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신춘문예 당선시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6. 15:06

2024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길을 짜다

        황영기

 

몸살 난 집을 데리고 경주로 가자

빈 노트가 스케치하기 전 살며시 문을 열어

비에 젖어도 바람에 옷이 날려도 좋아, 아무렴 어때

나갈 때 잊지 말고 우산을 챙겨줘

돌아온다는 생각은 깊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먹다 만 밥은 냉동실에 혼자 두고

머리는 세탁기에, TV는 버리고 발가락이 듣고 싶은 곳으로

실선으로 그려진 옷소매에 손을 넣고 버스에 올라

별이 기웃거리기 전에 도착해야 해

능소화 꽃잎 같은 사연을

페달에 담아 바람에 날리자

친구가 필요할 거야 그럴 때는 친구를 잊어

무덤 속 주인이 말했다

지퍼처럼 잎을 내렸다 올리고

꽃은 단추 처럼 피었다 떨궈줘

발자국이 세든 골목에 비릿한 바닥을 핥을 때

날실 머리는 잡고 씨실의 허리를 감으며 하나, 둘 잘라줘

촉촉한 파스타에 울던 사람, 발을 만져봐 배가 고플 거야

바늘로 빵을 찌르는 제빵사의 손길

먹줄 실 뽑아 바닥을 튕기는 거미의 솜씨

어긋난 선을 바늘이 엮어주면

옷이 한눈에 주인을 찾아, 보란 듯이 걸쳐 줄래, 그거면 충분할 거야

버스는 늘 먼저 떠나

박물관 뒷길은 혼자된 연인만 걸어가지

거기 길이 끝난 곳에 당도하면

길과 길을 잇는 재봉틀이 떠오를 거야

한 벌의 옷을 짓고 거기에다 누군가 몸을 넣는다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머리끝에 꽃이 달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