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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시

[3] 거울(Mirror)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6. 15:02

[최영미의 어떤 시]

[3] 거울(Mirror)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1.18. 03:00업데이트 2021.03.09. 11:23
 
 
 

거울(Mirror)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과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중략)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중략)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중략)

내 속에 그녀는 여자아이를 빠뜨렸고,

내 속에서 늙은 여인이

날마다 그녀를 향해 솟아오른다,

끔찍한 물고기처럼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1932~1963)

1인칭 화자인 거울을 통해 ‘그녀’를 드러내는 시적 장치. 내가 ‘그녀’를 제압해 고백적이면서 절제미가 뛰어난 작품을 낳았다. 겨우 서른 살에 거울 속 늙은 자신의 모습에 절망했다니. 시를 쓴 1961년 여성을 보는 시선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가스 오븐을 틀어 자살하기 2년 전 실비아의 자화상 같은 시. 분홍색 벽지에 묻은 얼룩은 결혼 생활의 위기를 암시하는 듯. 아직 괜찮다고 속삭이는 촛불과 달빛의 낭만도 비극을 막을 수는 없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그녀가 익사시킨 어린 여자애는 젊은 날의 실비아인가. 마지막에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이미지가 초현실적이며 무시무시하다.

실비아 플라스는 온전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불완전함과 동요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그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출 수 있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 영시 원문 및 전문 번역 **

거울 Mirror

 

나는 은빛이고 정확하며 선입견이 없다.

무엇이든 보면 즉시 삼키고

있는 그대로일 뿐, 사랑이나 증오로 흐려지지 않는다

나는 잔혹하지 않고, 다만 충실할 뿐.

모서리가 네 개인 작은 신의 눈.

대부분의 시간 나는 반대편 벽을 응시하지

분홍빛 얼룩이 묻은 벽을 오래 바라보았기에

그게 내 심장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벽이

깜박거리고 얼굴들과 어둠이 우리를 자꾸 갈라놓지

이제 나는 호수다. 한 여인이 허리 굽혀 나를 내려다보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려고 샅샅이 찾아본다

그리고 그녀는 저 거짓말들, 촛불이나 달빛을 향해 간다

나는 그녀의 등을, 뒷모습을 충실하게 비추지.

그녀는 내게 눈물과 불안한 손놀림으로 보상해주지

나는 그녀에게 중요해, 그녀는 왔다가 가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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