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언덕 너머
권채운
쾅쾅 울리는 포탄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소리는 더 크게 울렸다. 혼이 빠질 지경이었다. 눈을 도로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석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인데 하필이면 전쟁영화를 할 건 뭐야. 다른 거 보자. 왜 이래? 한참 재미나게 보는 걸. 내가 리모컨을 잡자 남편이 화를 냈다. 리모컨은 언제나 남편 차지였다. 나는 머쓱해져서 방으로 들어와 버렸지만 잔뜩 볼륨을 올려놓은 티브이TV소리는 온 집안을 뒤흔들었다.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와서 남편 옆에 앉았다. 추석명절이라지만 아들내외는 추석날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처갓집으로 줄행랑을 놓아버려서 평일보다도 더 쓸쓸했다. 엄마, 이번 추석에도 송편 만드느니 뭐니 하고 또 부산떨어서 우리 와이프 스트레스 줄 거면 추석날 아침에나 갈 거야. 추석을 며칠 앞두고 전화를 해서 엄포를 놓던 아들 녀석 때문에 이번 추석에는 송편도 빚지 못했다. 결혼한 지 삼년 만에 불임클리닉을 통해서 어렵사리 아기를 가진 아들이 유난을 떨 만도 하다고 이해를 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요즘 세상은 어떻게 된게 자식이 상전이다.
남편의 오디오 취향으로 설치해 놓은 홈시어터는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50인치 피디피PDP 벽걸이 화면도 영화관을 방불케 한다. 나는 전쟁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가 돌아가고 가슴에 동통이 온다. 나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형제의 부대는 형의 혁혁한 전과에 힘입어 태극기를 휘날리며 북진하고 있다. 포로로 잡힌 적군은 서울에서 형하고 같이 구두닦이 하던 소년이었다. 꾀죄죄한 포로는 의용군으로 끌려왔노라고 했다. 의용군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소년이 주인공의 총에 맞아 쓰러지기까지 나는 소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추석 전날부터 폭우를 퍼부어서 티브이TV뉴스거리를 제공하던 구름을 품은 하늘이 태풍을 몰아오고 있다는 일기 예보다. 추석날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런 비 피해를 입지 않은, 덩그러니 높은 33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풍경이 흐뭇할 법도 하건만 마음은 왜 이렇게 뒤숭숭한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내린 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포탄이 터졌다. 꾹꾹 누르고 단단히 단속을 해서 이제껏 숨 한 번 쉬지 않고 묵묵하던 내 속의 무엇이 자꾸 나를 단근질했다. 나는 단골로 다니는 한우전문점에서 사골을 하나 사와서 푹 고았다.
왜, 또 어디 여행가? 남편이 내 눈치를 살폈다. 응. 또 어딜? 응, 어디 좀 가려구. 나도 같이 갈까? 됐네요. 당신하고 하루종일 붙어있는 게 싫어서 피난가는 거니까 집이나 잘 보구, 그 좋아하는 티브이TV나 실컷 보셔. 당신한테 리모컨 줄게. 아이구, 무슨 애틋한 정이 그리 많다구 이러셔. 이제는 당신도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된다구요. 누가 먼저 갈지 아무도 모르잖우. 혼자 장봐다 밥도 척척 해 먹구, 병원에도 혼자 다니구, 어린애모양 언제까지 마누라 치마꼬리 잡고 다닐거유?
정년퇴직하고서 연금생활자가 되고나서부터 남편은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갱년기를 거치면서 여자는 남성호르몬이 많아지고 남자는 여성호르몬이 많아져서 남녀 구분이 없어진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곰국이 싫으면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밖에서 끼니 해결하구랴. 나는 한 이삼일 남해 쪽으로 여행가니까. 당신 차로? 남의 차 타면 멀미하는 거 알면서 그래? 운전 조심해. 순발력 떨어진거 명심하고. 나이 생각 않고 냅다 달리다가 아무거나 들이받지 말구. 아주 악담을 하슈, 악담을. 좁쌀영감 아니랄까 봐 잔소리는…….
씩씩하게 집을 나섰지만 가슴은 사뭇 떨려왔다. 나는 자꾸 망설여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도 가지 못 하면 영영 고향에 가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떠난 이후로 그쪽으로 갈 일이 있어도 굳이 피해가던 고향이었다. 음성휴게소를 지나고 십여 분 달리자 오른쪽 시야에 산봉우리 두개가 들어왔다. 봉화산과 문화산. 6·25때 격전지였다. 남산골은 봉화산자락 아래 대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이었다. 해저물녘이면 사립문에 기대서서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남들이라구 다 도망오는데 저 혼자만 도망도 못 오는 바보 천치.
아버지는 의용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남산골 열두 가구의 아버지들은 국군이 아니면 괴뢰군이었다. 우물쭈물하다가 피난을 못 간 사람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북쪽 군대에 끌려갔고, 피난갔다 온 사람은 돌아오기가 무섭게 국군에 징집되어 마을을 떠나야 했다. 밤마다 어린 나를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고 울던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재가했다. 시름시름 앓던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의논한 끝에 서울의 먼 친척집에서 나를 데려가기로 했다. 열한 살 되던 해였다. 밤새 울며 떼를 쓰기도 하고, 입을 꼭 다물고 굶어 보기도 했지만 내 응석을 받아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를 찾아가야지. 할머니가 돌아가신걸 알면 어머니가 나를 거두어줄 것만 같았다. 나는 물어물어 어머니를 찾아갔다. 높은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야 하는 아주 깊은 산골이었다. 산골마을에는 해가 일찍 졌다.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고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동네 초입에 가장 큰 마당이 있고, 바깥마당에 큰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했다. 나는 한달음에 그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불쑥 사립문을 들어 설 수는 없었다. 나는 생울타리 틈으로 마당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였다. 뒤미처 지게 작대기를 든 남자가 쫓아나왔다. 남자는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사정두지 않고 작대기를 휘둘렀다.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달아났다.
한 이십 년 전이었던가. 이산가족찾기로 전국이 들썩였던 때가 있었다. 6·25특집으로 시작했던 그 티브이TV 프로그램은 그해 여름을 펄펄 끓어 넘치게 하고도 끝을 맺지 못했다. 나는 만사 제쳐놓고 티브이TV 앞에 붙어살았다. 혹시나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내 아버지가 나를 찾지나 않나 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커녕 그 비스름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왜,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남편이 물었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아니, 재밌잖아. 나는 나를 부엌데기로 데려갔던 친척집에서 이웃집에 양녀로 입양시키는 바람에 성이 바뀌었고, 지금까지도 그 집 딸 노릇을 착실하게 하면서 과거사는 감쪽같이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눈물과 통곡과 안타까움으로 얼룩지던 방송도 끝이 나고 미처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적은 쪽지들이 여의도 방송국 주변에 장을 선다더라고 했다. 나는 매일같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그길로 여의도로 내달았다. 땡볕 속에서 빌딩 벽에, 가로수에, 남의 간판 위에, 붙일 수 있는 모든 곳에 붙어있는 사연들을 일일이 찾아 읽었다. 어머니였다. 틀림없는 어머니가 나를 찾고 있었다. 바글바글하게 지져 붙인 파마머리에 한 쪽 칼라가 삐딱하게 올라간 누런 블라우스를 입고 잔뜩 긴장하여 입을 꾹 다문 사진은 방송국에 제출하려고 급하게 찍은 것 같았다.
김입분,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교성리 남산골에 살던 딸 이미숙을 찾음.
나는 황급히 그 쪽지를 떼어 핸드백에 쑤셔 넣었다. 사진 속의 어머니가 그토록 초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머니를 찾아나섰을는지도 모른다. 혼자만 잘 살겠다고 시집가더니 이제 와서 찾기는 왜 찾아? 며칠 잠을 못 잤던 기억밖에 없다. 나는 애써 어머니의 모습을 지웠다.
읍의 어디에도 눈에 익은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선 거리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닷새마다 장이 서던 큰길이 이렇게까지 좁았던가.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장에 가는 게 그 시절의 가장 큰 나들이였다.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간 곡식 자루를 장터에 들어서기도 전에 말감고에게 빼앗기듯이 넘기고 나서 장거리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구경만 할뿐 자반고등어 한 손도 사지 않은 어머니는 잡화점에서 내 공책과 연필을 사가지고 돌아오곤 했다. 화장품 할인점 앞을 지나갔다. 어머니와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맡아보던 동동구리무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딱 한 번 장터에서 외할아버지와 맞부딪쳤던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동동구리무를 사서 어머니 손에 쥐어주고 떡장수 좌판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떡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외할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을, 어머니는 김치국만 훌훌 마셨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도 구리무를 바르지 않고 뚜껑을 열어 냄새만 맡고 도로 닫아 놓았다. 어머니가 시집 갈 때 그 구리무를 가지고 갔는지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따져 보니까 어머니 나이 그 때 스물여섯이었다. 새파란 나이에 홀로된 딸을 바라보아야 하는 외할아버지의 마음은 안타깝기도 했을 거였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던 나를 떼어버리고 어머니를 시집보낸건 할머니였다. 한 집안에 두 과부가 살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거였다. 어미를 원망 말거라. 너는 내가 있으니까 할미를 어미삼아 살면 되지만 구만리 같은 네 어미의 청춘을 어쩌겠니. 할머니가 다독거렸지만 나는 그저 나를 버리고 시집가버린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시대가 시대였으니 학교에 가면 아버지 없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재가한 아이는 나 하나였다.
아주 깡그리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읍내에 들어서자마자 오랜 마술에서 풀려난 듯 나는 심술궂은 어린 아잇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동네는 바뀌었어도 동네이름은 예전 그대로였다. 새벽밥 먹고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에 다녔던 달구지 길은 말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산을 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시집가 살던 동네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울며 넘던 그 멀고도 높았던 고갯길도 포장되어 얼마 달리지 않아 마을 입구에 감나무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보였다. 마을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 세워놓는 게 유행인 모양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워두고 감나무가 서 있던 집을 찾아보았다. 감나무골 다웠다.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었다. 감나무마다 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동네 초입의 그 덩그렇던 초가집이 어느 집이었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모르겠어서 하릴없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 찾아온 거유? 그냥 돌아갈까 어쩔까 망설이고 서 있는데 마을회관에서 노파가 나오면서 말을 건넸다. 저기, 바깥마당에 큰 감나무가 있고, 어린애가 있던 집인데……. 언젯적 얘기래유? 동네 이름이 감나무골아뉴. 감나무야 읍는 집이 읍구, 요새야 어린애가 있는 집이 드물지만서두 예전에야 집집마다 어린애가 있었지유. 여그 살던 사람 이름이 뭐래유? 내가 이 동네루 시집 와서 산 지가 갑년이 지났으니께 엔간한 사람은 이름만 대면 알틴디유. 저, 저……. 입안에서만 맴돌 뿐 어머니의 이름은 얼른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하면 어쩔 텐가. 할머니는 재촉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김입분이라고 나이가 칠십은 넘었을 텐데요. 바느질 솜씨가 좋았는데……. 김이뿐, 김이뿐이라……. 맞어, 남산댁 이름이 김이뿐이었어. 그 때, 이산가족찾기할 때 우리 아들이 이름을 써 줬지. 사진관에 같이 가서 사진두 박아주구. 아세요? 나는 바짝 다가들었다. 옛날에 이사 갔어. 이사간 지 한 사십 년도 더 됐을 걸. 나하고 둘도 없는 동무여. 시집와서 아들을 둘이나 낳고 그런대로 잘 살았지. 그런데 그만 홍역이 돌아서 한꺼번에 그 둘을 다 잃고 지랄 맞던 남편까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어쩌겠수, 이 산골에서 혼자 사느니 읍내로 나가서 바느질품이라도 파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등을 떠밀었다우. 지금은 남산골에 살아유. 나도 누가 데려다나 줘야 그이를 만나러 가는데, 참 그이 본 지도 한참 됐네. 떼놓고 온 딸 한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라 눈물께나 짜곤 했었는데, 근디 댁은 뉘슈? 어디 봐유. 쬐끔 닮은 것도 같으네. 아줌니가 혹시 그이 딸이우? 예? 딸이라니요? 아니에요. 근데 무슨 볼일이시우? 할머니는 나를 아래위로 짯짯이 훑어보며 다그쳤다. 이 동네를 지나다가, 아니 누구 부탁을 받고……. 나는 우물거리며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마을회관 앞에 우두망찰하여 서 있는 노파의 모습이 백미러에 담긴 채 나를 따라왔다.
날 버리고 시집갔으면 아들 낳고 딸 낳고 잘이나 살 것이지. 박복하기로 치면 어머니가 나보다도 윗길인 모양이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다. 그러게 모르고 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쩌자고 어머니를 찾아 볼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제 와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버릴까. 달리다보니 읍내였다. 남산골을 지나쳐버렸던 것이다. 어릴 적에는 한나절 길이었던 것이 자동차로는 금방이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을 찾아들었다. 맥주라도 한잔 마시지 않고는 속이 가라앉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식당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맥주부터 한 병 청해서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나는 듯했다. 나이 먹은 게 좋은 건 이렇게 혼자서 식당에 들어와 맥주를 마셔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 주인은 티브이TV에 눈을 박고 있다.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백골이 되어 모로 누워있던 젊은 육신. 어느 이름모를 산골짜기에서 아무 명분도 이념도 없이 총알받이가 되어 백골로 누워있을 내 아버지의 원혼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을까. 갓 태어난 아이의 꽉 쥔 손에 자기의 새끼손가락을 집어넣어 보고, 아직도 부끄럼을 타는 각시의 볼도 쓰다듬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은 영화 속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나를 건드린다. 이제까지 수많은 전쟁영화를 보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마음이 떨린 적은 없었다. 영화를 그만큼 잘 만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늙은 탓일까. 아무래도 자기 인생을 돌아볼 나이가 되어버린 탓임에 분명하다. 내 아버지는 청년인 채로 있는데 나는 아버지 나이의 세 배, 아니 네 배까지도 살아있을지 모른다.
오로지 원망만으로 서러움을 덮어버렸던 그악스러웠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새삼스럽게 가슴이 저리다. 어린 것이 저렇게 모지락스러우니 팔자가 그 모양이지. 어른들은 내 등 뒤에서 혀를 찼다. 나를 데려갔던 친척집에서 양녀로 입양되기까지 나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도대체 눈물이나 짜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친척은 내게 하루종일 일을 시켰다. 겨우 코흘리개를 면한 열한 살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짓고, 청소하고, 아이보고, 틈틈이 심부름하고, 물 길어다 빨래하고, 손등은 터서 피가 흘렀다. 팔자가 나쁜 사람은 고생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 팔자 또한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이가 없던 이웃집에서 나를 입양했다. 나를 입양시키자마자 친척집에는 알리지 않고 이사를 했다. 다시 학교에 들어갔고, 나는 억척스레 공부해서 양부모를 흐뭇하게 했다. 나는 새로운 인연에 힘입어 평탄하게 성장하고 결혼하고 나이를 차곡차곡 쌓아왔다.
어머니도 새롭게 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자면 자식을 떼놓는 것쯤은 감수해야할 고통이었으리라.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생각으로는 다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몸은 이해를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나는 늘 자식의 입장에서, 버림받은 입장에서만 생각해왔다.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 나이의 곱절을 먹도록 한 번도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에 벽보로 붙어 있던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을 단번에 구겨버렸던 것은 가까스로 이룩한 내 가정에 어머니가 틈입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벽보에서 보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무덥던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여의도를 헤매고 다녔던 것도 내 혈육을 찾겠다는 일념보다는 다만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랬을 뿐이었다. 아무도, 설혹 그가 내 친부모라고 할지라도 나는 내 가정의 울타리에 들여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잊을만 하면 한번씩 티브이TV 화면을 통해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게 된다. 그 때마다 북한의 어디엔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내 아버지의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버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아버지나 나나 다 산 마당에 만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된장찌개가 나왔지만 몇 숟갈 뜨다 말고 식당을 나왔다. 세월이 흘러 많이 변했다고는 해도 지방소읍의 기본도로는 크게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단층이었던 교사는 사층으로 바뀌었지만 측백나무 생울타리를 둘렀던 운동장은 여전했다. 운동장 둘레에 서 있던 나무들도 아름을 넘기며 굳건히 서 있었다.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입학식 하던 날은 봄날씨답지 않게 쌀쌀했다. 나는 뒤에 서 있던 어머니를 자꾸 돌아다보았다. 흰 저고리에 검정통치마를 깡동하게 받쳐 입은 어머니는 돌아보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 저었다.
나는 책보를 허리에 두르고 종종걸음 쳤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남산골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에서 어머니는 나를 기다렸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어머니와 같이 등교했다가 어머니와 같이 하교했다. 하루라도 결석을 시키지 않으려고 어머니는 툭하면 엉덩이에 뾰루지가 났던 나를 업고 학교를 오간 적도 있었다. 나 하나밖에 모르던 어머니였다.
길가에는 쑥부쟁이의 보랏빛 꽃이 한창이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는 동안 갖은 꽃을 섞어서 화환을 만들었다가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어서 속히 통일이 되고 아버지만 돌아와 준다면 아무 근심걱정이 없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따금씩 자동차가 지나갈 뿐 시골길은 한적하다. 119구급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나를 앞질러 갔다. 위급한 사람이 저 언덕 너머에서 구급차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야트막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읍내의 풍경이 한 눈에 잡혔다. 저 멀리 외곽 쪽에는 울을 두르듯이 고층 아파트가 건축 중에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우리 반 아이들 집에서는 거의가 농사를 지었다. 어쩌다가 한둘이 아버지가 공무원이나 선생님이었는데 그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에게 특별대우를 받았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고층 아파트 말고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건물이 없는 걸보니 읍내는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기는 농사짓는 사람들도 아파트의 편리한 삶을 동경할 것이다. 도시 사람의 눈에 보기 좋으라고 시골풍경을 고집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시골에 살라고 하면 불편해서 한 달도 못 살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남의 말 할 것 없이 나부터가 그럴 게 뻔하다.
한적한 시골길이라고는 하지만 걸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시골사람들도 요즘에는 다들 차를 타고 다니는 모양이다. 놀다 쉬다 하면서 집으로 가는 길이 한 시간씩 걸렸으니까 쉬엄쉬엄 걸어도 한 삼십 분이면 남산골에 이를 것이다.
세월도 고갯마루를 깎아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어머니가 기다리던 고갯마루가 아득하니 높다. 비가 그치고 나서 한결 싸늘해진 날씨를 대비해서 바바리코트까지 챙겨 입었더니 등에 땀이 찼다. 나는 바바리코트를 벗어들었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차를 타고 올 걸 그랬나. 어쩐지 어머니를 맞대면 한다고 해도 그냥 돌아서 나올 것만 같아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고갯마루에 서니 예나 다름없이 남산골이 한 눈에 들어왔다. 봉화산을 뒤로하고 양지쪽에 자리 잡은 남산골은 아늑해 보였다. 공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동네가 훨씬 커진 것 같았다. 잿빛 슬레이트 지붕 사이로 더러더러 새로 지은 듯한 양옥집의 슬래브 옥상도 보였다. 내가 살던 집도 새 주인이 허물고 다시 지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기운이 빠졌다. 바람결에 황금빛 논에서 구수한 냄새가 실려 왔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하늘은 더없이 청량했다.
뜻밖에도 마을 안쪽 맨 끝집이었던 우리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눈을 슴벅이며 우리집 앞에 마냥 서 있었다. 사립문과 바자울이 없어지고 마당을 시멘트로 바른 것 말고는 단정하게 이엉을 올린 초가지붕도 그대로였고, 마당가에 우뚝 서 있던 살구나무도 그대로였다. 살구나무에 매여 있던 그네까지도 그대로 있었다. 영화 세트장에라도 구경 온 기분이 들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집 뒤쪽으로 돌아들어갔다. 키 순서대로 자리 잡은 장독대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개량뚜껑을 덮은 장독이 따끈따끈했다. 장독대에 올라 뚜껑을 열어 보았다. 짠내가 훅 끼쳤다. 간장독이었다. 어여 내려 오지 못혀? 부정 타. 할머니의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빈 채마밭에 가득한 햇살뿐이었다. 장독대 옆의 우물에는 뚜껑이 덮여있었다. 뚜껑을 열어 보았지만 우물 속은 캄캄했다. 두레박 하나도 주위에 없는 걸로 봐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장독대 둘레에다 상사초를 키웠는데 어머니를 시집보내던 해에 그 구근을 모조리 캐내어 거름더미에 버렸다. 어머니가 심었던 꽃이었다. 지금 이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동네 인심이 더 후해진 걸까, 울도 담도 치지 않고 덩그마니 나앉아 있는 초가집은 인기척이 없어 그런지 구석구석 정성스런 손길이 간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찬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나는 하릴없이 툇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마을은 조용했다. 혼자 다 마신 맥주 한 병 탓인지 고갯길을 걸어온 탓인지 노곤했다. 마루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뒤란으로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놓던 어머니의 치맛자락이 어른거렸다.
이를 어쩐댜. 내 집에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퍼질러 앉았었던 개비네. 미안해서 워칙헌대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따스한 햇살에 몸도 마음도 맡기고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지나가다 들렀는데 그만 잠시 졸았나보네요. 집이 제가 어렸을 적에 살던 집이랑 너무나 흡사해서……. 나는 어물어물 말을 둘러대며 일어나 나오려고 했다. 아녀유. 어쨌거나 내 집에 오신 손님인데 찬물이래두 한사발 드시구 가새야지 그런 벱은 없쥬. 노파는 내 팔을 덥석 잡아 다시 마루에 주저앉히고는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돗물 트는 소리에 이어 가스 불 켜는 소리가 나더니 노파가 얼굴 가득히 수줍은 웃음을 띠며 나왔다. 커피 드시지유? 나는 그제야 노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어머니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벌떡 일어났다. 왜유, 커피 안 잡숴유? 그라면 저기, 쌍화차두 있슈. 그걸루다 타오지유 뭐. 어머니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스르르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왜 이 집에 사는가. 나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받은 아이처럼 머리가 아팠다. 어머니는 이십여 년 전의 사진보다 별반 늙어보이지도 않았다. 아니 그 또래의 노인들보다 되레 젊었고 기운차고 어떤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나는 한눈에 어머니를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다. 근 반 백년의 세월이 아니던가. 강산이 변해도 너댓 번은 변했을 세월이었다. 코흘리갯적 모습이 내 얼굴 어디에 남아있을까.
워디, 여기가 고향이시우? 어서 본 듯도 한 얼굴인데, 내가 어서 봤을꾸? 어서 봤더라. 맞어, 테레비에서 봤구먼. 내가 좋아하는 탈렌또하구 똑 닮었네그랴. 고두심이라구 알쥬? 그런 소리 많이 들었을 거구먼. 할머니두,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어머니는 나를 찬찬히 뜯어보는 눈치였다. 나는 차마 어머니를 마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마당가의 살구나무를 쳐다보았다. 나뭇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앉았다가 날아갔다. 들어봐유. 간이 맞을라나 모르겄네. 어머니는 찻잔을 내 앞으로 밀었다. 잔에 가득했던 쌍화차가 출렁이더니 조금 엎질러졌다. 아이구, 이런 주책 좀 봐. 괜찮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얼른 찻잔을 들어올렸다. 쌍화차의 진한 향기에 속이 메스꺼웠지만 꾹 참고 한 모금을 넘겼다. 뜨거운 찻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여간해서 집을 안 비우는데, 저 아랫동네에 다 늙은 총각이 오늘 장갈들었다우. 우리나라 처녀는 아무도 시집을 안 오겠다구해서 애먼 총각만 늙혔지 뭐유. 쉬쉬하지만 아무래도 월남처녀를 사 왔는 갑디다. 까무잡잡해서 그렇지 인물이 좋더구먼유. 인물이 좀 빠지는 처녈 데려오지 않구, 그 인물에 메칠이나 살다가 보따리를 쌀는지 원. 하여간에 그 집 할망구가 어찌나 좋아서 뛰던지 물색없이 같이 뛰다가 이제 왔구먼유. 어머니는 애써 집을 비운데 대해 설명을 하려 들었다. 아니에요, 할머니. 저는 이 집 손님이 아니구요, 지나가다 그냥 들어왔는데 할머님이 자꾸 그러시니 제가 더 미안하네요. 차, 잘 마셨습니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서는 나를 어머니는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갈 길이 바뻐유? 바쁘잖으면 늙은이 말동무나 조금 하다가 저녁 해먹구 가시면 좋겄구만서두……. 아니, 그게 아니구요. 괜히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그냥 이리저리 여행 다니는 중이에요. 그럼 잘 됐구먼유. 좀 놀다 가셔유. 이 동네는 맨 늙은이 판이라 젊은이랑 오랜만에 얘기라두 해보게. 젊은이요? 풋, 난데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할머니, 저두 할머니에요. 곧 손자를 보거든요. 아니, 안적두 새각시 같은데? 새각시요? 할머니두 참. 나는 차마 떨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어머니야말로 내 머릿속에서 영원한 새각시였다. 솜씨가 좋아서 그랬던건지 아니면 기다림의 고통을 견뎌내는 방편으로 그랬던 건지 어머니의 손에는 늘 바느질감이 들려 있었다. 밤중에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면 어머니는 호롱불을 켜놓고 바느질감을 든 채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했다. 가난한 촌살림에 무슨 바느질감이 그렇게 많았을까. 어머니는 삯바느질 집에서 조각헝겊을 얻어다가 잣베개를 만들기도 하고 단추를 엮기도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엄마 그만 자자. 그래그래, 하면서도 어머니는 밤새 호롱불을 끄지 않았다. 호롱불 켜놓는다고 올 놈이면 벌써 왔게? 그놈은 그믐밤에 눈감고도 집 찾아올 놈이여. 어여 불 끄고 자지 못혀? 가끔가다 할머니의 호통소리가 문 밖에서 들리곤 했지만 어머니는 못 들은 척 호롱불을 밤새 켜놓고는 했다.
할머니는 혼자 사세요? 원래 늙으면 다 혼자라우. 자녀들은요? 다 서울에 살어유. 자녀들이 효자신가봐요. 왜, 그래 뵈우? 예, 아주 정정하시고, 얼굴도 편안 하시고, 마음도 넉넉해 뵈시는데요. 자식들한테 폐될까 봐 촌에서 혼자 사시는 거예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지만 나는 뻔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저녁 해먹구 갈 거지유? 아니에요. 저녁은 무슨. 어머니는 내 말에는 아무 대꾸도 않고 느닷없이 저녁을 먹고 갈 거냐고 물었다. 우리집 된장 맛이 일품이라우. 요 근방에서 우리집 된장 맛 못 본 사람은 간첩이라니께. 그렇게 맛있어요? 그러게 한 번 먹어보라니께 그러는구먼. 그럼 파시기두 해요? 아니, 이 사람이 사람을 워치키보구 이려? 나는 아무리 지나가던 사람이래지만 그래두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라 그저 정으루다가 된장찌개나 한 뚝배기 보글보글 끓여서 대접하려구 했던 건데, 서운하구먼 그려. 아니, 할머니. 그게 아니구요. 저희는 된장을 사먹거든요. 아까 뒤란에 보니까 장독도 많던데 할머니 혼자 그걸 다 잡술 것 같지도 않고 해서……. 뒤란 구경까지 했수? 예…….
언제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금방 일어난다고 하면서도 나는 자꾸 미적거리고 있었다. 요새는 이렇게 초가지붕을 유지하려면 꽤 비용이 든다고 들었는데 할머니도 지붕 개량을 하시지 그랬어요? 아녀유. 아줌니두 이 초가지붕 땜에 우리 집에 들어오신 거 아녀유? 돈이야 들지만 다 나 좋아 하는 일이라우. 늙은이라구 시피보지 말어유. 내가 이래뵈두 이 동네에서는 손꼽히는 부자 축에 껴유. 읍내 장터거리에 있는 삼층집에서 나오는 월세만 해두 농사짓는 거에 비할 바가 아녀. 농사야 애써 지어 봤자 어디 종잣값이나 나오나? 바람이 찬데 이적지 한데서 이러구 있었구먼. 누추하지만 들어와유. 그러잖아도 해가 설핏해서 으슬으슬 한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일러의 스위치부터 올렸다. 보일러를 놓으셨나봐요. 거죽만 초가집이지 알맹이야 서울집하고 별반 다르지두 않어유. 부엌두 입식으루다 죄 고쳤는디유. 구부리구 댕기지 않으니께 허리가 들 아프기는 하지만서두 어째 내 집 같지가 않구 어딘지 영 불편하기는 혀. 잠깐 앉아기슈. 내 얼른 밥 안치고 올테니께. 나는 어머니를 따라 일어서려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어머니 입성으로 보나 하는 말을 들어보나 궁색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안 풍경은 나 어릴 적과 달라진 게 없었다. 텔레비전이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을 뿐, 사방연속무늬의 조잡한 벽지를 바른 바람벽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횟대보가 걸려 있었다. 나는 횟대보를 들춰 보았다. 어머니의 외출복 옆에 나란히 비닐에 쌓인 남자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다.
나는 분합문을 열고 윗방을 들여다보았다. 숨이 꽉 막혔다. 어머니가 쓰던 머릿장, 내 앉은뱅이책상, 거울이 달려있던 어머니의 옷장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어머니의 머릿장을, 옷장을 쓰다듬어 보았다. 어찌나 간수를 잘 했는지 전혀 낡은 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림 일기장이었다. 내 이름이었던 이름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상산국민학교 1학년 3반 이미숙. 나는 공책을 들춰보았다. 쪽찐 머리를 한 어머니와 내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웃고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 반짝이는 해도 그려져 있었다. 엄마하고 장에 갔다. 방문 여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서랍을 닫고 일어섰다. 아유, 치우지도 않고 살어서 지저분한데, 거기서 뭐 해유? 얼른 이리 나와유. 나는 도둑질 하다가 들킨 것 같아서 그냥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방문을 잠그지도 않고 다니시나 봐요. 늙은이 혼자 사는데 가져갈 게 뭬 있다구. 이 동네는 다 열어 놓구 살어유. 창고나 잠구지 뭐. 가끔가다 쌀가마니나 고추자루나 시골루 댕기며 노리는 도적놈이 있다구 하 테레비에서 그래싸니께. 그래두 여적지 도둑맞은 집은 읍어유. 그냥 앉아있기가 그러네요. 저도 도울게요. 돕구 자시구 할 것두 읍다는데두 그러시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는 앞장섰다. 향긋한 냉이냄새가 났다. 어머, 된장찌개에 냉이를 넣으셨나 봐요. 냉동실에 얼려뒀던 거라우. 나뭇간이었던 데를 고쳐서 욕실로 쓰고 있었고, 세탁기며 냉장고며 전자레인지까지, 웬만한 전자제품은 다 구비되어 있었다. 이인용 식탁까지 있었다. 압력밥솥이라 밥두 금방 될 거구먼. 윗방에 있는 세간들은 꽤나 오래된 것 같은데 옛날부터 쓰시던 거예요? 웬걸, 그거 모아들이느라고 돈푼께나 날렸쥬. 한 십년 됐나? 내가 여기 들어와 산지가. 눈이 어두워져서 바느질도 못하겠구 해서 내가 살던 옛집이 비어있다기에 거저다시피 사 들어 왔지. 저 구닥다리 물건들두 서울 가서 황학동인가 하는 데부터 안가 본데없이 헤맨 끝에 하나하나 사들인 거유. 예전에 내가 쓰던 것하고 비슷한 걸루 고르느라구 골랐는데, 보기에는 저래 뵈두 골동품값을 줬다우. 골동품에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취미는 무슨, 그저 그러고 싶어 그러는 거지. 거 왜 있잖우, 죽기 전에 한번 해보구 싶은 거. 할머니는 옛날처럼 살고 싶었어요? 글쎄……. 전기압력밥솥에서 소리가 났다. 백미고압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밥이 다 됐다네. 거기 앉어유.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김치를 새로 꺼내어 썰었다. 김치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김치 한쪽을 손가락으로 덜름 집어 입에 넣었다. 와, 맛있네요. 맛나지유? 어머니는 만족한 웃음을 만면에 띄었다. 자, 아- 해봐. 어머니는 새로 김치를 꺼내어 썰 때마다 제일 맛있어 보이는 부분을 내 입에 먼저 넣어주곤 했다. 나는 어느새 무람없이 젓가락부터 챙겨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세 공기나 퍼서 식탁 위에 놓았다. 누구 또 올 사람이 있나봐요? 아녀, 그냥 습관이 돼놔서 그만……. 그 때 불현듯이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집안에 우물을 두고도 어머니가 동네 공동우물에서 새벽에 길어온 물로 정한수를 올리던 부뚜막과 그 위에 내려앉곤 했던 재티, 밥을 풀 때마다 제일 먼저 고봉밥을 퍼서 밥상에 올려놓았던 정경이었다. 의용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목이 메었다. 나는 서둘러 된장국물을 한술 떠 넣었다. 앗, 뜨거. 저런. 어머니가 물컵을 내밀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물을 한모금 입에 물었다. 괜찮우? 아, 네. 괜찮습니다.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꺼내 놓은 밑반찬은 하나같이 맛깔스러웠다. 나는 한껏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 음식솜씨가 보통이 아니네요. 깻잎 장아찌도, 무말랭이도, 어쩜 이렇게 맛있어요? 백화점에 내다놓으면 금세 팔리겠네. 워째 아줌니는 뭘 팔 생각만 하시우? 장사꾼이유? 아니, 아니에요. 하도 맛있어서…….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수저를 들고만 계셨지 내가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도록 내 먹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 이를 어째. 할머니도 어서 드세요. 제가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만. 어찌나 맛나게 먹는지 안 먹어도 내 배가 다 부르구먼. 잘 드셨우? 거 봐, 저녁 먹구 가길 잘 했지? 예…….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잘 쉬고 저녁까지 잘 먹고 갑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꼭 친정에 왔다 가는 것 같네요. 또 와유. 그리구 이거 가져 가시우. 어머니가 검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된장 쬐끔 쌌어유. 먹어보구 맛있으면 또 와서 얻어 가시유. 꼭 다시 와유. 나는 비닐봉지를 받아들고서는 냉큼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 자리에 더 서 있다가는 그예 어머니를 붙안고 울음을 놓을 것 같아서였다.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둘러 선 산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면서 길을 좁히고 있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러서야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니의 집 위에 높다랗게 외등이 켜져 있었다. 얼마나 촉수가 밝았던지 초가지붕은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얗게 빛났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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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운 /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 『겨울 선인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