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소통
박찬일(시인)
1.
시를 상대적 이미지 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두 개는 수용미학상 소통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미시의 창작미학에는 수용미학상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상대적 이미지 시는 문덕수의 말을 빌면 수퍼비니언스 원리의 시이다.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1) ‘물리적 존재’는 토머스 S. 엘리엇이 1919년 「햄릿과 그의 문제들」(1919)이라는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언명한 ‘객관적 상관물’과 같다.김춘수는 상대적 이미지 시와 관념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파울 첼란의 두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첼란의 유명한 「죽음의 푸가Todesfuge」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검은 우유”가 표상하는 것은 독가스였다. 유태인 대량학살에 사용된 독가스였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 우유는 ‘유태인 대량학살’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중”은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곳, 그러므로 ‘자유로운 곳’[수용소 밖]을 표상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검은 우유와 공중은 물리적 존재로서,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서 독자와 소통하였다. 혹은 유태인 대량학살과 ‘자유로운 곳’은 물리적 존재로써, 혹은 객관적 상관물로써 독자와 소통하였다고 할 수 있다(검은 우유와 공중이 물리적 존재, 혹은 객관적 상관물이었다). 「죽음의 푸가」를 간단히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다.
첼란의 다음 시 역시 상대적 이미지 시라고 할 수 있지만 물리적 존재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관념을 통해서 관념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관념시라고 할 수 있다. 순수 관념시는 상대적 이미지 시보다 소통을 더 어렵게 한다. 이 시에는 제목도 없다. 全文이다.
낯선 것이
우리를 그물로 가두고 있다
무상無常은 사정없이
우리를 꿰뚫고 쥐어오는데
헤아려 주렴 너는 나의 맥박을
네 안에서 내 것까지를
그러면 우리가 일어서리라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는 우리에게
피부처럼 낮과 밤을 입힌다
추락으로 끝내려는
더없이 집요한 유희를 위해
“그물”, “맥박”, “피부”처럼 물리적 존재들이 있기는 하지만 “낯선 것”, “무상”, “너를 향해 너를 넘고/ 나를 향해 나를 넘어서”, “무언가”, “추락”, “유희”라는 관념어들이 이것들을 가리고 있다. 관념이 승하다고 해서 이 시가 폄하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시는 첼란의 존재론적 성찰을 담은 빼어난 시편에 속한다. 이런 시도 있고 저런 시도 있는 법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
날이 저물자
肋骨과 肋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고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 부분
“거머리가 우는 소리”는 거머리가 우는 소리이고, “베고니아의 […]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은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진다는 것이다. “바다가 […]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다면 바다가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의 「절정」 끝에 있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와 비교해보자. ‘강철로 된 무지개’는 겨울의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라고 한 것은 식민지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알레고리는 1회적 알레고리, 역사적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용된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1부>에서는 어떠한 알레고리도 찾을 수 없다. ‘저문 어느 날 거머리가 우는 소리가 들렸고, 베고니아의 붉은 꽃잎이 지는 것을 보았고, 새앙쥐같은 눈을 뜨고 있는 바다를 보았다’고 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리듬만 남아있는 시,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이다. 의미나 정보가 아닌, 절대적 이미지로 독자와 소통하려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절대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으로.
이 지점에서 김종삼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북치는 소년」 전문이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에 “어린 羊들”이 인쇄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 위에는 유리가루같은 것이 붙여져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진눈깨비처럼” “반짝”인다고 했을 것이다). 일견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이 어떤 의미, 어떤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목 “북치는 소년”은? ‘가난한 아희, 서양에서 온 크리스마스 카드, 어린 羊, 진눈깨비’ 등과 ‘북치는 소년’의 관계는? ‘북치는 소년’과 끝의 두 연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첫 연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으로 보는 것이다. 이 시에는 시에 구조를 부여하려는 김종삼의 의도적 노력이 있었다. ‘제목’과 ‘끝 두 연’을 ‘내용 없는 아름다움’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김춘수의 경우 절대적 이미지의 이름이다.
상대적 이미지 시(혹은 관념시), 절대적 이미지 시가 있다면 무의미시가 있다. 무의미시는 앞서 말했지만 수용미학상 소통 불가능을 목표로 하는 시이다. 물론 의미, 정보들의 소통이다. 역시 김춘수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제시해주었다.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 <처용단장 제 2부> 부분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을 돌려달라고 하다가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라고 하다가 “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한 술 더 떠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라고 하고 있다. 김춘수의 말을 빌면 의미가 고정되려고 하면 그 의미를 다른 의미로서 가차 없이 처단하고 있다.2)
2.
디카詩를 탈경계의 문학, 크로스오버 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 문학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디카(혹은 디카 사진)와 시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과 문자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서화 일치의 전통을 생각하면 전통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보인다(“디카詩는 디카로 찍은 사진과 함께 쓴 시라고 볼 수 있으나,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명명된 것도 아니다. 디카詩는 예로부터 시서화 일치의 전통성에 기저를 두고 있는 것이다”3)).
‘디카詩의 디카 사진과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이다. 시 없이 디카詩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혹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사진 예술로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옥은 그러나 디카詩에서의 ‘사진에 대한 시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시로 쓴 것”이라는 포탈사이트 파란의 용어사전에 등재된 디카詩에 대한 정의를 부인하고, 디카詩를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강조는 발제자)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4) 문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이고, 그리고 이것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다. 시적 형상[혹은 시적 이미지]의 포착이 먼저이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시적 형상의 포착’이 없으면 언어로 재현하는 것도 없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옥이 그렇다고 ‘시에 대한 사진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옥은 디카詩에서 시와 사진이 상호 대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기를 요청한다. 혹은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간주해주기를 요청한다. 나아가 상호 융합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요청한다. 디카와 詩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디카詩는 말 그대로 디카詩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이다. 인터넷 상의 한 대담에서 이상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진을] 문자화하는 과정은 일종의 번역 개념으로 보면 됩니다. 혹은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자(에이전트 agent)의 기능으로 보아도 좋고요. 사진영상(날시)과 문자는 동일성의 개념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5)
‘동일성의 개념’이라는 말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진에 대한 시의 우위․시에 대한 사진의 우위가 아닌 ‘상호 융합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옥의 디카詩에 대한 이러한 정의에 대해,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이라는 정의에 대해 김규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응원하고 있다.
디카시는 […] 디지털 카메라로 자연과 사물의 시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그 사진(이미지)에 걸맞는 문자시를 덧붙이는 것이다.6) (강조는 발제자)
넓은 의미의 디카詩와 좁은 의미의 문자시를 말하였다.
“시적 장면”(혹은 시적 형상)의 “포착”은 전통적인 창작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시적 충동’과, 혹은 詩魔와, 다를 바가 없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충동 말이다. 시적 충동이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킨 자연이나 사물에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고, 시인은 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문자시로 재현한다. 발제자는 시적 충동이 시에서 중요한 만큼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시적 충동이나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神性의 영역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상옥의 디카詩에 대한 정의, 즉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언어로 재현하는 것’ 중 뒷부분 ‘디카 사진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언어’를 - 넓은 의미의 디카詩에 대해 - ‘좁은 의미의 (문자)시’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상대적 이미지 시, 관념시, 절대적 이미지 시, 무의미시들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도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시를 또한 묘사적 이미지의 시와 서술적 이미지의 시로 나눌 수 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묘사적 이미지의 시에 일견 더 가까워보인다. 묘사는 ‘객관적 묘사’이고 서술은 ‘주관적 서술’이기 때문이다. 혹은 사진(술)은 객관적 묘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 예술에서도 객관적 묘사보다는, 절대적 이미지보다는, 주관적 서술이 강조될 수 있다. 레이M. Ray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레이의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인간의 내면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디카詩의 ‘문자시’를 ‘사진 속의 재현물’과 동일화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디카 사진을 주관적으로 서술(혹은 해석)할 수 있다.
디카詩의 ‘묘사적 문자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
비 내리는 봄날 늦은 오후
구형 프린스는 통영 캠퍼스로 달린다
차창을 스치는 환한 슬픈 벚꽃들 아랑곳하지 않고
쭉 뻗은 고성 가도(固城 街道)의 가등은
아직 파란 눈을 켜고 있다.
― 이상옥, 「고성 가도(固城 街道)」
②
이름 모를 꽃나무가 드리워진
녹색의 녹색
근심 없는
벌들만 잉잉거리는
산중 허니문
나뭇꾼과 선녀가 잠시
머물렀을 것 같은
― 이상옥, 「빈집」
주관적인 서술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① 디카에 나타난 “통영 캠퍼스”를 향해 “달”리는 “구형 프린스”, “차창을 스치는 […] 벚꽃들”, “쭉 뻗은 고성 가도(固城 假道)의 가등”들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환한 슬픈 벚꽃들”이라고 한 것이 주관적 서술일까.
② 역시 디카에 나타난 “산중” “빈집”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름 모를 꽃나무”, “벌”들과 함께. “근심 없는/ 벌”, “허니문”, “나뭇꾼과 선녀가 잠시/ 머물렀을 것 같은”이라는 표현이 주관적 서술일까.
이번에는 ‘서술적 문자시’의 예를 들어보자. 역시 이상옥의 「낙조」이다. 전문이다.
하루치의 슬픔 한 덩이
붉게 떨어지면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
‘언어 너머 시’(날시 raw poem)7)에 화자가 개입되어 날시에 새로운 내포를 부여한 경우이다. 간단히 주관적 문자시, 서술적 문자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행의 “붉게 떨어지면”을 제외하고 전부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하루치의 슬픔 한 덩이”가 주관이고, 특히 ‘슬픔 한 덩이’가 주관이고,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이 주관이다. 압권은 “짐승의 검은 주둥이처럼/ 아무 죄 없이/ 부끄러운 산(山)”이라고 한 것이다. 세월을 가게 한 것이, 하루치의 태양을 떨어뜨리게 한 것이, 마치 산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산이 태양을 삼키는 ‘시적 장면’을 포착하였기 때문일까.
시와 소통’이란 테마로 문제를 국한시킬 때 ‘묘사적 문자시가 소통을 더 용이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옆에 두고 시를 감상할 때 이 소통은 훨씬 더 용이해진다. 서술적 문자시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동의하기 힘든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같은 디카 사진을 보고 독자들에게 시를 - 주관성을 가미해서[혹은 느낀 점을 가미해서] - 만들어보라고 할 때 전혀 다른 시들이 나오게 되는 것과 같다.
3.
무의식을 전경화시킨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난해한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소통 불능의 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의식은 규율․규범에서 벗어나있는 욕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성장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들을 띠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새로울 것이 없는 ‘무의식의 전경화’이다. 프로이트 이래 ‘욕망’은 가려져서 나타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꿈에서는 압축과 전치로, 시를 꿈의 대체물로 본다면 시에서는 은유와 환유로. 의도적 난해시가 오늘에 와서 처음 시도된 것도 아니다. 크로스 리딩에 의한 병렬양식의 시, 몽타주, 콜라주들의 시들이 이미 20세기 초 서양에서 시도되었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서 이미 자유연상에 의한 통사구조 및 문법파괴가 있었다. 李箱 또한 난해시를 썼다. 이형기는 그의 대표적 시론중의 하나인 「소란한 無人島」에서 “시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시”를 쓰고 싶다고 하였다.8) “소란한 無人島”는 정지용의 시 「海峽」에서의 한 구절이었다.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 속 같이
소란한 無人島의 角笛을 불고
이형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소란한 無人島”였다. 이형기는 소란한 無人島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의 본류는 사실 현대적 실험시들이 아닐 것이다. 시의 본류는 전통적 서정시일 것이다. 전통적 서정시들은 유의미시들이다. 소통이 가능한 시들이다. 그리스의 수사학, 로마의 수사학들에서 중요한 항목들이 inventio, dispotio, elocutio, memoria, actio 등이었다. inventio는 주제 및 제재와 관계있고, dispotio는 구성과 관계있고, elocutio는 오늘날의 수사법들과 관계있다. memoria는 기억술로 번역된다. actio는 연설 행위 자체와 관계있다. 이를테면 독자의(혹은 관객의) ‘파토스를 건드리느냐, 에토스를 건드리느냐’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이중에서 주목하는 것이 memoria이다. 기억하게 하는 것이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이를테면 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하는 것이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산문에서 문단을 나누는 것도 기억하기 쉽게 하여서였다. 현대에 와서 이것은 독서 행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요한 구절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는 것도 메모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자시’에서 행을 들쭉날쭉하게 만든 것도 회화를 의식하는 것이다. ‘발전적으로 계승한다’고 한 것은 ‘시적 형상’에서 받은 인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적 충동은 보통 일회적이다. 그 일회적 순간을 위하여 ‘시인은 산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회성은 즉시 메모해두지 않으면 금방 휘발된다. 메모해두더라도 일회성이 주는 ‘일회적 아우라’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일회적 시적 충동이 - 이상옥의 말을 빌면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이 - 디카를 통해 영원히 보존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회적 아우라를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때마다 매번 다르게 생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디카詩로 인용한 「고성 가도(固城 街道)」, 「빈집」, 「낙조」 등을 계속해서 다르게 재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앞에서 ‘시를 묘사적 이미지의 시와 서술적 이미지의 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묘사적 이미지의 시에 더 가까워보인다고 하였다. ‘묘사는 ‘객관적 묘사’이고 서술은 ‘주관적 서술’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진(술)은 객관적 묘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디카詩는 전통시의 철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하였다. ‘계승이라고 한 것은 일단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소통은 ‘그림으로 전달될 때’(혹은 그림과 같이 전달될 때), 혹은 이미지로 전달될 때, 가장 잘 전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견해들을 역사(미학)적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들이 재현의 미학을 추구하였다면 표현주의는 추상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im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외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expression!!ismus는 말 그대로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예술이었다. 내부가 중심이 되는 예술이었다. 표현주의에서 현대 예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촬영한 장면들을 언어로 옮겨놓는다는 점에서(묘사적 언어이든 서술적 언어이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미학에 더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또한 자연주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주의는 사실주의 양식이 극대화된 것으로서 순간문체의 예술, 시간확대경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볼 수 있다. 디카로 ‘촬영하고 싶은 욕구’에 주목하는 것이다. 욕구의 내면에 주목하는 것이다. 디카 사진을 표현주의처럼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예술로 보는 것이다. 이것의 예로 앞에서 주관적 서술의 구체화로 본 절창 「낙조」를 들 수 있다. 문자시 「낙조」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사진 「낙조」의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디카詩의 ‘문자시’는 객관적 묘사의 시가 될 수도 있고, 주관적 서술의 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 서정시의 영역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고, 현대적 실험시의 외연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 절대적 이미지 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고, 무의미시를 파생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극명한 예로 이상옥은 이상범의 디카詩 「용광로-선인장에게」를 들고 있다.
무쇠가 끓을 때 기능장은 빛을 읽는다
녹인 무쇠 쏟을 때의 그 순한 무쇠 빛깔
쇳물도 무르익으면 고요하고 고요하다
― 「용광로-선인장에게」 전문 (디카 사진 생략)
이상옥은 이 시를 두고 “선인장 꽃 속에서 용광로 쇳물 속의 절정의 고요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물에 감추어진 시적 형상을 직관으로 읽어내거나 혹은 선험으로 읽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9) 이상옥의 이 말은 물론 ‘시적 형상의 포착’이 ‘선험적인 것’[혹은 무의식적인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만 이상옥의 이 말을 시적 형상에서 채취한 ‘문자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시적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 묘사적 이미지의 문자시뿐만 아니라, 서술적 이미지의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의식에 의한 선험적인 문자시도 가능하다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유기체적 예술작품’의 부인 가능성이다. ‘전체로서의 부분’의 부인 가능성이다. 디카 사진은 대부분 현실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디카詩는 그렇다면 파편적 예술작품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때) 디카詩는 소통 부인의 디카詩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주체로서의 시인을 말할 수 있다. 현실의 한 단면에서 파편적 예술작품을 반영해낼 수도 있고, 아름다운, 혹은 구조적인, 유기체적 예술작품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로서의 시인을.
또 하나의 문제는 비록 이상옥 교수가 동일성의 개념으로 보아달라고 했지만 시의 사진(혹은 회화)에 대한 종속성․의존성이다.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하게 된 것은 영상매체의 승승장구가 주요 이유였다. 디카詩가 문학의 위기․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혹은 문학의 영상매체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하이브리드의 시대정신에 부응해서 문학을, 시를, 다채롭게 하고 풍요하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공헌할 것인가. 시를 다시 대중에게 가져가는데 공헌할 것인가. 시의 대중화에 공헌할 것인가. 시의 소통을 윤활하게 하는데 공헌할 것인가.
주석
1) 문덕수․이상옥 대담, 「디카詩의 전위성」, 실린 곳: 이상옥, 디카詩를 말한다, 시와에세이 2007, 158면 참조.
2) 김춘수, 「意味에서 無意味까지」, 金春洙詩選, 정음사 1981, 197면 참조.
3) 이상옥, 「디카詩의 새로운 경지」, 디카詩를 말한다, 시와에세이 2007, 97면.
4) 김영탁 ․ 배한봉 ․ 이상옥 지상 대담, 「디카詩를 찍다 : 디카시의 정체성과 미학적 가능성」, 시문학 2007. 10, 112-113면.
5) 이상옥, 「디카詩의 쟁점과 정체성」, 앞의 책, 50면.
6) 김규화, 「디카시―껍질을 깬 디지털의 꿈」, 시문학 2007. 10, 132면.
7) ‘언어 너머 시’(날시 raw poem)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의 다른 말이다.
8) 이형기, 「소란한 無人島」, 이형기 시 99선, 도서출판 善 2003, 192면.
9) 이상옥, 「디카詩의 새로운 경지, 오늘의 패러다임 제시」, 앞의 책, 105면 참조.
*
디카시 세미나 발제문
일시: 2007. 10. 26 오후 2시
장소: 창신대학 사회관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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