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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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길을 짜다 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 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

[3] 거울(Mirror)

[최영미의 어떤 시] [3] 거울(Mirro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1.18.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거울(Mirror)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과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중략)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중략)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중략) 내 속에 그녀는 여자아이를 빠뜨렸고, 내 속에서 늙은 여인이 날마다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1932~1963) 1인칭 화자인..

공부할 시 2024.01.26

[175] 오교삼흔 (五交三釁)

[정민의 세설신어] [175] 오교삼흔 (五交三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9.11. 23:30 갑자기 오랜 우정의 절교가 세간의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중국 남조(南朝) 때 유준(劉峻·463~522)의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생각난다. 세리(勢利)를 좇아 우정을 사고파는 당시 지식인들의 장사치만도 못한 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먼저 우정에는 소교(素交)와 이교(利交)의 두 종류가 있다. 비바람 눈보라의 역경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것은 현인달사(賢人達士)의 소교, 즉 변함없는 우정이다. 속임수와 탐욕을 바탕에 깔아 험악하기 짝이 없고 변화무쌍한 것은 제 이익만 추구하는 이교다. 소교가 사라지고 이교가 일어나면서 천하는 어지러워지고 천지의 운행이 조화를 잃게 되었다. 이교는 장사치의 우..

[2] 각자의 진실이라는 궤변

[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2] 각자의 진실이라는 궤변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입력 2022.04.26. 03:00 21세기에 다시 핵전쟁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러시아. 신기하고도 불안한 현실이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편하게 러시아로 관광과 유학을 가고,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에서 사업과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러시아가 이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우리는 유럽 한복판에서 다시 최악의 도시전과 제노사이드(집단 살해)를 목격하고 있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단순히 푸틴이라는 한 정치인이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푸틴의 정책을 철학적으로 ..

김대식의 과학 2024.01.26

필름시대 극장, 폐쇄앞둔 기차역… ‘레트로 감성’ 빠져볼까

필름시대 극장, 폐쇄앞둔 기차역… ‘레트로 감성’ 빠져볼까 문화일보 입력 2024-01-25 09:00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단관극장인 동두천 동광극장. ■ 관광공사 추천 ‘2월 여행지’ 경기 동두천 ‘동광극장’ 60년대 분위기로 현재까지 운영 강원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석탄 중흥기 생활상 그대로 복원 충남 부여 ‘규암마을’ 공예인 모여 한옥·양조장 새단장 대구 군위 ‘화본역’ ‘유물급’ 증기기관차 급수탑 보존 ‘우리 동네 레트로(Retro)’. 한국관광공사가 ‘2월의 추천여행지’ 주제를 이렇게 잡았다. 레트로는 회상이나 추억 등을 뜻하는 영어 Retrospect의 줄임말.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을 그리워하면서 모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은 지겹고, 봄은 아직 먼 2월. 추억에 빠져보는 여행은 어..

시와 소통

시와 소통 박찬일(시인) 1. 시를 상대적 이미지 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두 개는 수용미학상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미시의 창작미학에는 수용미학상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상대적 이미지 시는 문덕수의 말을 빌면 수퍼비니언스 원리의 시이다.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1) ‘물리적 존재’는 토머스 S. 엘리엇이 1919년 「햄릿과 그의 문제들」(1919)이라는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언명한 ‘객관적 상관물’과 같다.김춘수는 상대적 이미지 시와 관념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파울 첼란의 두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첼란의 유명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다음과..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47] 눈 내린 새벽의 종묘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입력 2023.01.06. 03:00 서헌강, 종묘 정전 겨울18412, 2008. 눈 내린 새벽엔 뭘 하면 좋을까. 따뜻한 담요를 뒤집어쓰고 창밖으로 눈 구경을 해도 좋겠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을 마셔도 좋겠고, 아이처럼 집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어도 좋겠다. 여기까진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어떤 사람은 종묘로 가서 사진을 찍는다. 물론 그러려면 많은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새벽도 눈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특히 도심의 눈은 빨리 녹기 때문에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눈이 오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눈밭의 표면이 흐트러지기 전에 촬영을 마쳐야 한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이 새벽에 출입..

[174] 서중사치 (書中四痴)

[정민의 세설신어] [174] 서중사치 (書中四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2.09.04. 23:30 "빌리는 놈 바보, 빌려주는 놈 바보, 돌려달라는 놈 바보, 돌려주는 놈 바보(借一痴, 借二痴, 索三痴, 還四痴)." 책 빌리기와 관련해 늘 우스개 삼아 오가는 네 가지 바보 이야기다. 당나라 때 이광문(李匡文)이 '자가집(資暇集)'에서 처음 한 말이다. 송나라 때 여희철(呂希哲)도 '여씨잡기(呂氏雜記)'에서 "책을 빌려 주는 것과 남의 책을 빌려와서 돌려주는 것은 둘 다 바보다(借書而與之,借人書而歸之,二者皆痴也)"라고 했다. 한번 이 말이 유행한 뒤로 천하에 남에게 책을 빌려주려 들지 않는 나쁜 풍조가 싹텄다. 공연히 귀한 책을 빌려주고 나서 책 잃고 사람 잃고 바보 소리까지 듣고 싶지 ..

[1] 디지털 외로움과 전체주의

[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1] 디지털 외로움과 전체주의 김대식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입력 2022.04.12. 03:00 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고향 독일의 민주주의 몰락과 나치당 집권,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했다. 홀로코스트 기획을 담당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추후 목격하며, 아이히만 역시 너무나도 하찮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악의 평범함’을 주장한 그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남겼다.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체주의는 인간의 외로움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왜 외로움이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일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동물보다 특별히 더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기에 협업만이 인류 역사 대부분에서 생존을..

김대식의 과학 2024.01.23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말을 하자면'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말을 하자면' 입력2024.01.01 04:30110 소설 당선자 김영은 캘리그라피 백연수 우리 모두 형우다. 나는 피켓 문구를 바라보았다. 검정 바탕에 흰 글씨로 쓰인 문구가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 아래에는 정의연대연합 마크가 찍혀있었다. 너는 목이 말랐던지 음료를 단숨에 마셨다. “자기소개서는 잘 쓰고 있어?” 나의 물음에 너는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다. 너는 경쟁률이 높기로 소문난 H신문사에 입사 준비 중이었다. 경기도 본서 생활하는 너는 가끔 나의 자취방에 놀러오기도 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뜸해졌다. 나는 네 소식을 SNS로 자주 접했다. 매번 피드에 올라오는 네 글에선 너의 말투가 그대로 느껴졌다. 단호하고 직설적인 말투. 물론 일상적인 이야..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202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이실비 서울늑대 / 이실비 사랑을 믿는 개의 눈을 볼 때 내가 느끼는 건 공포야 이렇게 커다란 나를 어떻게 사랑할래? 침대를 집어 삼키는 몸으로 묻던 하얀 늑대 천사를 이겨 먹는 하얀 늑대 흰 늑대 백 늑대 북극늑대 시베리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매일 찾아가도 없잖아 서울에서 만나 서울에서 헤어진 하얀 늑대 이제 없잖아 우린 개가 아니니까 웃지 말자 대신에 달리자 아주 빠르게 두 덩이의 하얀 빛 우리는 우리만 아는 도로를 잔뜩 만들었다 한강 대교에서 대교까지 발 딛고 내려다보기도 했다 미워하기도 했다 도시를 강을 투명하지 않은 물속을 밤마다 내리는 눈 까만 담요에 쏟은 우유 천사를 부려먹던 하얀 늑대의 등 네 등이 보고 싶어 자고 있을 것 같아 숨 고르며 털..

‘순이삼촌’에서 만난 제주도 나무 4가지

‘순이삼촌’에서 만난 제주도 나무 4가지 [김민철의 꽃이야기] 김민철 논설위원 입력 2024.01.23. 00:05 김민철의 꽃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4750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대추 모양의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을 많이 보았다. 멀구슬나무인데, 우리나라 남해안과 제주도 민가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나무다. 이 나무를 보니 4·3사건을 다룬 현기영 중편소설 ‘순이삼촌’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서 같은 날 멀구슬나무에 돼지 잡는 이유 소설은 화자가 할아버지 제사에 맞추어 고향 제주에 내려갔다가 순이삼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순이삼촌은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낸 친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