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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0. 14:34

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창백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등 아래에서 마취사들은 키득거리고 있다. 굵은 올의 푸른 색 제복은 슬픔을 자아내고 있다. 심연의 깊은 늪으로 의식이 빠져 들고 있다. 입안을 맴돌던 끈적끈적했던 피마자기름은 욱한 기분을 만들어 낸다. 이미 자유를 잃고 버려져 있는 왼팔로 링거액이 파고들고 있다. 죽음에 이력이 나 버린 마취사는 흥미롭다는 듯이 지껄여 댄다.

마 여기선 내가 왕이여, 너 퇴원하면 나 찾아 올 거야 안 올 거야

글쎄요, 제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찾아오죠.”

, 그건 우리 손에 달렸다니까. 오징어 사다 주면 살려주지.”

결국 죽는다는 것이 오징어 한 마리만큼의 가치조차 없다. 마취사들의 마음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징어이니까 말이야.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네들이 나를 막고 선다. 관을 타고 들어오는 또 하나의 다른 액체는 뒷골을 댕기는 묵직한 충격을 주며 나를 잡아먹으러 달려든다.

하나, , , ……

하나, 두울, 세에엣, 네에에……

마지막으로 본 빵떡모자는 가라앉은 수술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루에 맥주를 두 병씩만 마시면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안경을 끼고 깡마른 의사는 병을 고치러 간 내게 술을 마실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병원의 흰 벽 속에서 갇히는 미아가 되어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맥주를 권하는 의사의 매끈한 턱은 내게 호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하기 위한 수단처럼 보였다. 현대의 의사들은 단순히 직업으로 분화된 한 사람의 기능공으로 환자를 다루는, 인사하는 예의도 모르는 무식쟁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톡 쏘는 술을 먹어 보았다. 얼굴이 붉어질수록 주변의 모든 것이 함께 굴러다녔다. 술잔도, 탁자도, 안주도, 다른 테이블의 고주도, 주모도. 모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굴러 다녔다. 내 발밑에서 하나로 되어 뱅뱅 돌아 다녔다. 나도 웃고 있었고, 밖의 불빛들도 웃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도매금에 뭉텅 넘어간 바보 같았다.

바보. 바보, 바보.

깔깔깔.

마른하늘을 타고 있었다. 곡마단에서 재주부리는 곰처럼, 모든 게 신기로웠다. 동전이 까딱까딱 뛰고 있었다. 높이, 높이, 그리곤 멀리 가 버렸다. 희열과 쾌감을 가지고 숨어 피우던 담배 친구를 만났다. 짧은 치마의 여인이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푹푹 찌는 여름이 아름답게 보이고 있었다. 질주하는 차바퀴 밑에서의 안락사도 좋을 것 같았다. 숨이 차서 할딱거렸다. 남산은 서울의 전부를 보듬고 있었다. 큰 나무들이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담배 친구도 허허 웃으며 가 버렸다. 아낌없이 세상을 버린 형도 웃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가 떠난 곳에선 아무런 흔적도, 녀석의 껍질도 찾을 수가 없었다. 톡 쏘는 술이 보여주는 영상들이 살아있는 것 같아서 붉은 얼굴을 한 채 밤거리를 싸돌아 다녔다.

 

쌉쌀한 것이 입안을 맴돌고 있다. 라디오의 스위치를 올리고 대상없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 창 밖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익어 가고 있다. 병원의 죽은 시계는 언제나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며 여름을 타고 있다. 병실 맞은 편 붉은 일본식 구식 건물이 파란 하늘과 맞대고 서 있다. 열린 병실 문을 통해 들려오는 간호사들의 웃음소리. 엄숙한 채 가장해서 들어오는 하루 세 번의 시간을 제하곤 그들은 늘 즐거워하고 있다.

식사 잘 하세요. 수술 전에는 많이 먹어 둬야 하거든요.”

병실을 나가면서 얘기한 그녀의 당부가 귓전을 맴돌고 있다. 여름을 타는 사랑병을 생각한다. 짧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 사라지길 잘하는 그녀를 어리석게도 병상에 누워서 기억해 낸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우리 사이를 순환적 사랑이라 정의를 내린 그녀와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이런 좁은 방에 갇혀 온 몸을 맡겨 버리기 전까진 말이다.

추운 겨울 속에서 거닐던 그녀가 나의 생각 속으로 스며든다.

이렇게 만나는 것. 이렇게 걷는 것. 짧은 순간의 쾌락인 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의 만남은 사람을 얼뜨게 만들어 행동이 부자유스러워진다. 사랑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떠나야만 한다는 것. 환하게 웃고 있는 꽃을 한아름 안고 그녀가 나타나는 꿈을 꾸어 본다.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고는 바로 다물어진 그녀의 입.

이렇게 예고 없이 왔다가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인 걸요.”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총총히 사라져 버린 그녀를 잊기 위해 언제나 시무룩하게 다니는 인턴을 그린다. 관장을 포함하여 이 병동의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는 그는 늘 잠을 못 잔다고 신경질적이다.

식사를 알리는 딸랑이는 종소리를 들으며 되도록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질질 신발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 식사를 받아 온다. 국 따로 밥 따로 반찬 따로. 병실 환자들은 그렇게 자기 몫을 받자마자 자신만의 조그만 공간 속으로 무섭게 쏙쏙 들어가 완고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있다. 금송아지를 숨겨 두어서인지 아니면 부끄러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같은 환자들을 보기 싫어서인지, 꼭꼭 게딱지같은 병상으로 피해 버린다. 똑같은 구조의 침대가 나란히 널려 있는 조그만 자신의 병상 위에서 어서 이곳을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병실 전체를 훔쳐보다 들어오는 친구의 얼굴에 땀이 송송 배어 있다. 죽어 가고 있는 인간을 보러 온 것인지, 아니면 죽어 가는 예행연습을 하러 온 것인지, 한 바퀴 병실 안을 둘러보곤,

! 너 아주 호강하고 있구나. 쉽게 갈 수 없겠어. 명당자리 하나 부탁하러 왔는데 소용없게 됐는걸.”

그리곤 킥킥댄다. 같이 허허 하는 걸 보니 말대로 편한 모양이다. 쪼그리고 앉아서도 죽지 못해 머리를 굽히고 떠는 애들에게 동전을 주라고 부탁한다. 녀석은 가방에서 술을 꺼내 홀짝 댄다.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녀석은 자신의 생을 아주 힘차고 자신있게 살아가고 있다. 항상 여유만만한 행동에선 다른 사람들에게는 느껴 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내일 모레가 수술이지. 마 젊은 자식이 수술은 왜 하냐. 눈 딱 감고 질끈 째고 소주 한잔 마시면 될 걸 말이야 ㅎㅎ. 하지만 이렇게 사치스럽게 누워 있으니까 술은 달라고 하지 마라. 네 껀 아예 가져 오지도 않았으니깐 말야.”

간호사가 들어와도 녀석은 전혀 개의하지 않는다.

아이 병실에서 이러심 어떡해요. 환자 몸에 나쁘단 말예요.”

톡 쏘아 붙이는 간호사에게

괜찮아. 얘는 내가 잘 알아. 어차피 이놈은 수술하지 않는다면 매일 술독에 빠져야 될 놈이었거든. 다음에 또 이런 것이 생기면 술로 때우라고 지금부터 준비시키는 거지 뭘.”

간호사는 그런 친구를 한번 쏘아보곤 혈압과 열을 재기 시작한다. 겨드랑이 밑에 꽂혀져 있는 체온계를 뽑아 들곤 정상이라고 적고는 허공에 대고 몇 번 가볍게 뿌린다. 반소매 아래로 하얀 살결이 드러나 있는 간호사에게서 여름을 타고 있을 그녀를 느낀다. 혈압계를 챙긴 간호사는 가볍게 폴랑 일어서더니

조금 있으면 옆 침대의 환자가 들어오실 거예요

그리곤 다시 친구 놈과 나를 번갈아 가며 한번 쏘아보곤 나간다. 아주 가벼운 사뿐한 걸음으로 사라진 간호사는 몰래 끼리끼리 앉아 우리 얘기를 하겠지.

, . 신장 수술 환자 방에 친구가 면회 시간이 아닌데 찾아왔는데, 글쎄 병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지 뭐니. 아무리 뭐라해도 어떻게 병실에서 술을 먹을 수 있니 얘. 아 그래서 한마디 했지. 이게 뭐하는 일이냐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작자가 뭐라 그런 줄 아니. 환자에게 술 먹이는 예행연습을 시키기 위해서 먹고 있다고 하지 않니 얘. 그러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질 않더라.”

그리고 까르르.

아마 간호사들도 삼부제로 나누어져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자거나, 혹은 자신에게 화만 내는 환자들을 보다가, 조금 삐딱해 보이는 건강한 사람을 만난 것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즐거움일 수도 있는 일이다.

 

관장을 하기 위해 인턴이 들어온다. 그는 오늘도 피곤한 표정이다. 예비 의사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는 언제까지나 졸리고 피곤한 표정을 지을 것 같이 생각된다. 나랑 같이 있는 이 병동의 환자는 몸이나 정신이나 모두 힘든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 병동 환자 모두가 가난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싼 육인실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꼭꼭 숨어 지내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환자들이 잘 숨어 있도록 낮은 환자나 보호자들이 예측하지 못하게 사라지며 밤을 밀어 보낸다.

엉덩이를 깐 후 인턴은 뱃속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피마자기름을 넣고 있다. 우리 병실 환자들은 그 누구도 서로를 동정해 주지 않는다. 대신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모두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에. 나약하지만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기에 대들지도 못한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버릴 자들. 이네들에게는 고향이 없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샐러리맨들의 가족이기에.

인턴이 삼십분 안으로는 절대로 화장실에 가지 말라고 당부하곤 사라진다. 욕을 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

, 화장실이 아니라 뒷간이다, 뒷간. 우리네는 각목 두 개에 거적때기가 둘러쳐진 곳에서 일을 본단 말야. 하지만 치질 걱정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단 말야. 알겠어, 임마. 알겠어.”

서러워지고 있는 모양이다. 불공평한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아니면 강해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위령잔치.

태연하게 둘러서서 시체에 대고 매스 질을 하기 시작했다. 역한 포르말린 냄새가 몸에 배어든다. 살아가기 위해, 죽어서 헤매고 있는 영혼에 대고 칼질을 한다. 어쩌면, 살아있는 자들의 좀 더 많은 평안을 얻기 위해서, 어떤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성실해지지 못하고 있는 그들은, 언제일지 모르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해부를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산을 타다가 형이랑 별을 본다. 자신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라고 하던 형. 하지만 그런 형도 세상을 버린 것을 보면, 살아있는 자가 자신있는 자인지는 모를 일이다. 모든 자들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라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인지, 깊은 사랑, 얕게 살아가는 자들.

별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이름지어 타박네란다. 걸치는 것 하나없이 나 태어났던 고향, 어머님을 찾는다. 단 한번 사랑하고 싶었던 분.

별이 너무 많다. 그래서 꿈이 많은 모양이다.”

형아, 맞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지.”

여기가 고향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꿈같은 것 말야.”

고향이랑 꿈은 다른 걸. 우리는 항상 많은 것들을 꿈꾸며 살아가잖아. 엄마같이 말야.”

엄마도 죽은 걸. 이렇게 좋은 밤, 별이 총총 박힌 밤에 말이야.”

우리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형아!”

그런지도 모르지.”

……

……

별이 많은 걸.”

그리고선 낯선 곳에서 고향처럼 잠을 잔다. 어머님 날 낳으신 고향같이 말야.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다.

 

질끈 잡아 짼 배를 잡고 신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하게 아주 강렬하게 살고 싶어한다. 사방을 마구 뒹굴다 진통제를 맞고는 멍청해진다. 약하디 약한 자. 인턴은 오늘도 부지런히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온 병실을 다 잡아 먹을 듯 다니는 그의 구두 소리. 옆 침대의 환자는 우리가 육인실 환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육인실 환자에게는 동정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동정을 받을 필요도 없다. 같은 곳에서 서로의 은밀한 구석까지 내보이며 부대끼고 있으니까.

간호사가 들어와 한 번 보고 나간다. 그녀가 나를 사랑할까? 내가 이 병상에 누워 모든 것을 맡기고 지내는 동안은 사랑을 받을까? 허공에 매어 있는 링거만이 나를 지키고 있다. 저걸 떼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피똥이 나올까? 수술 후의 링거는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맞는다는데 말이야. 누구나 약을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편한 세상이라 생각된다. 마치 오직 자기 혼자만이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선 명동이 마치 고향이라도 되는 양, 명동으로 가서 즉석에서 끊여 주는 진한 원두커피를 마시며 살아가겠지.

 

아버진 고향을 찾지 못해 오늘도 술을 마신다. 온 몸이 술에 빠져 주눅이 들어도 정신만은 말짱하게 돌아와, 이것저것 절대로 불가능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온 몸을 술에 절이곤, 사랑하는 당신을 그리워한다. 정직한 자는 살아갈 수도 없다고 한다. 말도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어차피 모두 다 사람같이 살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남아 걸리적대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찌끼를 빨리 긁어낸 자가 뻐젓이 고개를 들고 잘난 사람같이 행세하며 살아가는 곳. 차라리 무당이나 박수가 되어 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는 일. 조그마한 지난날 육체적 부귀를 생각하며, 모든 것이 더럽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녀와 만나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날은 언제나 졸게 된다. 푹신한 의자에 묻혀 언제나 까닥까닥 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날은 언제나 울다가 웃다가 하다간 나도 타협을 할까 얘기를 하면, 그녀는

이봐요, 그만 두세요. 뭘 어떻게 하려고요?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냥 있어 주세요. 아웃사이드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도 재미있어 할 거 아녜요.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아마 전부 미쳐 당신같이 되어 버릴 거예요. 다른 사람의 행동을 계속 주시한다는 것은 못 견딜 일이니까요.”

 

붕대로 칭칭 동여맨 배를 하고 하루에 한 번씩 놀란다. 본인이 집도한 수술 환자를 보러 아주 평안한 웃음을 짓고 검진하는 노회한 주치의 때문에. 복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붕대와 거즈 따위들. 이제는 등창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몇 번씩 몸을 뒤척이는 운동을 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는 일마저 아주 힘들게 느끼게 되었다. 병원식으로 굳어 버렸기에. 병실에서 내려가 서로가 마주보며 불쌍해 하는 환자들 틈에 끼어 거닐지도 못한다. 일인실, 육인실 구별없이 똑같은 환자복의 구별없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말야. 다만 그것을 상상할 뿐이다. 오늘의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다닐 것 같다고.

견고하게 밀폐된 시체실, 환자복을 입고 그 곳을 서성대다 온 적이 있다. 순수해진 것일까, 아니면 두려워진 것일까. 모두 사라지고 혼자여서 더욱 몸을 사리는 것인지.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몸을 사리면 결국 동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 한 형. 나약해지고 있는 것이, 병실의 흰 빛 때문일까. 다만 가끔씩 빠끔 들이다보는 간호사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자신있게 살아가고 있는 자를 알고 있기에.

그녀는 흰 백합을 들고 왔다. 쉽게 현실에 적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자신에 묶어 버리는. 일찍 죽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아마 어떤 멋진 사내를 만난 모양이지, 죽으라고 백합을 들고 왔으니 말야.

 

여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거리를 쏘아 다니고 있다. 그러다 앞에 가는 여인을 쫓아 가볍게 허리를 툭 치곤 다섯 손가락을 펼치곤 가능한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가씨, 이 다섯 손가락 중 어느 것으로 아가씰 쳤을까요?”

쫙 편 손가락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되도록 엄숙해지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엄숙해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임을 상기시킬 수 있는 충분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돌아선 아가씨의 얼굴 표정의 변화를 전부 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주름 하나 짓는 것까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서로를 알지 못해 그냥 헤어진 연인들이,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에.

일순 아가씨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려고 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의 무수한 실패처럼, ‘, 무슨 이 따위 사람이 다 있어하고 돌아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철저하게 자기를 가장하고 위장하여,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길.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런 식으로 나서서 사랑하는 방법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나선 자신이 또다시 우스운 인간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여인은 갑자기 고개를 바짝 세우고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찔한 생각. 사랑을 아는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진다. 갑자기 그녀의 손이 나의 뺨을 세게 스쳤다. 무엇인가가 잡히고, 보일지도 모른다는 깊은 바램. 젊은 남녀의 이런 이상한 광경을 길 가던 사내가 곁눈질을 하고 있다. 상당히 엉큼한 치한으로 여기고, 저런 자식을 뺨을 맞고 봉변을 당해도 싸다며 고소해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흥분하길 잘하는 자신을 으쓱해 보이며, 자신은 저런 녀석과는 다르다고 욕하며 지나갈지도 모른다.

이 쪽으로 댁의 뺨을 쳤을까요? 아니면 이 쪽으로 쳤을까요?”

아가씨는 친절하게도 손등과 손바닥을 다른 손으로 가리키며 묻고 있다. 그녀만의 암호를 내가 풀 수 있는지를, 살짝 미소마저 지어 보인다. 꾸물거리며 서 있는 내게 아가씨는 여전히 손을 든 채, 어서 답을 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던 형이, 여인이 내민 손 위에서 겹친다.

, 바로 이 손입니다.”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외쳤다.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 되어서, 이렇게 살아 있다는 동물적 본능의 안정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이 병실은 삼복더위인 요즘은 너무 덥다고 느낀다. 누워서 바라보고 있는 천장에 파리가 하나 붙어 있다. 죽은 놈인지 산 놈인지 전혀 구별이 가지 않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있다. 살짝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온다. 한 손으로 혈압계를 안고 있는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묻는다.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그리고는 익숙한 솜씨로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고는, 다른 팔을 내일게 하여 혈압을 재기 시작한다.

,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원식으로 굳어 버렸는지, 간호사와 동화되어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간호사의 표정을 살펴보았으나 변화가 없다. 철저히 안으로 숨겨 버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업무상의 친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병실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한마디쯤 받아 줄 줄 알았던 간호사는 그냥 나가려다, 문간에서 한번 웃어 보이곤 사라진다.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을 걸어 본다. 창밖의 복숭아나무에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려 있다. 오래간만에 한자리에만 서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이 찌는 삼복더위를 피해 산이나 강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기척.

뒤로 돌아 앉으려는데 자그마한 손이 와서 눈을 가린다. 상큼한 그녀의 향기가 밀려온다. 낮게 가만히 그녀를 부르며 손을 푼다. 오래간만에 상쾌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흥분과 기대를 갖고. 약간 수척해 보이는 그녀는 더욱 매력적이다.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는다.

저 꽃 아직 갖고 있네요.”

. 저걸 버리면 죽을 것만 같아서. 백합이 저렇게 견뎌 줘서 내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녀는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서로가 알기 전보다 더욱 심한 소외감에 빠졌다 한다.

이젠 버려야겠네.”

그동안 병실에서 나를 지키고 있던 백합을 버려 달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어머님 산소 같이 가지 않을래. 내일 퇴원이니. 갔다 오고 나면 정신이 맑아질 것 같아.”

수반의 백합을 뽑고 있던 그녀는, 뒤돌아보며 가타부타 없이 어깨를 한번 으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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