬어 보았습니다.  작은 매듭이 하나 손에 잡혀왔습니다. 짧은 상고머리에 얼굴엔 온통 마른버짐이 핀 작은 계집아이가 정말 배가 고파 울고있었습니다.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금새 솜털 같은 버짐이 번진 볼 위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나는 10살 때까지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늘 배가 고팠지요. 하루 세끼의 밥도 모자랐지만 뭔가 먹어야할 것을 빼먹은 것처럼 가슴이 늘 허전했어요. 그게 어쩌면 사랑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지요. 내 기억 어디쯤엔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기억이 날듯 말 듯 했지만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나는 늘 바람에 굴러가는 한 잎의 낙엽처럼 춥고 허전하기만 했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흘렀습니다. 그러나 쌍꺼풀이 없는 그녀의 평평한 눈에서는 눈물이 활개를 쳤습니다. 가만히 그 눈물을 들여다보던 나는 어느 겨울날 양지바른 담벼락에 죽 늘어 선 아이들 사이에서 살그마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그만 계집아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허전한 가슴을 다독거리느라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손이 나를 가리켰어요. 나는 그 손가락 끝이 내 눈을 찌르려는 것만 같아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손가락의 주인을 쳐다보았죠. 둥근 얼굴에 턱이 두 개나 되는 아주머니가 빨간 입술연지가 칠해진 입술을 오무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뭔가 만족한다는 듯 겹쳐진 턱까지 끄덕였지요. 나중에 나는 그 여자가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도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답니다."

 지나간 기억을 반추하느라 꿈을 꾸듯이 흐려져 가는 그녀의 눈 속에서 나는 그 상고머리의 계집아이가 턱이 두 개나 되는 여자의 손짓에 섬뜩 놀라고 있는 가엾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열 살이 되었을 때 그 여자의 양녀가 되어 고아원을 떠났습니다. 

 "양어머니는 내 짧은 상고머리를 길러 주었지요. 1년쯤 지나자 내 머리는 리본을 매어 묶어도 좋을 만큼 자랐어요. 영양실조 때문에 만발했던 마른버짐은 어느새 없어지고 내 얼굴엔 반드르 윤기가 흘렀지요. 양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한번도 아이를 가져보지 못한 40대의 독신녀였어요. 양어머니와의 삶은 편안했지만 내 기억 속에 아스름히 남아있던 가정적인 삶과는 몹시 다르다는 것을 나는 조금씩 느껴갔어요. 사춘기가 되자 내가 남과 다르다는 인식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그녀는 내게 얘기를 털어놓는 것이 이제 편안해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남편으로서 적지 않은 세월을 그녀와 함께 했지만 그녀의 그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고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괴로워했던 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남편인 당신의 마음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춰볼 수 없는 답답함과 괴로움 때문에 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말은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가슴속엔 사랑의 언어들이 유달리 터질 듯이 가득한 사람이 그 사랑을 쏟아낼 대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이 얼마나 힘겹고도 외로운 삶인가를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그녀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고아원에서 자란 열 살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내면에 쌓아두는 것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점점 큰 에너지를 형성했지요. 때문에 그녀는 지나치게 사색적인 여성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첫 번째의 작은 매듭을 더듬다가 이내 다음 매듭으로 옮겨갔습니다. 첫 번째보다는 조금 더 큰 부피로 내게 감지되던 그 매듭 안에서 나는 사랑에 눈이 떠가는 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그녀의 내면 안에 도사리고 있던 사랑의 에너지가 빛을 발할 순간이 오고야만 것입니다. 

 "양어머니가 운영하던 카페의 단골손님이었지요. 나는 대학 졸업반이었고 그는 대학원생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내게 다정했고 해박한 지식으로 내 외로운 영혼을 포용했어요. 그를  만날 때면 나는 내 몸과 마음이 마치 꽃처럼 피어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란 것도 처음 알게 되었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나를 위해 향기를 피우고 있는 것만 같았답니다."

 그녀의 눈은 정말 별처럼 빛났습니다. 듣고 있는 나도 마치 첫사랑을 하는 듯한 착각에 흥분할 만큼 말입니다. 결이 고은 긴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미소짓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그 시간 속에서 영원히 정지하게 하고 싶을 만큼 그녀는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녀를 옭아맨 하나의 매듭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양어머니는 내게 무척 잘해주셨지만 내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질투를 했어요. 그분은 사랑의  경험이 없이 그저 나를 키워왔던 거지요. 적적한 생활을 위로하는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듯 말이죠. 자연히 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를 배반했습니다. 나를 그 춥고 배고픈 고아원에서 건져내 준, 그리고 나의 성장을 위해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양어머니를 버려 둔 채 집을 나와버렸어요. 처음엔 친구들 집을 전전했지만 얼마 후에 자연스럽게 그의 여자가 되어버렸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나는 양어머니를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고아시절의 기억들도 모두 지워버렸답니다. 나에겐 그와 하나라는 사실 외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빛나던 그녀의 눈이 흐려졌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이란 것이 다 그런 것이었을까요. 그들은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당신은 그녀의 그런 젊은 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리라고 짐작합니다만 새삼스레 분노하지는 않기 바랍니다.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 곁에도 내 곁에도..... 더구나 그녀가 젊은 날 사랑했던 그 사내 곁에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했지만 운명은 벌써부터 그들의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던 지도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운명이란 것엔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녀를 만나고, 그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운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부모님께서 몹시 반대하셨어요. 양어머니를 통해서 아셨던지 내가 고아출신이란 것을 이유로 절대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지요.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근본도 모르는 고아를 며느리로 들일만큼 막된 집안은 아니라고 내게 호통을 치셨지요.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그도 그 호통 앞에선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에요. 어느 날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훌훌 떠나갔어요."  

 그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그 눈물 속에서 혼자 남은 그녀를 만났습니다. 아픈 젊음이 몸부림치며 나뒹굴던 그 이별의 현장을 보았던 것입니다. 가슴이 아팠지요. 그 대목에서 아픈 가슴을 가누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곤 그녀를 포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처음 나를 찾아오던 그날과 똑같이 울었지요. 마치 새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 구슬픈 울음소리 속에 새처럼 가슴을 발딱이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창 밖을 보았습니다. 봄이 피어나고 있었지요. 어느새 가로수의 메마른 가지엔 새순이 돋고 거리엔 봄의 화사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젖어들기 시작했던 가을날은 어느새 겨울을 거쳐 봄으로 얼굴을 두 번이나 바꾸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녀의 작고 보드라운 몸을 안고있는 내 두 팔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향기로웠습니다. 나야말로 초로의 나이에 그녀의 향기 속에서 첫사랑을 만난 듯 흥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품에 안겨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던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그 젊은 날의 아픈 여인이 되어 이별의 현장에서 섧게 울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 그렇게 울기만 하던 그녀가 돌아가고 난 뒤 나는 내 품에 남은 그녀의 향기 때문에 밤을 뒤척이며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내 손안엔 그녀의 가슴속에서 뛰쳐나온 그 슬픈 매듭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를 기다리던 일주일 사이에 봄은 홍수처럼 거리로 밀려들어왔습니다. 화사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온화한 기온에 온몸을 휘적이며 걸어갈 때 절제에 길들여진 이 초로의 남자의 가슴에도 설레임이 일었답니다. 다만 봄 때문이었을까요. 내 설레임이 말입니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봄 탓이 아니고 그녀 때문이란 것을 ....... 나에게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란 것의 정체를 잘 알고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 직업은 그 사랑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랑은 어느 깊은 숲 속의 어둠에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조각난 햇빛처럼 찾아와서는 그 조각 볕이 온 세상인양 우리를 마비시킵니다. 그리고 그 햇빛이외엔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어둠이 보이지 않습니다. 때문에 아무 것에도 아프지가 않습니다. 사실 사랑이란 한 순간의 환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깨어 버려야하는 허무한 꿈처럼 말입니다.

 그녀는 그 허무의 순간 한가운데에서 오랜 세월동안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자신의 생활을 어둡게 만드는 집착증세를 보였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이 얼마나 못난 짓인가를 깨우쳐주려고 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란 서로의 성적 본능에서 출발하여 소유의 욕망으로 이어지는 유치한 것이란 것을 말입니다. 정작 우리가 행해야 할 거룩한 사랑은 그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려 했습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대륙의 비극을, 테러에 파괴된 중동사태에 대해서, 가까이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비극들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앓고있는 아픔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말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에 정통한 현시대의 지식인인 나에게도 사랑이란 괴물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일주일 뒤 다시 만나던 날,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울어대던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얀 실크 블라우스에 겨자 색 스커트를 입고 들어서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잔잔한 색조로 그려진 어느 여성화백의 그림틀에서 막 튀어나온 여인처럼 나를 아련하게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의 가슴에서 뛰쳐나온 두 개의 슬픈 매듭이 내 손에 쥐어져있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매듭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자잘한 매듭들이 무수히 만져졌습니다. 마치 그녀의 하루하루가 모두 매듭이었던 것처럼......

 "그가 그렇게 떠난 후 나는 양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그분은 이미 나에 대한 분노조차 체념한 채 나를 잊고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내겐 대학졸업자격이 있었고 내 한 몸 입고 먹는 것을 해결할 만한 직장을 구할 수가 있었지요. 다시 고아가 되어버렸어요. 내가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그런 막연한 답답함에 젖던 어린 시절보다도 더 나쁜 상태의 고아였다고 할까요. 가슴엔 구멍이 뚫려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눈이 안개 속으로 젖어드는 듯 했습니다.  마치 한 개비의 담배를 손에 들고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그 허심한 표정처럼...... 그러나 담배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나였지요.

 내가 내 뿜는 연기 속에서 나는 사랑을 잃은 한 젊은 여인이 힘없이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아로새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말로 표현 못할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매력에 이끌린 한 남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건 당신이었지요. 부유하고 편안했다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그녀를 끌어당길 만한 것이 당신에겐 없었습니다. 그녀의 섬세한 내면을 이해해주기엔 당신은 지극히 평면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신을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이상 '고아'라 불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그 동안 연락을 끊었던 양어머니와 연결이 되었고 이번엔 질투심 많은 양어머니도 협조를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아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녀는 양가의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처녀로서 당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녀가 당신을 남편으로 택했던 것은 그 사랑이란 것의 허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무용지물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 뒤의 삶은 날마다 자잘한 매듭이 되어 그녀를 옭아매 왔습니다. 사랑이 샘솟지 못하는 삶이 그녀를 점점 병들게 했던 거지요.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뜨거운 사랑의 에너지를 지닌 그녀였기에 말입니다. 그녀는 도통 삶의 활력소를 찾지 못하고 시들어가다 나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치유를 위해 스스로 한 조각의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마치 어두운 숲 속의 나무 가지로 스며드는 조각난 햇빛처럼 말입니다.

 나는 흐린 눈빛으로 풀이 죽은 채 앉아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살며시 그녀를 일으켜 안아주었지요.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내 품에 안겼습니다. 마치 이슬에 젖은 풀잎단이 바람결에 쓰러지듯 그렇게 내 품에 기대었습니다. 얼마간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녀의 젖은 두 눈은 마치 내게 삶을 갈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삶을 주고 싶었습니다. 아주 활기찬 삶을 말입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슬픔에 메마른 그녀의 입술은 내 입술에 포개진 채 몹시도 뜨거웠지요. 긴 입맞춤 속에 꿈결 같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입맞춤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그 이후 내가 그녀에게 준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다니......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나였습니다. 나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아야하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그녀의 섬세한 부분에 대해선 알고있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그녀는 내 앞에서 싱그럽게 피어났습니다. 가슴속의 그 수많은 매듭들을 모두 풀어헤친 듯 정말 화사한 여인이 되어갔지요. 그녀가 피어날수록 나는 점점 나의 위치를 망각해갔습니다. 그녀에게 삶을 주기 위해 시작한 나의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나에게 삶을 주기 위한 사랑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여름으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막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녀를 나는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사랑은 내게 있어 욕망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창밖엔 노을이 지고 있었지요. 몸을 다 숨기지 못한 햇살이 하늘에 남긴 여운은 정말 극치의 예술이었습니다. 멀리 산등성이는 핑크 빛이었고 하늘가운데는 대낮의 푸른빛이 사선을 그리며 남아있었습니다. 그녀의 하얀 면직 투피스가 연 보라 색으로 물들었습니다. 나는 그 노을과 그녀의 아름다움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녀를 깊이 안아버렸습니다. 노을 때문이었다면 변명이 될까요. 그녀와 나를 같은 빛깔로 붉게 물들이는 노을에 잠겨 욕망을 불태웠다고 말한다면 핑계겠지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었다면 그 또한 변명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나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향기로운 그녀를 참지 못하는..... 그 붉은 노을을 참지 못하는......

 그녀가 향기롭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 품에 깊이 안긴 그녀는 나의 모든 의식을 마비시킬 만큼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녀 안에서 내 온몸이 녹아 허공으로 증발하고 있는 듯 황홀했습니다. 우리들의 첫 번째 몸 맞춤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그것은 가장 섭리적인 사랑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 시작되었지요. 그녀와 내가 왜 이런 위치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던가가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젊은 날, 그 아픈 사랑의 매듭이 지어지기 전에 만났더라면 나는 어쩌면 그녀의 한평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참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요.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그 매듭들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내면을 앓고있지 않았다면 나를 찾아올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런 아픔을 통한 그녀의 묘한 매력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인생이란 어둔 숲은 맥을 추지 못하고 밀려났습니다. 키가 큰 나무 가지들 사이로 안개처럼 내비치는 그 숲 속의 조각난 햇빛들...... 우리는 그 빛 가운데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칠하는 빛, 그것이 사랑이었습니다. 그 빛은 새벽 어스름에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처럼 우리를 보드랍고 축축하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개처럼 불분명한 우리의 미래에 대해 가슴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름이 짙어져갔습니다. 짙푸른 나무 잎 사이에서 하얗게 웃던 서른 일곱 살 그녀의 여름이 마지막 여름이 될 줄은 그녀도 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더운 여름 내내 땀에 절은 서로의 끈끈한 몸을 끌어안고 꿈을 꾸던 우리는 더위가 식어가면서 조금씩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어둔 숲 속을 비추는 그 환상적인 조각햇빛은 시한부 적인 것이지요. 해가 자리를 바꾸면 햇빛의 위치가 바뀌고, 구름 속으로 해가 들어가 버리면 햇빛은 자취를 감추어 숲 속은 깜깜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의 환각은 그렇게 찰나적인 것이었습니다.

 가을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똑같이 꿈을 깼지요. 사랑의 고통이 물밀듯 가슴으로 밀려왔습니다. 지독한 행복 뒤엔 지독한 고통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섭리였던지 그녀와 나는 꿈이 떠나가는 서로의 표정에서 서늘한 고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가을로 접어들수록 그녀는 처음에 나를 찾아왔던 그때의 표정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그녀의 내면을 더듬어 가슴을 묶은 매듭들을 제거해줄 힘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또 다른 매듭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란 삶의 아픔을 무마시켜주는 진통제와 같은 것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까지 마비시켜 버리는 무서운 힘을 가진 괴물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랑은 내게 있어서 영원히 이론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늙어 가는 나에게 사랑은 힘겨웠고, 젊은 날의 사랑에 대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그녀에게 사랑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필사적인 것이었습니다.  우습게도 이것은 사랑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심리 차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피크닉을 약속했던 날, 하필 첫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피크닉을 강행했지요. 떨어지는 빗방울에 몸이 불어 가는 강가에 앉아 우리는 청승스럽게도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준비해온 와인글라스엔 붉은 와인과 빗물이 반반씩 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비를 맞으며 빗물과 눈물을 섞어 와인 잔을 거푸 들이키던 그녀는 그것이 나와의 마지막 만남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듯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 병의 와인이 바닥이 났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그녀의 잔을 채웠고, 그녀의 눈물 또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슬픔에 젖었던 그녀에게 내가 고작 해줄 수 있던 일은 흠뻑 젖은 그녀를 내 우산 안으로 안아 일으켜 세우는 것뿐이었습니다. 

 물이 잔뜩 불어난 그 강가를 떠나 거리로 들어섰지만 빗줄기는 끊임없이 세상을 적셨습니다.  그 비에 젖은 세상 한가운데에 나는 그녀를 놓아주었습니다. 젖은 몸으로 내 품에서 새처럼 다시 울던 그녀를 말입니다. 어차피 그녀가 살아야할 세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그녀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사랑이 마비시킨 지적 능력을 회복하여 나의 본분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는 터덜터덜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빗속을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술에 취해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취하고 이별에 취해있던 것을 나는 몰랐습니다. 사람이란 그렇게도 불완전한 존재였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조차 헤아리지 못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긴 대화를 나눈들, 깊은 사랑의 눈빛을 나눈들, 뜨거운 몸 맞춤을 나눈들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내 귀 안에 들어온 그녀의 목소리가 두뇌의  빠른 회전에 삼키어질 때면 그것은 이미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랑의 깊은 눈빛을 교환했지만 그녀의 타오르던 눈빛이 내 망막에 맺힐 때는 오직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내 시력만큼 뿐이었습니다. 사랑에 사무쳐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끌어안고 온 여름을 보냈지만 그녀의 체온이 내게 전해져올 때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존재보다는 다만 막연한 여성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고 할까요.

 비에 젖은 세상 한복판을 걷던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지더니 내 시야에서 사라져갔습니다. 나는 담담히 돌아와 내 일에 충실하기에 힘을 다했지요. 그것이 내 삶의 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당연히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더군요. 다시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을, 또 일주일을 ........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가을이 깊어갔습니다. 어느덧 그녀가 나를 처음 찾아왔던 날이 되었고, 나는 꼭 1년 전 카키색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뿌연 가을을 뒤집어쓴 채 들어서던 그 여인을 회상해보았습니다. 깊은 한숨이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니 깊은 통증이 파고들었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느 결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 통증을 견디다 못해 연기와 함께 훅 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번의 날숨으로 그녀를 버릴 수만 있었다면 내가 이런 편지를 당신에게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내가 뿜은 담배연기가 허공에서 맴돌다 사그라질 무렵 누군가 내 사무실을 노크했습니다.  나는 왜 그때 출입문을 여는 대신에 창 밖을 보았을까요. 창밖엔 뿌연 가을이 가득 차 있었지요. 그녀가 처음 나를 찾아오던 그 흐린 가을날처럼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출입문으로 다가가며 그 흐린 가을의 기운을 온몸에 뒤집어쓴 그녀가 내 품에 뛰어들어 새처럼 우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우편배달부였는데 그는 한 통의 등기우편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글씨가 겉봉에 쓰여있었지요. 내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봉투를 여는 동안 담담 하려 노력하였지만 내 손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쓴 여섯 장의 편지, 그 속엔 일년동안 우리 사랑의 기록이 섬세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의 시가 있었는데 그 시를 여기 옮겨 적겠습니다. 


나 어디에서 왔을까.

나 무엇하러 왔을까.

그리고 나 어디로 돌아가나.

돌아갈 곳 있다면 그곳에 가서

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


돌아갈 날 아직 멀다하더라도

나 꿈을 보았으니

꿈에 취한 채 그냥 가고 싶네.

꿈이 깨어

찬바람에 내 마른 뼈가 감기기 전에

이 꿈 입고 그냥 돌아가려 하네.


내가 여기에 온 것이 그 꿈을 입으러 왔다면

나 할일 다하여 돌아가려네.

꿈을 준 그대에게 꿈에 취한 채 이별하고

나 돌아갈 때면

내 가슴에 엉긴 매듭 다 풀 수 있으리.


 그 시를 읽는 순간 섬뜩한 충격이 느껴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죽음을 감지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틀 전이었지요. 내 온몸의 피돌기가 정지한 듯 했습니다. 어떻게 전화를 걸었는지 당신의 집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그녀의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그 가을의 첫 비가 내리던 날, 물이 불은 강가에서 비에 함빡 젖었던 그녀는 그날 이후 몹시 앓았다고요. 그다지 심각할 것 없던 폐렴이었는데 그녀는 모든 약을 뿌리친 채 치료를 거부 했다하더군요. 그리고서 음식조차 먹지 않았다고요.

 나는 압니다. 그녀에겐 삶의 의지 대신 죽음의 의지가 몇 배 강했다는 것을....... 그녀는 사랑이 깨어진 삶을 또다시 살아낼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나를 통해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만이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사랑의 꿈을......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꿈은 내가 준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생성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내면 안에 숨었던 열정이란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스스로 빠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조금 더 그녀의 꿈을 지켜 주어야만 했습니다. 너무 서둘러 내 위치로 돌아오려 한 것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또 비가 내리던 날, 나는 참나무 관속에 누워있던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멀찌감치에서 말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은 알코올로 닦여져 수의가 입혀졌을 테고 그 참나무 관 위엔 몇 개인가의 대못이 쾅쾅 박혀 그녀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겠지요. 나는 한 구석에서 검은 우산을 쓴 채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그녀가 누워있는 그 관을 ......  그리고 당신을 발견했지요. 

 당신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낼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병들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영혼만 사랑한다는 것이 육체까지 사랑해버렸지요. 어쩌면 우리는 사이좋게 나누어 당신은 그녀의 현실만을 감당하고 나는 그녀의 영혼만을 사랑했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영역인 그녀의 현실을 침범했고, 당신은 그녀의 영혼에 대해선 너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녀가 그저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조울증 환자였지만, 나에게 있어 그녀는 신기하게도 울음소리에서 향기를 뿜는 한 마리의 귀여운 새였습니다. 당신은 그녀가 그토록 향기롭다는 것을 알기나 했던지......

 그토록 향기롭던 그녀는 지금 어둠에 누워 그 아름다운 육신의 부패를 재촉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그녀에 대해 공통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그 아름다운 육신뿐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육신은 우리에게서 쉽게 잊혀질 것입니다. 세월에 밀리다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그녀의 향기는, 새처럼 울던 그 향기로운 울음소리는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기억 안에서 그녀의 육신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이 편지를 씁니다. 그녀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가슴속에도 그녀가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기에 말입니다. 그녀가 돌아간 그곳,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왔다가 서른 일곱 해를 끙끙 앓고는 서둘러 꿈을 입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그녀가 떠나야할 때가 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녀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았어도 아직 나의 떠날 때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녀와 내가 함께 한 사랑에서 그녀는 그것을 영원한 꿈으로 입어낼 줄 알았지만, 나는 스스로 그 꿈에서 깨어나 버렸습니다. 나에게도 사랑이 영원한 꿈으로 입혀질 그런 투명한 날이 오기는 할 것인지......... 

 H선생! 우리 꿈을 꾸십시다. 그녀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우리가 돌아갈 그날에 꿈을 입고 가자고 당신에게 말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편지가 끝나고 나니 창 밖은 칠흑이다. 그녀가 누워있는 그 땅속처럼 말이다. 책상 위엔 노오란 스탠드 불빛만이 내가 휘갈긴 편지를 비추고 있다. 이 편지를 부쳐야 할지 말아야할지는 내일 생각하리라. 아! 가슴 안으로 통증이 밀려온다. 견디기 힘든 괴로움에 가슴을 쓸어 내리는 내 손안에 하나의 커다란 매듭이 쥐어진다. 그리고 그 매듭 안에선 그녀의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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