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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바다의 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24. 13:13

바다의 혼

 

이젠 모두 다 떠난 것이라고, 김이 탄 버스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며 사내는 느꼈다. 순간 밑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오르는 분노와 이제는 완전히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걸었다. 좁은 대천 읍내가 낯설고 생소하게 다가왔다. 터미널을 벗어나 거리의 맨 끝을 찾았을 쯤엔 분노는 소리 없이 밀려오는 슬픔으로 변하고 있었다.

염병할, 너무나 사치스러운 인간의 부류로 빠져들고 있는 자신에 대해 사내는 수없이 염병을 먹이고 싶어졌다. 서서히 차오른 분노와 슬픔이 콕 집어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점점 추루해지고 있는 것을 사내는 알고 있다. 이런 식의 위험한 허물벗기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가장 무서운 멍에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는 비난의 화살과 그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슬픔을 가장한 원망을, 먼저간 김과 그리고 그녀에게로 핑계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자신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시외전화기 앞에 서있는 자신을 보고, 사내는 얼마나 어리석고 못난 짓을 하고자 하는가를 알았다. 동전을 넣고 몇 초라도 속내를 나눌만한 마땅한 친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사내는 슬금슬금 전화기를 내렸다. 그리고는 아주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떴다.

얼마간의 어슬렁거림만으로 대천 읍내가 갖고 있는 모습을 다 봤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사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또한 그렇게 좁고 융통성 없는 것이라 느꼈다. 그녀 때문에 시작된 이번 여행이 자신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드는 일탈의 작업이 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알아주는 척 하는 행동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가도 깨달았다.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다방에 앉았다. 왼쪽 심장 위를 단지 몇 초 만에 지나가는 그런 통증이었다. 찰나로 지나가서 알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그런 통증처럼, 사람도 전생에 오백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스칠 수 있다고 했으니, 잠시 만났지만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찰나도 안 되는 그 시간이 사내에게 주는 가장 힘든 고통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내였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름 없는 한 여인이어도 좋고요, 순진무구하게 사랑을 얘기하는 바닷가 꼬맹이라도 좋아요. 선한 여자가 되어서 열심히 사랑하고 싶어요. 이번 여행은 혼자서 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사라졌다. 사내가 알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 그녀와의 만남을 대안 없이 미루고만 있을 때, 그녀는 사내를 벗어나겠다고 통보했다. 사내는 그녀의 속말은 저도 당신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삭히며 지낼 수는 없어요. 언제까지 당신의 꿔다놓은 보리짝으로만 지낼 수는 없죠. 당신을 잊기 위한 이별의 통보예요. 앞으로 더 이상 당신의 시답잖은 고민에 나를 넣지 말아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 옆 가게의 창에 신춘음악회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보며 마치 지금까진 잊어버리기나 했던 듯이 봄을 기억해냈다.

봄이었다. 진해 군항제를 알리는 관광회사의 선전문이나, 남으로부터 올라오고 있는 화신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무거운 겨울 코트를 벗어던지며 또한 그만큼씩의 그들의 속에 쌓여있던 눅눅하고 우울한 겨울의 기억을 함께 털어내고들 있었다. 모두들 간직하고 싶지 않은 흔적들을 잘 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봄의 정기였다. 비단 마른나무에 물이 오르고 새싹을 파릇하게만 해주는 것이 아닌, 모든 생명들에 그에 맞는 적절히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생의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은 음악이 다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어설픈 흉내고 모방이라고 사내는 단정지었다. 또한 사내는 그가 가 본 다른 도시나 시골 모두가 개발로 온통 땜질을 하고 있는 서울 흉내를 내고 있지 않았던 곳이 없던 것을 기억해 내곤, 쓸쓸한 고소를 지었다.

철 이른 피서객이 찾기에도 이른 초봄이고 주말도 아닌 데도 다방 안은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서울에서 이백몇십키로 떨어져 있는 이곳에도 보이지 않는 들뜸이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이 들뜸 또한 자신의 우울증에 확실한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더 이상 홀로 떨어져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살아가는 양식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마치 바람난 노처녀같이 제멋대로들 뛰고 있는 사회라고 돌렸다.

사내는 커피를 마시며 아직도 철저히 혼자가 되지 못하는 자신도 결국은 바람난 노처녀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수첩에는 몇 장의 미발신엽서가 그의 친구들을 기억해주고 있었다.

 

김과 대천 읍에 내렸을 땐 저녁 아홉시가 넘고 있었다. 역전을 빠져나와 시외버스터미널로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기차역에서 십여 킬로는 더 들어가야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오는 열차에서 귀동냥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 아홉시의 대천 읍내는 서울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의 읍내는 휘황찬란하게 빛나, 살아 움직이는 부유생물과도 같이 느껴졌다. 사내는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는 거부감이 일었다.

불콰하게 주독이 든 자들이 그들의 억센 말투로 떠들어대고 있는 버스 안은 소란했었다. 그들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몇 프로이면 기분이 좋아지고, 혈액순환이 빨라져 일을 하는데 도움을 주며, 또 몇 프로의 알코올이 혈중에 들어있으면 죽는다는 식의 수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이 즐거워하며 농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규칙적이고 수치적 속박을 벗어나, 기분 좋아질 만큼 알코올이 만들어주는 자연스럽고 흥겨운 감정의 카타르시스일 뿐이고, 외모가 우악해 보이는 그들이 더 친밀하고 순박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재미있게들 살아가는군.”

김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재미있다고. 아니지 저들에게 저것은 재미는 아니지. 매일매일 반복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인 거지.”

둘은 서로 마주보며 픽 웃었다.

여전히 소리 높이 떠들고 있는 그들과 함께 막차는 출발했다. 읍내를 벗어난 버스는 짙은 어둠으로 분간이 가지 않는 시골의 밤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이게 삶의 현장이라면 말이야, 이 사람들은 버스를 타지 않아야지. 죽창에 삿갓쓴 방랑의 선조들 마냥 표주박 옆에 차고 밤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차창에 김의 얼굴이 반사되어 뚜렷이 보였다. 이 곳에서만 가능한 이런 생활이 부러워서 김이 얘기를 왜 꼬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말이야, 이제는 더 이상 살아가는 모든 행위에 그에 맞는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것이지. 우리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라도 모두 기억되던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니잖아. 매일매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지금은, 서로를 배려하고 돌봐주기에는 모두가 힘든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때문에 좀 더 힘들고 각박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김은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막차의 손님들이 많아 사람이나 짐을 싣고 내리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버스가 해수욕장 입구에 닿을 때까지 둘은 더 이상 얘기가 없었다. 열심히 떠들던 그 승객들은 이미 내린지 오래였다.

몇 안 되는 승객들에 묻혀, 버스를 내린 둘은 바로 앞에서 검은 밤 속에 몸을 숨긴 채 바다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미발신 엽서들은 모두 어젯밤에 쓴 것이었다. 사내의 발밑에 엽서 조각들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산소를 만들고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엽록소를 가진 생명감을 지닌 푸른 잎에서, 그리움과 사랑을 전달해주는 멋진 메신저로 단장하였지만, 주인을 잘못만난 엽서는 그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냥 한 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생채기진 노폐물이 되었다.

다방 레지는 보기 싫은 행동을 하는 외지에서 온 사내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좀 더 오래 이 짓을 계속한다면 그녀는 다가와서 그만 두라고 하며 탁자 아래 쓰레기통을 가리킬 것이라 생각하여, 사내는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몇 장의 엽서는 그냥 탁자 위에 두고 일어섰다.

낮의 거리는 조용했다. 시골도시 특유의 정밀감이 오후의 대천 읍을 감싸고 있었다.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해. 건강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픔을 삭이는 법을 찾았으면 해. 분노의 젊은 청춘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은 이렇게 헤매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의 마지막말을 기억하며 비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봄인데도, 전부가 건강히 살아 움직이는 봄인데도, 버스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득차 있었다. 버스는 개나리가 한창 피고 있는 지방 국도를 각기 다른 용무와 모습의 사람들을 싣고 달렸다. 낮은 능선을 끼고 모여 있는 촌가들은 봄볕을 함빡 받으며 누워있었다. 봄보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라고 있는 경지 뒤로 맑은 하늘이 청아함을 한껏 펼치고도 있었다.

 

방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기물들은 낯선 두 이방인을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겨울바다를 찾았던 사람들이 지나간 후여서 사철 중 가장 조용한 때라고 젊은 관리인이 한마디 덧붙인 뒤 돌아섰다. 말처럼 삼층 여관의 손님은 둘 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와 살아가는 맛을 느끼니, 우리는 또라이가 맞군.”

베란다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김이 얘기했다. 하현달이 비추는 바다를 보며, 쉬지 않고 쫓아왔다 밀려가며 찰싹이는 파도가 가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지만 끊을 수 없는 깊은 맛을 주는 속삭임이라 느꼈다.

글쎄, 또라이인지 여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군. 뭐랄까, 남보다 좀 색다른 인간들임엔 틀림이 없겠군.”

그리고 둘은 소리죽여 웃었다. 긴 서치라이트 불빛이 바다를 가끔 밝힐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신선도 부럽지 않군.”

술을 따르며 김에게 얘기했다. 김이 픽 웃었다. 김의 그 웃음은 이런 정밀이 주는 여유로움 뒤에 무섭게 덮쳐올 외로움이 숨어 있다는 걸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임을 사내는 알고 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지만, 그 새로움에는 자신을 짓누를 수 있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내는 마주 웃어 주었다.

말없이 술을 들었다. 사내는 갑자기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아직은 찬 바닷바람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혼자 오지 못하고 김을 끌고 와서 같이 아파하자고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내가 아닌 또 하나의 사내인 김, 그 또 하나의 사내를 보며 점점 왜소해지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서로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단지 약해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대방에게 확인시켜 주는 일 뿐이었다. 사내는, 혼자 와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외로움과 고독감에 긴 밤을 꼬박 새우더라도, 그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김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섭도록 무겁게 내려앉은 밤바다를 파도가 찰싹이며 깨우고 있었다.

둘은 얘기를 나눌 만한 새로운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조금씩 끓어오르는 자신만의 슬픔과 아픔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말없이 김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으며, 사내는 이런 기억은, 다시 간직하고 싶지 않은 이런 기억은, 깡그리 잊어버리리라 작정했다.

적당히 주기가 올라 자러갈 때까지 김은 특별한 말이 없었다. 슬그머니 일어나선 바다에 뀅한 시선을 한번 던지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김이 눈길을 주고 갔던 바다엔 변함없는 잠든 밤을 깨우는 파도의 속살거림이 쉼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김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이번 여행은 잘못 온 것이라고,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아픔을 재확인하는 것밖엔 안되며, 아마도 더욱 피곤하고 초췌해져서 서울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사내도 느꼈다.

 

비인의 바닷가는 난데없이 온통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전에 사내가 봐왔고 기억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늘려있는 중장비들은 또 하나의 이 곳에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낼 것이며, 땜질의 서울과 비슷한 또 하나의 거리가 만들어 질 것이라 느꼈다. 땜질의 도시, 끊임없이 붙이고 떼고, 지우고 칠하는 서울의 거리에서 안주를 못 찾는 것과 같이 이곳도 더 이상의 안식처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임에 분명할 것이었다.

아마도 전과 다른 또 다른 방황이, 또 다른 설렘이 이 좁은 어촌을 감싸게 될 것이리라. 해서 끝도 없는 슬픔을 느끼며 모두는 방황하게 되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구하게 되는 기억을 모두는 가지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더 이상 진정으로 자신을 찾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자들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동백정에 오르니 해는 남은 잔광을 길게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그 햇살은 오랜 방황과 설렘 뒤에 던지는 마지막 웃음이었다. 구름이 낮게 가라앉으며 바다 속으로 살포시 미소를 감추며 숨는 해의 남은 얼굴을 숨겨주고 있었다.

해풍에 온 몸을 드러낸 채, 그것을 맞고 있던 사내는 붉게 웃고 있는 바다를 보며 모두가 저렇게 수줍게 자신들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 수줍음은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도 아픔도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며 매일매일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었다. 숨통을 서서히 조이며 밀려오는 속박이 아니라, 어쩌다 일탈도 있기는 하지만, 기쁨의 새로운 날들이었다.

일몰은 궁극적인 슬픔이고 아쉬움이었다. 넓은 바다를 붉게 미소 짓게 하며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부끄럽게 사라지는 해를 살포시 숨겨주는 구름처럼, 사내가 고민하는 분노나 외로움 혹은 사랑까지도 모두가 함께 풀어나갈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서서히 어스름이 내려앉는 동백정을 내려오며 사내는 자신의 몸을 눕힐 곳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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