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박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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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린 자둣빛 유두가 그대로 비친다. 가슴은 수유기 때처럼 풍만해져 있다. 나는 거울 가까이 다가간다. 최근 유럽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며 친구가 사다준 속옷이다. 어깨끈 말고는 모두가 망사소재로 돼있다. 가리거나 받쳐주는 기능대신 가슴을 신비롭게 만들어준다.
속옷을 입었음에도 도드라지던 사진 속 모델의 유두와 음모. 그것을 드러내놓고도 자기만족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다. 그녀라면 아무런 구속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까?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해 사랑을 나누게 될까? 거울 속 여자의 가슴은 더 이상 쳐져 보이지 않는다. 군살이 생기기 시작한 허리선은 레이스가 가려주어 날렵해 보인다.
여자에게 있어서 속옷은 환상이다. 속옷가게를 찾는 사람들, 새롭고 화려한 속옷을 찾는 그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도취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자인이 특이할수록 남들이 입지 않은 것일수록 만족감은 더 커진다고 했던가? 나는 친구의 속옷가게를 드나들면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던 여자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붉은색 망사 소재의 속옷이 내게 새삼 그것을 일깨운다. 내게 어울리는 나만의 특별한 속옷을 입음으로써 순간적인 자유와 사랑을 꿈꾸게 되는 것이리라.
누군가는 속옷을 두고 식물의 이파리로 신체를 가리고 초원을 달리던 때로의 회귀라고 말했었다. 어쩌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그런 욕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색과 무늬와 소재를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 어쩌면 속옷이 필요 없던 때를 그리워하는 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사랑과 사람에 집착하고 목말라하면서도 온전히 한 대상에 머물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각자 돌아가고픈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리라.
딱히 그 사람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내게는 그가 유일한 환상이고 설레임인 것은 분명하다. 그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금의 자유로운 사랑이, 내 안의 평화가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자위를 한다.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은 누구의 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욕망, 절정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절실할 뿐이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 안으로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날아든다. 라일락 향기가 짙다. 소파에서 일어서려는데 뭔가가 엉덩이에 달라붙는다. 불을 켜자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막 빠져나온 소파의 쿠션과 무릎담요를 들춰보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다. 조금 전에 내가 본 회색빛 실타래 같았던 것은, 몸을 감싸며 엉덩이를 간질이던 포근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자세로 한참동안 소파에 누워 있었으나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겪는 느낌도 아니다. 일찍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새벽이나 해질 무렵 혼자 베란다에 서 있으면 누군가 풍성한 깃털로 맨살을 간질이는 듯한, 그러면서 꼬리뼈 언저리가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었다.
주변을 돌아본다. 아들의 방문은 닫혀있다. 벌거벗은 엄마를 볼 수 없어서 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것만 같다. 아들의 방문을 연다. 냄새가 난다. 막 이성에 눈을 뜨고 이성을 갈망하는 수컷의 냄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아들의 서랍을 연다. 문제집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책꽂이 책들은 형형색색의 펜으로 줄긋기를 해놓은 것 같다. 무심코 연습장을 꺼내 뒤적이다 여러 겹의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글씨를 발견한다. 화요일. 영어단어들 속에 끼어있는 그 글씨는 오래 시간을 두고 눌러쓴 흔적이 역력하다. 화요일은 내가 그를 만나는 날이다. 준혁이 어떻게 그 날을 알았을까? 아니다. 준혁의 화요일은 내가 그를 만나는 요일이 아니라 준혁에게 약속이 있거나 시험을 치루는 날일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나더라도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집에 왔었다. 어쩌다 외곽으로 나가게 되어 시간이 지체되는 날에는 나름대로 핑곗거리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준혁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라는 단정은 할 수 없다. 어린 날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준혁도 짐작하고 눈치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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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와 있다. 준혁에게 메모를 남기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저녁 어스름을 몰고 오는 바람에는 향기가 묻어있다. 얼굴로 피부로 봄밤의 향긋한 바람이 스며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흔들린다. 망사소재의 브래지어에는 와이어가 없다. 안감을 덧대지 않아 가슴 속까지 바람이 닿는다. 치맛자락이 펄럭인다. 새의 깃털로 다리 사이를 간질이며 장난을 거는 것 같다.
그가 차에서 내려 기다리는 모습이 보인다. 흰색 슈트에 하늘색 면바지가 잘 어울린다. 그는 만날 때마다 다른 느낌이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고 햇빛이나 조명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늦은 오후의 도로는 한산하다. 창문을 열고 한강을 달리는 동안 어머니의 존재는 조금씩 잊혀진다. 일주일 내내 그를 만나지 않겠다던 마음도 점차 옅어져 있다. 양수리 근처의 방갈로는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면 주인은 부르지 않는 한 다시 오지 않는다.
지금쯤 아들은 학원에서 돌아와 식탁 위에 올려 놓은 메모를 봤을 것이다. 아들에겐 어머니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간다고 적었다. 이모네에 들렀다가 늦을 것이라는 말도 함께.
옆 방갈로에서 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신음소리는 과장되어 있다. 여자는 지금 우는 것일까? 여자의 소리는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을 것 같다. 남자는 무거운 짐을 지고 높은 곳을 올라 가듯 끙끙거린다. 어느 순간 흐느끼는 것도 같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소리로 듣기는 처음이다. 그와 내가 함께 몸을 나누는 사이라 해도 어색하다. 우리가 내는 소리를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어떨까?
“ 무슨 일 있어? 왜 아무 말도 안 해?”
“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 갑자기 왜 그래?”
“ 엄마가 집에 와 계셔요. 남편도 본사 발령 나서 올라와요.”
“ 조금만 있다 가.”
만나지 말자는 말은 그에게 한 말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한 말인지도 모른다. 어느 한 쪽에서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만남이다. 각자 가정이 있고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지금까지 아무런 갈등이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마지막이라는 것이 우리를 엮어준 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가 계산을 하러 간다. 나는 주차장이 아니라 반대편 물가로 향한다. 강물은 산 그림자와 강 저편의 불빛을 그대로 품고 있다. 사람의 숨결처럼 따뜻하고 눅눅한 바람이 인다. 맨살, 맨발로 풀밭을 걷는 것 같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뒤따른다. 냄새가 먼저 코를 자극한다. 잘 마른 건초냄새 같기도 하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맑은 숲속의 이끼냄새 같기도 하다. 골프장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이 냄새에 끌렸던 것도 같다. 그가 손을 잡는다. 어떤 말보다 위력을 가지는 따스함이다. 불필요한 생각을 지우고 스스로 쌓아올린 경계를 무너뜨리게 만든다.
구두 속에 모래알이 서걱거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을 자극한다. 구두를 벗고 맨땅에 발을 딛는다. 차갑고 축축한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브래지어 속으로 바람이 파고든다. 치마 속에도 바람이 닿는다. 맨몸으로 서 있는 것 같다. 홀가분하면서도 외로운 느낌이 밀려든다. 밤의 냉기와 차가운 땅의 기운이 고스란히 몸으로 전달된다. 몸이 떨린다. 어느 순간 유리조각 같은 것이 발바닥을 찌른다. 무엇에 찔렸는지 살피기에 불빛이 너무 흐리다. 나는 깨금발로 물가로 간다. 강물로 발을 씻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보인다. 그가 자신의 무릎에 발을 올리고 손수건으로 상처를 감싸준다.
“그것 봐요. 헤어지자고 하니까 피도 흘리고 그러잖아.”
그가 등을 내민다. 누군가의 등에 엎혀 본 것이 언제일까? 그의 등에 가슴이 닿는다. 넓고 따뜻한 등이다. 그의 두 손이 엉덩이를 받친다.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듯 그의 손가락이 치마 속을 헤집고 든다.
“ 당신은 꼬리가 한 세 개 쯤 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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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불이 켜져 있다. 어머니는 이모네 가셨고 준혁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아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편이 돌아본다.
“병원 간 거 아니었어? 장모님은?”
“분당 이모네. 언제 올라왔어요?”
“내일부터 본사 출근이야. 오후 내내 휴대폰이 꺼져 있던데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일? 저녁은요?”
“ 대충 먹었어. 나 리비아나 터키로 가야할 것 같아. 요즘 회사 사정이 안 좋아.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야 해. 가면 적어도 3년은 있어야 하는데…. ”
“이야기는 좀 이따 해요.”
나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유리에 찔린 발이 쓰라리다. 벗어놓은 옷에는 풀물이 들어 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오랫동안 샤워를 한다. 남편은 연하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다. 나는 남편의 팔을 베고 눕는다. 메마른 팔이다. 운동으로 다져진 그의 팔과는 많이 다르다. 그는 임대료 수입만으로 사는 사람이다. 별도의 재테크를 하지 않아도 소유한 빌딩 값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을 가꾸고 즐기는 일 뿐인 사람이다. 그를 위해 나는 가끔씩 파트너가 되어주는 셈이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는 그의 아내를 대신한 화요일의 여자인 것이다. 남편이 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1달 만에 집에 온 사람이다. 벌써 3년이다.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처음 1년은 남편이 올라오거나 내가 내려가곤 했었다. 그러다 준혁이 때문에 내가 내려가지 않게 되었고, 격주에 한 번씩 남편이 올라오고는 했다. 그나마 이번 달엔 남편의 공장일이 바빠져서 한달 만에 올라온 것이다.
당신이 많이 그리웠어. 남편의 입김이 닿는다. 갑자기 엉치뼈가 뻐근해진다. 온몸으로 전류가 흐르듯 통증이 인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남편이 놀라서 동작을 멈춘다. 남편의 손이 닿자 통증이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돌아누울 수가 없다. 남편이 스팀타월을 가져와 찜질을 해준다. 잠깐 나아지는 것도 같다. 남편이 수건을 들고 나간 사이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음이 울린다. 간신히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의 휴대폰을 연다. 그 사람이다. 헤어지더라도 자신한테 시간을 달라는 메시지다. 나는 서둘러 문자를 지운다. 자리에 눕는데 엉치뼈가 어긋나는 것 같다. 척추 끝부분이 저려서 몸을 제대로 펴고 누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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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 사이 꿈을 꾸었다. 서른 몇 살의 어머니가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를 쫓아오는 꿈이다. 기억은 나이를 먹지 않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늙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기억은 언제나 시간을 비켜 서 있다. 내게 어머니는 언제나 서른 몇 살 그대로다. 연초록의 블라우스와 그보다 좀더 짙은 색의 스커트를 입고 총총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던 아름다운 삼십대의 모습이다. 이제 그 때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든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꿈을 꾼다. 어머니가 산모퉁이를 돌아 치마 속에 꼬리를 감춘 채 나를 쫓아오는 꿈. 10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날의 내가 어둠 속에서 나를 쫓아오는 어머니의 모습을 한 꼬리가 긴 짐승에게 쫓기다가 어느 순간 어머니의 모습은 현재의 내가 되고, 어른이 된 내가 또 어린 시절의 나를 쫓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함해 두 번의 이혼을 했다. 그 뒤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의 동거를 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고향 근처의 암자에서 공양주로 지내다가 얼마 전에 관절염이 심해져서 입원을 했고,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다. 다시 암자로 돌아가시게 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왜 그런 꿈을 반복해서 꾸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 무렵에 읽었던 동화책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밤 외출이 잦았던 어머니에 대한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꿈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머뭇거렸다. 나를 쫓아오는 것이 어머니인지 짐승인지, 어머니가 나를 두고 떠날 지 데리고 갈 지, 내가 먼저 가출을 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 결정을 내리지 못 했던 것처럼 머뭇거리다 보면 어느 새 어머니가 내 앞에 와 있고는 했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꼬리를 보고서야 도망을 치려 하면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쫓김의 순간들. 어쩌면 어머니와 내가 지금껏 여느 딸들처럼 살가울 수 없는 것도 그 꿈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꿈을 꾼 다음날에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머리를 빗어달라고 등을 보이며 돌아앉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제 나를 버리고 떠날 지 모르는 어머니, 아버지 이외의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어머니를 산모퉁이 저편으로 밀어냈던 것인지 모른다. 동구 밖 산모퉁이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삶 저편의 세계였었다. 아기들의 돌무덤들이 많은 그곳의 참꽃은 유난히 붉은 빛을 띠었고, 늦은 밤 그곳을 지나쳐 온 사람은 헛소리를 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또 멀쩡하던 사람이 홀연히 그곳으로 가서 목을 매거나 떨어져 죽기도 했었다. 그런 산모퉁이를 돌아 나를 쫓아오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꼬리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아픈 다리로 암자에서 지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른 척하게 만들었다. 어머니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계시다는 이야길 듣고 딱 한번 찾아가 함께 살자는 말을 했을 때 어머니는 앞뒤 없이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서는 그만이었다. 치료를 위해 서울로 병원나들이를 하더라도 내게 연락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병원에 있는 이모를 통해 소식을 듣는 게 고작이었다.
준혁도 지금 그런 꿈을 꿀까? 내가 긴 꼬리를 달고 자신을 쫓아오는 꿈을. 내가 쫓기는 꿈을 꾸며 두려움을 느끼고 어머니와 점점 멀어졌던 것처럼 준혁도 내게서 그렇게 멀어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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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네에 들러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데 아파트 입구가 번잡스럽다. 사람들이 모여서 아파트 현관을 기웃거리거나 1층 베란다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다. 배수관에 문제가 있어 반상회에서 계속 이야기기 나오던 터라 공사를 하나보다 생각하고 올라가려는데 같은 층에 사는 여자가 아는 척을 한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를 끌며 목소리를 낮춘다.
“자기 들었어? 이 집에서 유골이 나왔다네. 2년 전인가 이집 여자 실종됐었잖아.”
나는 이 집에서 살았던 여자를, 2년 전에 실종된 그녀를 안다. 단독주택도 아니고 아파트에서 어떻게 유골이 발견됐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2년 전에 실종된 그녀는 아닐 것이다. 그녀라면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명예퇴직을 한 뒤 아내를 의심하는 폭력적인 남편이 싫어서 집을 나간 것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녀는 그랬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한다.
“경찰이 나와 있으니까 조사하면 알게 되겠지? 아무튼 무서워. 소름 끼치는 일이야.”
나는 유골이 나왔다는 안방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가구들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어지럽게 널려있고 여전히 흙이 파헤쳐진 채로다. 유골은 인부들이 배수관 공사를 위해 베란다를 파다가 발견해서 신고를 했고 경찰에서 나와 유골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고 한다.
“무슨 일이야?”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며 어머니가 묻는다. 나는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과 그녀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머니와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그녀 이야기를. 그녀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가끔씩 반상회에 참석해서도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다가 가곤 했다. 단지 내에서 여자와 특별히 친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해가 질 무렵이면 고양이를 안고 1층 베란다에 나와 서 있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외출해서 돌아오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그녀를 보게 되었고, 차에 실어 집까지 가져다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와 가까이 지내게 됐다. 차를 마시러 그녀의 집으로 우리 집으로 오르내리는 사이가 됐고, 자연스럽게 함께 마트에 가거나 쇼핑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문화센터 등록을 하게 된 것도 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등록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막상 문화센터에 가자 선뜻 사진 강좌를 선택해 등록을 했었다. 나는 영어회화를 등록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으나 그녀는 열심히 사진을 배우러 다녔다. 그 뒤론 그녀가 문화센터 가는 날 외에도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고, 자연히 그녀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어쩌다 여자가 차를 마시러 오라고 해서 내려가면 자신이 찍어 온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고는 했다. 갈대 속에서 알을 품고 있는 청둥오리와 쇠오리,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까지 아파트는 그들의 집단 서식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집안에는 먼지가 쌓여갔고 남편과 다투는 일도 그만큼 많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사진촬영을 그만두지 않았고, 결국엔 야외촬영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여러 날 보이지 않다가 결국 남편이 실종신고를 했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런 결론을 내렸었다. 그녀는 새를 따라간 것이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다가 늦게 시작한 사진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함께 간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속해 있는 동호회 사진 전시회에 갔다가 그곳에서 선생이라는 남자를 소개받은 적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남자에게서 그런 분위기를 읽었다. 물론 내 추측이고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그녀보다 좀 더 나이가 어리고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어서 주변에 그녀와 같은 제자들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녀에게 그 남자는 특별한 존재임을 직감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그녀가 현상한 사진들을 펼쳐놓고 그것을 찍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새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첫아이를 가슴에 안고 눈을 맞출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고 감격해 하던 그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그렇게 떠나간 것이다. 그런데 집 안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유골이 그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외부인이라면 언제 가족이 들어올 지 모르는 상황에서 땅을 파고 시체를 묻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밖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만약에 그녀의 남편이라면 어떨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부부싸움이 잦은 편이긴 했지만 다투다가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집에 그것도 안방 근처에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묻고 태연히 잠을 잘 수 있을까? 2년이 넘도록.
“집 나간 여편네라고 해도 자식새끼가 어찌 사는 지 궁금해서라도 연락할 낀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면 살아있다고 볼 수가 없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전화 한통 없을 리가 있어? 그것도 너랑 친했다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그녀가 2년 동안 한번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골이 그녀라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내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주길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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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이다. 화요일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커피잔에 밥을 푸고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깬다. 그를 만나던 시간이 고스란히 공백으로 남는다. 학원을 가려는 준혁을 앞세워 양재천으로 나선다. 어머니도 나도 운동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댄다.
봄밤이다. 바람에는 싱그러움과 향기가 묻어있다. 비가 내려서인지 시야가 맑다. 가로등 불빛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산책로에는 부부나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는 풍경이 자주 눈에 띈다. 자전거를 타거나 마라톤 옷차림으로 달리는 사람도 많다. 중간중간에 설치된 운동기구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준혁인 여자친구 없어?”
“귀찮아요. 친구들 이야기 들으니까 별로 사귀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너 또래는 한 사람도 없다야.”
“다들 학원에 있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머니랑 나란히 산책하러 나오는 것이 어색하다고 아들이 학원을 빠지도록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강아지 두 마리가 목줄도 없이 주인을 앞서 준혁을 쫓아온다. 준혁이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털이 탐스럽다. 그러다 강아지가 갑작스럽게 짖기 시작한다. 돌아보니 추리닝 차림의 여자가 고양이를 안고 있다. 강아지는 고양이에게 덤빌 기세로 껑충거린다. 무엇이든 물어뜯을 기세다. 준혁이 놀라서 일어선다.
“꼴에 지도 개라고 고양이 보고 짖네.”
휴대폰에 문자가 들어온다. 액정화면에 뒤를 돌아보라는 메시지가 뜬다. 집을 나서면서 휴대폰을 두고 오지 못한 것은 그를 의식해서였다. 잘 지내느냐는 문자를 받고 산책을 나갈 거라는 답장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서 있다. 양복차림이다. 준혁이 산책로를 벗어나 징검다리 쪽으로 뛰어가고 있다.
“준혁아! 할머니 모시고 들어가. 영주 아줌마가 많이 아파서 가봐야 해.”
나는 아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선다. 어머니가 내 팔을 잡는다.
“꼭 가야하는겨?”
가슴이 막막해진다. 어머니는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당신도 그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러면 알겠네. 제발 놔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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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준혁의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있다. 직접 마트에 다녀와서 화전을 굽기 위해 익반죽을 하는 중이다. 전기 후라이팬에 굽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나는 청소기를 들고 어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여는 순간 이상한 냄새가 난다. 단순히 노인네 방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자 냄새는 곧 사라진다. 방석이나 보료에 코를 대 보지만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는다. 방 한쪽에 놓여있는 종이상자가 눈에 띈다. 어제까지 없던 것이다. 상자를 열자 조금 전의 그 냄새가 맡아진다. 여러 겹으로 말아진 비닐을 풀자 실타래 같은 것이 나온다. 그것은 실이 아니라 동물의 꼬리다. 회색의 털을 가진 두 개의 꼬리를 서로 엉키게 엮어놓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개와 고양이의 꼬리임을 직감한다. 그 순간 여자의 유골이 떠오른다. 옷도 입지 않고 음모와 체모까지 면도가 된 채 가슴뼈와 골반뼈가 서로 엉켜 있었다는 그녀의 유골이 마치 눈으로 보는 느낌이다. 어딘가에 꼬리가 잘린 고양이와 개가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토악질이 치민다.
“도대체 이게 왜 여기에.”
어머니는 보름 가까이 병원에 있었고, 수술 뒤엔 곧장 집으로 와서 내내 나와 함께 지냈다. 어머니가 이것을 어떻게 구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보니 낮에 어머니 앞으로 택배가 왔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어머니는 택배를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었다. 이제야 짐작이 간다. 어머니가 왜 이것을 구했는지 알 것 같다. 개와 고양이의 꼬리. 민간요법이다. 남녀를 서로 헤어지게 만드는 비법.
소쿠리에 꽃잎 대신 참나물 이파리를 올린 화전이 소복하게 담겨있다. 찜솥에선 향긋한 쑥냄새와 함께 김이 오른다. 내가 좋아하던 쑥범벅이다. 새순이 막 돋기 시작한 쑥을 뜯어 쌀가루에 묻혀 쪄두면 수시로 집어먹었던 기억이 난다. 화전과 쑥범벅은 준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이걸 누가 다 먹어? 다리도 성치 않으면서. 진작 이렇게 좀 하시지.”
울컥 눈물이 치받친다. 하지만 내친 걸음이다. 비닐봉투를 흔들다 보니 두 개의 꼬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꼬리 하나가 내 발등을 덮는다.
“이건 또 뭐예요. 내가 누구처럼 이혼이라도 할까 봐. 난 안해. 안 한다구.”
“엄마 왜 그러세요?”
준혁이다. 흥분해서 아들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어머니가 꼬리를 챙겨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제 방으로 돌아서는 준혁의 눈엔 눈물이 가득하다.
*
어머니는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속이 좋지 않다며 아침식사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서랍장을 열어 속옷들을 정리한다. 그를 만나면서 하나둘 사들인 속옷들은 색깔과 장식이 화려한 것들이다. 속옷마다 기억이 문양처럼 새겨져 있다. 시간과 장소와 느낌까지 되살아난다. 나는 속옷을 꺼내 가위로 자른다. 끈으로 레이스로 이어진 속옷은 쉽게 끊어지고 잘려나간다. 달콤한 기억도 끊어내야 한다. 아직도 내게 어떤 환상이 남아 있다면 그것도 함께 잘라내고 끊어내야 한다.
쓰레기를 버리고 오다가 1101에서 나오는 형사를 만난다. 그가 경비실을 비롯해 주변을 탐문하는 것을 보면서 형사가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 1101호 여자와 내가 친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의 전시회 팜플렛을 내민다. 거기에는 회원들의 작품이 각자의 사진과 함께 실려 있고, 또 그 남자의 사진이 인사말과 함께 맨 앞 페이지를 채우고 있기도 하다. 형사가 적어도 그 남자의 존재를 알았으면 싶어서다. 내가 설명하지 않더라도 범죄의 현장에서 단련된 육감으로 그녀와 그 남자의 관계를 눈치채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 공평하다. 뭐가 공평해지는 것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녀의 남편과 그 남자가 그녀의 삶에 미친 영향, 혹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 아니면 유골에 담긴 진실, 그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다. 그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이다.
“사진 찍으러 다녔어요. 실종되기 전 남자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랬겠죠? 하지만 이젠 필요 없게 됐어요. 국과수 결과가 나왔는데 유골만으로는 누군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네요. 혈액이나 머리카락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게 면도가 된 상태였으니 누군지 알 수가 없게 됐어요. 유골이 누군지 알 수가 없으면 범인도 없는 거죠. 유골이 누군지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거겠죠.”
형사가 돌아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암자로 왔다. 절로 돌아가겠다며 택시를 불러달라는 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 없어 함께 나선 걸음이다. 인기척을 듣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 중년의 여자가 부엌에서 나온다. 어머니 대신 온 공양주라고 한다. 여인이 한과와 찻물을 준비해 갖다 준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1초에도 120가지의 생각이 흘러가고 있어요. 그것을 흘러 보내지 못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업이 생기게 돼.”
나는 금붕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시고 삼키는 것의 리듬이 깨지면서 코로 물이 넘어간다. 기침이 난다. 참으려니 더 크게 터져 나온다.
“티벳에 가고 싶은데 먹는 것 때문에 갈 수가 없어. 하루 두끼 식사가 전부인데 배가 고파서 수련을 할 수가 있어야지. 보살은 배고파 봤어요?”
스님의 눈에는 속가의 사람들 모두가 어리석어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그저 무지한 중생이 되어 있다.
“메인데 없이 묵상하는 것은 좋은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돼.”
티벳을 모르는 나는 그런 스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40년을 수행하신 분이다. 하루 세끼 밥에 수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여유 때문에 수행을 망설인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늘 허기를 느꼈던 것도 같다. 어머니를 이해하고 화해하지 못한, 남편과 아들과 좀 더 친밀하지 못한 허기. 그리고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에 대한 허허로움이 나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왔을 것이다.
“다 잘 될거야. 기도할게.”
“몸조심 하세요.”
어머니와 헤어져 암자를 나선다. 따로 부엌일을 하는 분이 계셔서 다행이다. 당신의 남은 재산을 기탁하고 마지막 거처로 정한 곳이다. 그리 많은 재산은 아니어도 어머니가 마음 편히 지낼 수는 있으리라.
나는 암자를 벗어나면서 창밖으로 휴대폰을 버린다. 머리 속엔 어떤 번호도 남아있지 않다. 따로 수첩에 기록해두지도 않았고 명함은 버린 지 오래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1층에 이삿짐 차가 서 있다. 1101호가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막 집을 나서려는 둘째딸과 마주친다.
“이사 가니?”
“예. 멀리 가요. 아주 멀리.”
*
저녁을 먹고 남편과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선다. 아카시아향이 짙다. 오래 운전을 했는데도 허리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곧 남편은 리비아로 떠날 것이고 나는 또 혼자가 된다. 남편의 손을 잡는다. 징검다리를 건너고 오두막을 지난다. 흰색 건물이 하천을 등지고 있다. 카페 같기도 하고 갤러리처럼도 보인다.
“여긴 뭐야? 자주 왔어도 처음 보네.”
“수질 정화시설. 자갈을 이용해 자정작용을 인위적으로 높이는 방법인데, 미생물이 오염물질을 먹이로 먹어서 물과 탄산가스로 분해하도록 하는 거야.”
오염되어 죽어가던 하천이 새롭게 복원된 것처럼 내 안에도 자정력이라는 게 있으리라. 때로 나쁜 세균에 감염되고 오염되더라도 스스로를 회복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봄밤의 양재천은 평화롭다.
“할머니들이 산책을 많이 나온다네. 한 할머니가 여기서 수백억 재산을 가진 영감님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그 영감님이 죽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바람이 인다. 꽃잎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어린 아이도 일흔을 넘긴 노인의 가슴에도 바람이 일 것이다. 도시에는 온통 바람 이야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누군가의 가슴에는 사위어가던 불꽃이 일어서고, 어딘가에서는 그 불똥으로 재가 되어 쓰러지기도 할 것이다. 바람은 그렇게 변화무쌍한 비를 몰아오고 누군가의 삶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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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연 196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2007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