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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공범 연습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25. 21:04

공범 연습

 

음산한 겨울바람은 마른하늘에서 윙윙 거리고 있다. 멋없이 휑하니 서 있는 전신주 줄들도 소리 내어 울어댄다. 털외투 깊숙이 목을 움츠린 사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제 겨울은 더 이상의 새로운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 울지 않는 사내들만이 역한 냄새를 피우며 가물거리는 포장마차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젊은 연인들은 겨울밤을 사랑한다. 숨은 연정이 두 눈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남자의 소유욕이나 여자의 의지 욕이 아닌 둘만이 아는 밀실을 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음산한 겨울밤에는 고독한 사내들끼리 술을 마신다.

“노형. 임어당이 쓴 주도에 관한 글을 읽어 보셨소?”

“……”

옆에 앉은 사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가운데 사나이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새로 소주를 한 잔 들이키고는 이젠 내게 묻는다.

“형씨. 임어당이 쓴 주도에 관한 글을 읽어 보셨소?”

“네”

아마 사내는 나에게서 반문이 나오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까마귀가 얼어 죽을지도 모를 만큼 쓸쓸한 겨울밤의 포장마차에서는 이야기보다는 술을 마시는 게 최고인 것이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라고 붉은 글씨가 쓰인 어떤 영화를 맨 구석에서 보며 저럴 수가 있을까? 저럴 수가 있을까 하며 부들부들 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의 불가(不可) 영화관의 한 구석 자리는 으레 내 자리가 되어 버렸다.

“형씨. 이런 날에 주도에 맞추려면 어떤 식으로 술을 먹어야 할까요?”

사내는 넉살좋게 계속 치근댄다.

“글쎄올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오붓이 먹어야 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형씨나 나나 지금 마시고 있는 이런 방법은 날씨를 좀 더 을씨년스럽게 만들 뿐이죠.”

정말 그럴까 하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의심스러웠다. 거추장스런 옷들을 활활 벗어버리고 마음껏 웃고 싶다. 순수하게 행해지지 못하고 있는 남녀의 정사의 장면이 겹친다. 겁탈과 매음의 구실 속에서 알게 모르게 썩어 가고 있는 육신들이 있는 것이다. 이젠 차도 잘 다니지 않는지 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가끔씩 들려온다.

“노형은 여자를 간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내는 사뭇 심각하게 묻는다.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은 신혼 방의 첫 잠자리에서 주어야 한다는 윤리 의식에 사내는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없습니다.”

나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 마냥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스멀스멀 다족류들이 온 몸을 기어 다니고 있는 것 같다. 추운 겨울 날씨인데도 몸에서 땀이 난다.

“그러면 노형은 매음은 해 본 적은 있습니까?”

매음은 나도 해 본 적은 있다. 원색의 조명등 속에서 그녀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가고 있었다.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나를 이끌었고, 어두운 방에서 더듬더듬 방바닥을 더듬으며 담배를 찾고 있을 때도 그녀는 거머리 마냥 붙어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방에서 났다.

“없소.”

나는 이것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내는 더 이상 말없이 자작으로 서너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십대 강간 미수범을 심문하고 있는 형사와 같이 아주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면서 노려보았다.

“가시죠.”

얼토당토 않는 말을 사내는 내게 했다. 대체 사내는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약간 얼큰한 기분이었고, 가 봤자 고린내 밖에나 안나는 서른 노총각 자취방 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대답 없이 엉거주춤하고 있는 나를 보고 사내는 다시

“저 일어나시죠. 별 일 없으면 말입니다.”

그 별 일이 없으면 가자는 사내의 말투는 마치, ‘너 같은 자식이 어디 갈 데가 있느냐. 가자면 가는 거지’ 하는 식이었다.

길을 가며 사내에게 물었다.

“어딜 가시는 거죠?”

“지금 아홉시 반이니까 두 시간만 같이 있어 주시죠.”

“……”

매운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사내는 낡은 검정색 외투에 손을 찌르고 앞서서 걷고 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죠.”
사내는 전혀 나를 안중에 두지 않은 듯한 얘기를 꺼냈다.

“짜식은 대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들어왔죠. 머리가 잘 돌아가서 중대장 따까리를 했죠. 사랑하던 애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계속 편지가 왔는데 답장은 전혀 보내지를 않더군요. 복무 중 휴가는 한 번도 안 나갔습죠. 왜 그런지 좀 이상한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행동에는 하나도 이상한 게 없었죠.”

사내는 일단 여기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좀 있으니 한 잔 더 하러 가죠.”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동의를 했다. 아무 것도 아닌 듯 흘리는 사내의 얘기가 나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사내 얘기에 작년에 자살한 복수가 생각났다. 나는 아직 녀석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모른다.

사내는 어떤 맥주홀로 들어갔다. 홀에는 관능적인 욕구를 흘리고 있는 여인 서넛이 앉아 있었다. 홀 안은 여인들이 내뿜는 독한 냄새로 가득차 있었다. 훔쳐 보이는 칸막이 너머에는 초점 풀린 검은 눈을 허공으로 향한 여인이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타액이 교환되고 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내가 먼저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

복수 생각 때문에 다소 기분이 우울해져서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여자를 부르지 앉았다.

“그 자식은 제대 한 달을 남겨놓고 휴가를 신청했죠. 중대장은 지금까지 눌어붙어 있던 녀석이 갑자기 휴가를 신청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처음에는 거절했죠. 무엇보다 한 달만 있으면 제대를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녀석은 말년 휴가를 가고 싶다고 했죠. 하지만 녀석은 휴가날자를 넘기고도 돌아오지 않았죠.”

사내의 얘기를 들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말년휴가를 가서 미귀한 이유가 뭘까. 원색 불빛 아래의 사내는 헝클어진 머리를 그냥 두고 있었다. 담배연기는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내는 앞에 놓인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리고 그 놈의 소식을 받은 것은 열흘 쯤 지나서였죠. 그동안 편지를 보냈던 여자와 같이 음독자살을 했다더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는 살아났다더군요.”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한 대 빼어 물고는 벽에 붙은 사진을 보았다. 비키니 차림의 아가씨가 사내를 보며 시원스럽게 웃고 있었다.

사내는 갑자기 냉정해졌다.

“형씨는 살인이나 자살을 하고 싶은 기분은 안드는지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하는 사내에게서 나는 싸한 두려움을 느꼈다. 복수의 자살에서 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동기에서 죽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여인의 킥킥대며 웃어젖히는 표정에서나, 난로 끝에 달린 고드름이 노랗게 되어 가는 것에서나, 자기가 지독히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도 술 먹고 방뇨한다는 것에서도, 살고 싶은 욕망을 상실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 생면부지의 사내가 내게 자살을 다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기는 했다. 디에이치 로렌스에 빠졌을 때였다. 잿빛 영국의 풍경과 장원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채털리 부인의 이성에의 눈뜸을 그려내는 로렌스의 뛰어난 글발과 묘사력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인간이 가지는 가장 솔직한 면을 적어도 그는 그려내고 있었다. 채털리 부인이 유유히 장원을 거닐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글쎄요.”

나는 한참 만에 이렇게 답했다. 사실 그가 왜 이런 질문을 내게 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복수는 아주 우습게 죽었다. 그는 죽기 일주일 전에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둘은 나가서 진창 퍼 마셨다. 마시고 마셔 코가 틀어지고 입이 비뚤어지도록 마셔도 모자라 또 마시고 마셨다. 처음에는 술을 마셨으나, 어느 순간 우리가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우리를 마시는 건지를 모를 지경이 될 때까지 갔다. 언제나 우리는 술을 마실 때 같이 마시는 상대가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었고, 전봇대에 개처럼 한 쪽 다리를 들고는 방뇨를 했다. 둘은 술이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모든 묵은 찌끼를 가라앉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는 홀아비 냄새가 배어 있는 키보다 낮은 방으로 기어들어가 아무 구석에서나 잤다. 그런 날은 언제나 천장이 내려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날도 역시 그랬었고, 다음날은 서럽다고 해장술을 먹으며 엉엉 울었다. 한 바가지씩의 눈물을 우리는 뽑아냈다. 그리고는 또 자고, 마시고 했다. 사흘인가 나흘째 되는 날 그는 말없이 방을 나갔고, 나는 그제야 그 어두컴컴하고 퀴퀴한 방을 기어 나와 햇볕을 구경했던 것이다.

“나는 오늘이 살인하고 이틀째 되는 날입니다.”

사내는 다시 담배를 한 모금 깊숙이 빨면서 말했다. 말에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사내는 죄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지금까지 보다는 훨씬 의젓하게 그 말을 했다. 그는 담배를 조심스럽게 비벼 끄고는 맥주를 홀짝이며,

“전 군대 친구의 애인을 오랫동안 만났죠. 그녀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마 형씨도 한눈에 홀딱 반할 수 있는 여자일 겁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사랑한다는 것에서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죠.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게 몸을 맡겼죠. 동거생활을 했으나, 나는 친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죠. 그녀 역시도 제게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죠. 그녀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말해 주기를 기다린 제가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르죠. 어쩌면 그녀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런데 그녀를 죽이려고 마음먹은 것은 처음 만나 봐야겠다고 작정했을 때 부터였죠.”

사내는 맥주를 더 시켰다. 나는 먹을수록 술이 깨고 있었다.

복수의 뼛가루를 강물에 띄우고 오던 볕이 들지 않고 을씨년스런 날,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안았다. 그 날 나는 동정을 버리고, 축 늘어진 젖무덤과 배때기를 아무렇게나 하고 자고 있는 여자 옆에서, 처녀성을 뺏긴 열여덟 소녀처럼 울었다.

새로운 담배를 물었다

“그녀는 예뻤죠. 이런 예쁜 여자를 두고 자식이 왜 휴가를 안 나갔는지를 모르겠더군요. 그가 군대에 오기 전이든 아니면 말년 휴가를 나가 그녀와 육체관계를 가졌는지는 잘 모르죠. 하지만 저는 육체관계를 안 가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제대 말년의 녀석은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사내는 새로 따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입술을 소매 끝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형씨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형씨는 그 자식이 죽은 것을 섹스와 연결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녀석은 아주 자신만만하며 매사를 주도면밀하게 이끌어 갔으니까요. 얼마든지 많은 여자들이 따라올 타입이죠, 형씨처럼 말입죠.”

말을 마친 사내가 갑자기 웃어제낀다. 순간 홀에 있던 아가씨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는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나는 멍하니 고소인지 미소인지 모를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그 일을 물어보았지만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죠.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죠. 여자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죠. 그래서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해달라고 했죠.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묵묵히 그냥 있더군요. 순간 그녀의 입술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는 내 이빨로 그녀의 혓바닥을 깨물어 잘랐죠. 여인은 아무 소리도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군요. 나는 아직도 끈적끈적한 침이 돌고 있는 그녀의 혓바닥을 입속에서 아작아작 씹었죠.”

복수가 집을 나간 며칠 후 나는 그의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기 전에 어떤 암자에 머물다가, 여승을 훔친 후 바위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했다. 나는 복수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실행한 것 같이 생각했으며, 그의 시신을 화장할 때, 나는 죽어도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혼자 자리를 지켰다.

사내와 나는 맥주홀을 나왔다. 싸락눈이 바람에 따라 날리고 있었다. 시계는 열한시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내와 약속한 시간이 삼십분 쯤 남았다.

마른 싸락눈 탓인지 건조하게 느껴졌다. 마른하늘 위에 둥둥 떠 있던 네온사인도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술집 골목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간드러진 여자의 웃음소리도 들리고, 술값 때문인지 핏대를 세운 한 옥타브 높은 쌍소리도 들렸다. 사내와 나는 말없이 걷기만 한다. 가끔 싸락눈이 얼굴에도 붙었다. 떨어져도 쌓이지 못하는 눈들은 바람부는 대로 이 구석 저 구석을 맴돌고 있었다.

“형씨, 우리 이름이나 알고 지냅시다.”

사내는 자기는 김 아무개라고 말했지만 내 대답을 기다리는 폼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묵묵히 걸었다.

“김형, 눈 내리는 밤을 좋아하세요?”

이름 대신, 이런 우스운 질문을 나는 사내에게 던지고 말았다. 사내는 나의 첫 질문이 반가운 듯,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날은 나를 잊어 먹게 되니까요. 심지어는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조차도 잊어버릴 때가 있었으니까요.”

“형씨, 병신의 세계에서는 병신이 왕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애꾸의 세계에서는 애꾸가 왕초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요?

순간 한 여인이 와서 내게 달라붙었다. 갓 스물 전후로 보이는 아가씨는 나를 잡고 늘어졌다. 나는 그 아가씨가 불결하기 보다는 가련하게 느껴졌다.

“김형, 이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수다.”

나는 사내의 동의를 구하려 했다. 처음 사내가 말을 걸었을 때부터 이상하게 나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지만, 감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사내는 고개를 흔들며 싫다고 했다

“아직 같이 있기로 한 시간이 조금더 남았지만 가시려면 혼자 가시죠. 김형이 갈 곳이 생겼다면 구태여 나랑 같이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제가 더 이상 붙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

우리는 뭐라 욕을 해대는 아가씨를 뒤로 두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전깃줄에 뭔가 날리고 있군요.“

사내는 더 이상 아가씨가 보이지 않자 앞을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전깃줄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었고, 바람을 따라 휘날리고 있었다. 원색의 조명 아래 나에게 거머리 마냥 들러붙었던, 여인이 벗어 놓은 옷자락처럼 흐느적거렸다.

“형씨는 저와 남은 마지막 시간에 대해 점을 쳐보지 않으시렵니까?”

사내는 다시 대들고 있다. 화대를 받기 위해 바동거리는 여자나, 혹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반항하고 있는 아가씨처럼, 사내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끈질기게 자극하고 있다.

“김형은 경아를 기억하세요?”

“네. 알고 있죠. 그녀가 죽은 것은 이런 밤은 아니었죠. 아주 펑펑 쏟아지는 눈밭 위에서 포근한 꿈을 꾸면서였죠. 자그마한 그 여자는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죠.”

“김형은 어떤 여자와 사랑해 보고 싶었는지요? 단 아까 말한 그 여자는 빼놓고 말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은폐시키고 싶었다. 원자력병원 골목에 자그마한 교회가 하나 있다. 십자가 위로 또 하나의 피뢰침이 꽂혀있어 상당히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그 첨탑에 올라가고 싶어졌다. 그 위에서 기다랗고 댕그라니 놓여 있는 한식 기와지붕을 보고 싶어졌다. 예기치 못한 사내와 이 밤을 헤매면서 나는 영원한 미아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형씨는 거짓말을 너무 오랫동안 하고 있군요.”

사내는 나의 질문과는 상관없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불쑥 뱉었다.

“저는 남자나 여자나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제 어머님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누군가를 사랑하겠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애기를 계속했다.

“저희 어머님께서는 제가 어릴 때 집을 나갔죠. 무엇 때문에 나간지는 모릅니다. 제게 아버지는 무능한 사람이었죠. 돈은 잘 벌어 올 줄은 알았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것에는 젬병이었죠.”

사내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싸락눈이 언제 함박눈으로 바뀐 듯, 포도 위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가고 있었다. 눈이 쌓이는 만큼 도시는 차분히 모든 것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있었다.

“저는 어머님이 나간 뒤부터 제가 사는 이층집이 보기 싫어졌죠. 집에서 보이는 조그마한 동산에서 어머님이 울고 있는 것 같아 나갔다가 아버지한테서 엄청 혼이 나기도 했죠. 이층 제 방에서 보이는 은행나무의 휑한 가지가 보기 싫어 견딜 수 없었죠.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집안 일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술을 많이 하고 들어온 날은 동전을 한 움큼씩 들고 올라와서는 제 돼지 저금통을 채워 주고는 했는데, 그것 또한 싫었죠. 나는 아버지가 저금통을 채울 때마다 언젠가는 이 썰렁한 집을 태워 버리고 말리라 작정하곤 했죠.”

사내는 말을 끊고 연거푸 계속 기침을 해댔다. 희미한 발자국들이 뒤에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는 환영이 들었다. 걸음을 재촉해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막장의 분위기에서 죽어 가는 얘기를 듣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둘은 수은등 아래 걸터앉았다. 사내가 돌을 하나 집어 그것을 한 번에 박살내곤 싱긋 웃자, 나는 박수를 쳐주었다. 이로써 우리는 모종의 사건을 함께 저지르고 있는 공범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 행동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사내는 아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예기를 이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이사를 갔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죠. 아버지는 당신이 만든 이 집이 좋다면서 반대를 했죠. 나는 아버지에게 재혼을 하든가 아니면 바람이라도 피우라고 했습죠. 제가 아는 아버지는 돈에만 빠져 있었지, 여자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제가 나가겠다고 했죠.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더 이상 같이 살기가 힘들었던 거죠.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고 했죠. 저는 아버지와 관계를 끊기로 했죠. 어느 날 정원에 있는 은행나무로 가서, 그 밑에 한 무더기 불을 붙이고는 그 길로 집을 나와 군에 입대했죠. 남자끼리 모여 있는 곳이라는 것에 흥미가 갔죠. 말뚝을 박고 잘 지내고 있는데 그 친구를 만났죠.”

사내는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발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여관을 가자고 할까 생각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사내와 나는 정해진 시간까지만 같이 있기로 한 남남이니까.

사내는 먼저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엉성하게 헝클어진 사내의 머리 위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구겨 신은 구두의 뒤축으로 눈이 들어오고 있다. 은밀히 소리 없이 기어 들어와서는, 내 발의 신경을 하나하나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사내는 여관이 보이는 곳에서 내게 눈짓으로 앉아라고 했다.

“김형, 아까 그 얘기나 마저 해주시죠.”

나는 그 얘기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죽는다는 것을 잊고 싶어서 이렇게 말을 꺼냈다. 오늘 사내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답잖은 죽음에 관한 얘기만 하고 있다.

“그전에 제가 형씨한테 부탁을 하나 하죠.”

면서 사내는 두꺼운 봉투를 하나 건넸다.

“나쁜 것은 아니니 이것을 받아 주시죠.”
뜨악해 쳐다보는 내게 사내는 봉투를 맡기고 얘기를 이었다.

“제가 군에 간지 일 년쯤 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죠. 집을 떠나며 제가 지른 불 때문에 집이 전부 타 버려 화병으로 돌아가진 거죠. 아버지의 장례식에 저는 가지 않았죠. 그게 당신이 원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된 거죠.”

눈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부서지는 흰 파도가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떠올랐다.

눈이 쌓이는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사내에게 담배를 하나 주고, 나도 한 대를 물었다. 사내는 거의 다 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더 빨고는 신경질적으로 공중에 꽁초를 튕겼다. 꽁초는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다 떨어졌다.

내리던 눈이 그쳤으며, 차가운 북풍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너무나 많은 생명들을 보고 있다고 느껴졌다. 탈영병이 총을 들고 다방을 점거하여 인질극을 벌였던 뉴스가 생각났다. 죽음을 각오하며 최후로 벌이는 생명 연습이 탈영인 것은 너무 맞지 않아 보였다.

나는 자기 말을 마치고 꼬꾸라진 사내가 누구일까 생각했다. 당번병이 자살해 퇴역 당한 중대장 혹은 선임하사. 나는 사내가 내게 준 봉투를 뜯을까 생각하다가, 부질없는 일인 것 같아 태워 버렸다. 사내의 흔적이 잠깐 반짝이며 빛났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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