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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버려진 혹은 잊혀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1. 18:07

버려진 혹은 잊혀진

 

잠시 뜸하던 바람이 세어지자, 움막의 한구석에서 사내 몰래 은밀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새의 날갯짓이 다시 시작되었다.

푸드드드...ㄱ 푸드드드...ㄱ

새의 날갯짓 소리에 사내는 칼을 갈던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어둠의 한 구석, 새의 날갯짓이 다시 시작된 곳을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사내는 이제는 이 승부의 마지막 장을 시작해도 좋을 때라 느꼈다.

 

일주일.

사내는 지난 일주일을 새와 함께 스스로 이 움막에 갇혔다.

동면에 드는 뱀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를 구멍에 마지막 흙을 덮듯이, 사내는 문에 못질을 했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내내 칼만 갈았다.

사내는, 자신이 정한 마지막 승부를 위해, 더 뾰쪽하고 날카롭게 칼의 날을 세우며, 날이 서가는 만큼씩의 증오도 함께 벼뤄 갔다.

새가 단한번의 힘찬 날갯짓으로 이 움막과 사내로부터 벗어날 날기를 익힐 동안, 사내는 오직 칼만을 갈았다.

잭슨 브라운이라고 했든가, 아니면 칼 잭슨이라고 했든가.

사내는 녀석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사내는 단 한 번의 부드러운 동작만으로, 녀석과 녀석에게로 날아간 여자를 단칼에 없애기 위해, 칼의 날을 세워왔건만, 사내에게 녀석은 안개 속 물보라처럼 잡힐 듯하다가 사라지곤 했다.

푸드득 푸득

새가 날갯짓을 다시 시작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칼의 날을 받쳐 들었다. 그리고 손등에 가볍게 그어보았다. 매끄럽고 싸늘한 쾌감이 짜릿한 전율과 함께 손을 타고 온 몸에 퍼져나갔다. 손등에는 날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작은 핏방울이 몽우리졌다.

 

푸드드득 푸드득 푸득

사내의 잰 걸음에 불안감을 느낀 듯, 새는 조롱 안에서 날개를 치다가 조용해지는 동작을 반복했다.

사내는, 땅거미가 서서히 산의 정체를 가리기 시작하는 시간쯤 되어서야, 움막에 도착했다. 하지만 사내는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지만, 사내가 계획한 일을 실행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움막은 야트막하게 꺼진 분지 형태로 산에 감싸여 있었다. 조롱 속의 새가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으나, 새의 울음은 반향 대신 숲과 산과 어둠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숲은 언젠가 은밀하게 품고 있는 비밀의 소리들을 한꺼번에 되돌려줄 휴화산과 같다는 생각하며, 사내는 그의 일을 시작했다. 송곳 한 뼘 정도 남은 밝음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마쳐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얼기설기 벌어진 움막의 틈을 새가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씩만 막아나가기 시작했다. 새의 울음과 사내의 망치소리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이내 움막을 가득 채웠다.

움막의 모든 틈을 다 막은 후 사내는 조롱의 새를 풀어 주었다. 조롱 안 횃대 에서 울고 있던 새는, 사내가 조롱의 문을 열자,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며 목을 조금 웅크리는 시늉을 지어보이다가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새의 비상은 사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힘찬 것이 못되었다. 새장을 벗어난 새는 힘찬 비상을 꿈꾸며 허공을 박찼으나, 새는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조롱에 갇혀 지낸 새는 날 줄 모르는 새였다. 여자가 사내에게 데려오기 오기 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 열대 원시림 속에서 새의 시조들이 행하던 멋진 비상과 하강, 태양을 향해 끝없이 날아갈 수 있는 억센 근육, 높은 하늘에서 멋지고 우아한 자태로 활강을 뽐내던 야성을, 새는 잃고 있었다. 인간이 허락한 수십 센터 미터 안의 새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야생에서의 건전한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날기를 잃어버린 새.

날 줄 모르는 새.

사내는 바닥에 꼬꾸라져 허튼 날갯짓만 해대는 새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생존의 욕구를 상실한 무용의 새를 지켜보는 것이 사내를 우울하게 했다. 좀 더 높이 날고, 좀 더 힘찬 날갯짓으로 사내를 벗어날 수 있는, 그런 넘치는 생명력에 활기에 찬 새이기를, 사내는 과거에 그의 여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여자가 남긴 새의 조롱을 들고 이 움막에 오르며 생각했다. 사내는 새의 허튼 몸짓을 한참 바라보다가는, 새가 이카로스의 날개를 다는 것은 새의 몫이라 생각했다.

새에게서 눈길을 돌린 사내는 가방에서 숫돌을 꺼냈다. 서투르지만 조심스럽게 숫돌이 자신의 칼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각도로 고정시키며, 사내는 이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했다.

숫돌에 물을 먹이며 사내는, 진정한 한 판의 승부를 위해서는, 새가 자신의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려는 야성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가 날기를 다 익히고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어야만, 사내는 비겁하지 않고 당당한 새와의 한 판의 승부를 겨룰 수 있으리라. 사내만이 일방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상태에서는 그가 행하고자 하는 승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사내는 새가 하루라도 빨리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새가 이카로스의 날개를 갖춰가는 동안, 사내는 단 한 번에 새의 따뜻한 심장을 뚫을 수 있는 칼의 날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사내가 움막을 찾아든 목적, 비겁하지 않는 깨끗한 한 판의 승부를 위해서는 빈 것에서 같이 시작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내의 미움, 증오, 그리고 마지막 승부까지도 새롭게 갈고 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칼의 가는 것은, 사내의 품을 벗어나 잭슨 브라운에게 날아간 여자를 향한 복수의 날을 세우는 일은, 사내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충분히 물이 먹여진 숫돌은 윤을 내며 사내의 칼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숫돌과 칼에 부드럽게 같은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새장을 벗어나 하늘로 날아간 새를 잡기 위해서, 그 새가 다시 새장으로 돌아오기만을 넋을 놓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듯이, 잭슨 브라운에게 날아간 여자도 사내에게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자신의 품을 떠난 여자를 사내가 다시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여자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만, 사내는 여자는 결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강한 암시를 받았다. 그런 절망은 사내에게, 가질 수 없다면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고, 사내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움막을 찾아든 것이다.

처음 움막을 찾아오기로 작정했던 때와는 달리, 지금 사내는 여자에 대한 미움이나 가버린 것에 대한 분노만으로는, 사내가 작정하고 온 파괴를 위한 칼의 날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다.

 

사내가 칼은 갈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생각에 빠져 헤매는 동안, 새는 자신만의 이카로스의 날개를 잘 짜나갔다. 자신의 품에서 아득히 날아가 버린 여자의 환영이 사내를 계속 괴롭혔다. 잭슨 브라운이란, 노랑머리의 품에서, 무릎 아래에서, 희희덕대며, 아니 사내가 환영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고혹적인 자세로 여자는 잭슨 브라운과 사랑을 나누며 사내를 깔보고, 욕했다. 그런 여자를 떨치기 위해 사내는 거친 숨을 삼키거나 간헐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잭슨 브라운.”

사내가 녀석과 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삭이며 칼날을 세워나가는 속도보다, 새가 이카로스의 날개를 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사내가 고독과 좌절 속에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에도 새는 부지런히 날기를 익혔다.

심한 좌절감과 잃어버린 여자에 대한 분노로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사내는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이 복수가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다시 생각했다.

새가 완전한 한 마리 새로서의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날개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높고, 멀리 갈 수 있는 힘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여자는, 자신의 품을 떠나간 여자는 사내에게 무엇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에, 다시 사내는 빠졌다. 그 순간 사내는 갈고 있던 칼을 잘못 놀렸으며, 여전히 무딘 칼이 깊게 사내의 약지를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운 사내의 표정 위로 여자가 비웃으며 덮쳤다.

 

사내가 여자와 살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순전히 장난삼아 시작되었다. 어느 날 사내는 몇 잔 마신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다소 과장된 너스레를 섞어가며, 여자에게 계약동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떠보았다. 사내의 얘기에 여자가 처음 보인 반응은 알기 힘든 애매한 표정이었다. 사내의 계속된 설득과 미사여구 탓인지, 여자는 ‘안 돼’와 ‘어쩌면 재미있을 것’도 같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사내는 여자와 헤어지며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다그쳤고, 여자는 그런 사내의 분위기만 맞춰주려는 듯 생각해보겠다는 답을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날 사내는 예상 밖의 여자의 방문에 놀랐다. 사내는 생각지도 못한 여자의 갑작스런 출현에 잠시 당황해 했으나, 피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것을 생각이 들었다. 계약동거를 떠들며 같이 살아보면 어떻겠냐는 설레발을 떤 것은 사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너스레가 없더라도 사내는 여자에 대해 ‘이 여자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가 여자의 방문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좌우간 사내는 새 조롱 하나만 들고 나타난 여자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자신의 가족이 된 여자가 사내의 집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내와 같이 지낼 방에 그림 한 점을 걸은 거였다. 정장을 한 신사 두 명과 앞을 쏘아보고 있는 전라의 여인과 조금 떨어져 몸을 씻고 있는 여인이 있는 그림은, 사내에게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사내는 그 그림에 대해 여자에게 묻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으나, 기회를 보며 천천히 알아보리라고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다. 침실에 그림을 걸어두는 것이 여자의 취미라면 그것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내는, 비록 일 년이란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같이 지내야 할 시간들이 생각만큼 짧지도 않을 것이고 여자에게 처음부터 좀스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사내와 여자와 계약동거가, 시작은 이상했을지 몰라도, 아무런 마찰 없이 잘 지나갔다. 적어도 사내가 표면적으로 느끼기에는. 여자는 신혼의 신부와도 같은 자상한 손길로 사내를 세세하게 챙겨주었고, 사내 역시도 여자의 그런 보살핌과 다정다감에 아주 만족해했다. 때문에 사내는 여자와의 생활이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차츰 잊어갔고, 여자는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믿었다.

종종 계약동거란 단어가 사내를 거슬리게도 했으나 사내는, 여자가 사내에게 보여주는 모든 몸짓이 만족스러운 시점에, 행여 여자에게 그것을 환기시켜 부스럼을 만드는 식의 우둔함을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사내는 이 계약동거가 끝나는 날에 정식으로, 물론 사내는 당시도 그들의 생활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에게 청혼하리라는 나름대로의 복안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의 짜는 이 그림이 사내와 여자의 생활에 좀 더 자극적인 이벤트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덜떨어지고 헛된 자기만의 착각이었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무딘 칼날이 파고든 왼손 약지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으나, 사내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칼을 갈았다. 멋진 복수를 위한 자신의 칼이 제대로 날을 세우기도 전에, 사내는 이겨내지 못하는 증오감으로 인해 스스로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제법 세찬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새는 날갯짓으로 자신의 몸이 그렇게 가볍게 뜰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신기해서인 듯, 계속 날갯짓을 반복했다.

새의 날갯짓이 자신의 자유를 찾는 일이라면, 사내의 칼갈이는 여자에 대한 환상과 미련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한 디딤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내는 그러지 못하고 계속 스스로에게 묵은 질문만 던지고 있다.

사내는, 이 방법으로 새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 과연 여자와 잭슨 브라운에 대한 기찬 복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 기망과 합리화를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는 자책만 점점 무거워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이 생각한 이 방법 외에는 전혀 다른 식의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내는 자신의 방법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한다는 유행가 가사마냥, 소유할 수 없다면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독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여자의 증발이다.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여자를 사내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사내가 이 움막을 올라오기로 결정한 전날에도 여자는 사내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사내와 여자의 ‘계약동거’라는 불편한 수식어를 그들의 생활 속에서 완전히 떼어버리기로 되어 있는, 사내의 복안에 의하면 영원히 자신의 여자로 그녀를 소유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그 날 아침도 여자는 언제나와 같이 가벼운 키스를 출근하는 사내에게 했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사내의 등에다 대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내는 그런 여자에게, 오늘 저녁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꿈에 대한 힌트를 조금이라도 줄까 하다가, 좀 더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오늘은 일찍 올게’ 라는 인사로 자신의 저녁 계획을 대신했다.

퇴근길 사내는 여자를 기쁘게 하고 자신의 꿈을 완성시킬 소도구들인 장미 몇 송이와 케이크, 백포도주 등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가볍게 벨을 눌렀다. 얼마를 기다렸으나 기척이 없어 사내가 다시 벨을 눌렀으나, 여전히 안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내와 동거한 이후 여자가 집을 비운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무반응은 사내를 매우 초조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서둘러 호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매우 오래간만에 사용하는 자신의 아파트 열쇠가 낯설게 느껴져, 사내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사내는 마치 서투른 아파트 낮털이 마냥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여자가 오기 전까지 늘 해왔던 일이었지만, 사내가 아닌 여자의 일이 된지 오래 되었다.

사내는 여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현관 스위치를 올렸다. 하지만 여자의 대답 대신, 밝은 형광 불빛에 놀란 새의 날갯짓 소리가 사내를 대신 맞이했다.

푸드드득 푸드득

사내는 뭔가가 바뀌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들어올 때 바꾸었던 미색 커턴 대신 황량한 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또한 그들의 침실을 지키고 있던 그림이 걸려있던 자리에는 액자만큼 누렇게 바랜 벽지가 그림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 밖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여자를 기억해낼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는 오늘 밤의 꿈을 위해 준비해온 소도구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여자가 남기고간 유일한 흔적은 현관 앞에서 울고 있는 새였다. 사내는 좀 더 이성적으로 지금의 상태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침에 사내가 집을 나설 때 여자의 행동거지는 평소와 똑같았다. 그리고 사내는 온종일 사내만이 비밀로 간직해왔던 앞으로 여자와 보내게 될 들뜬 날들을 위한 장밋빛 인생을 준비했다. 그런데 여자가 사라져버렸다. 사내는 어디에서 매듭이 꼬인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으나, 여자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짹 째짹 구르르

새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순간 사내는 자신이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리고 그 이전에 몇 번의 만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여자와 관련된 어떤 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여자에 관해서든 혹은 여자의 친구에 관해서든 모두다. 사내는, 예상치 못했던 여자의 방문에 놀랐던 것처럼, 여자가 사라진 문을 열고난 이후 자신이 여자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당혹했다.

여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여자는 나를 버린 것이다.

사내는 이렇게 단정지었다. 여자가 없어진 것이, 사내가 여자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적인 인과관계 때문만은 아님은 분명했다. 만약, 여자가 자신에 대한 사내의 무관심 때문에 떠나야 했다면, 구태여 오늘이 아니라도 사내를 떠날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이나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만약 여자의 이런 식의 떠남이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사내는 오늘 아침 여자의 태도에서 뭔가 다른 낌새를 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천만번쯤 물러서 생각하더라도, 남과 여의 만남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별이나 원망 따위의 그런 흔한 편지라도 한 장 쯤은 남아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내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무감각함에 화가 났다. 사내에게 있어 이것은 중대한 실수이고 생각하지도 못한 배신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새 조롱을 들고 사내의 아파트에 들어온 여자에게는 이것은 처음부터 미리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계약결혼의 종착역에서 사내와 여자가 품고 있던 꿈이 서로 달랐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여자와 영원히 함께 할 아름다운 낙원을 가꿔왔지만, 여자에게 마지막 날은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시작의 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내가 자신의 꿈을 감췄던 것처럼, 여자도 사내가 없는 그녀만의 꿈을 꾸었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여자가 사내에게 남긴 행동은 너무나 완벽하고 빈틈없는 것이었고, 또 너무나 감쪽같이 자신의 흔적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사내는, 최대한 자신이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여자가 갔을만한 곳을 찾아보려고 해 봤지만, 폭풍우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난파선 선장처럼, 사내에게 여자가 흔적은 암중모색이었다.

사내는 여자와 보냈던 시간과 기억과 그리움 때문에, 더 이상 소용없이 버려진 장미와 백포도주와 케이크 대신에 쓴 소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처음에는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술이 오르면서부터는 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잊혀진 것에 대한 설움으로, 마지막은 여자의 완벽한 연극에 대한 미움과 구운몽에 빠졌다가 버림을 당한 사내의 독기와 증오와 분노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사내는 새벽녘에야 한 이름을 기억해냈다.

“잭슨 브라운.”

그 새벽녘 사내는, ‘잭슨 브라운’이란 이름을 입안에서 수없이 곱씹으며, 자신에게 있어 가장 비참하지만, 그로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려야 했다.

 

사내가 잭슨 브라운의 얘기를 듣게 된 것은, 사내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여자와 처음으로 뜨겁고 격렬했던 관계를 가진 후,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성냥불을 끌 때였다. 사그라지는 불빛 뒤로 사내의 눈에 벽에 걸려있는 액자가 들어왔다. 아직도 꼿꼿하게 서있는 여자 젖무덤의 꼭지를 지분거리며, 사내는 그림에 대해 물었다.

“천팔백육십삼년 프랑스 낙선전에 전시되어 비평가로부터 세상의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은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이에요. 엄청 욕을 먹었지만 첫날에만 무려 칠천 명의 관중이 이 그림을 보러 왔어요. 이 작품이 욕을 먹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비너스 같은 여신이나 천사를 그리던 시대에, 살롱에서 볼 수 있는 실존의 인물을 모델로 사용한 것이, 평론가나 화단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뿐만 아니라 정장을 입은 두 명의 신사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빤히 당신을 바라보는 매혹적인 여인과 뒤에서 목욕을 하는 또 한 여인. 여자를 남성 성욕의 대상만으로 보지 않고 그린 것도 평단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또한 마네는 부르주아로 위장하고 매춘을 즐기던 당시 선택받은 부르주아 사회도 비꼬고 있어요. 인상파의 탄생을 낳게 한 작품이기도 해요. 잭슨 브라운이란 친구가 준 선물이에요.”

사내는 여자의 자세한 설명은 한 귀로 흘려들었으나, 선물로 그림을 줬다는 잭슨 브라운인가 하는 친구에 대해서는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날 사내는 마네나 잭슨 브라운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오래간만에 열정적으로 달아올랐던 사랑놀이의 여진에 좀 더 미련이 남아, 여자의 몸을 한번 더 끌어당기는 것으로 잭슨 브라운을 버렸다.

 

사내는 새 담배에 불을 댕겼다. 그리고 사내는 분노의 대상이 여자에게서 점점 잭슨 브라운이라는 미지의 사내에게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았다.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잭슨 브라운을 사내는 또렷하게 그려내려고 했다.

‘노랑머리에다 무시로 질겅질겅 껌을 씹어대는 근육질로 저급 포르노에 나오는 변태성 기질을 보여주는 비곗덩어리.’

여자는 그런 녀석의 무릎을 베고 근육질이 마음에 들도록 큰소리로 내 욕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내가 변태의 근육질에 빠져드는 여자라는 것을 진작 알아 차렸으면, 이렇게 혼자서 뒤통수 맞는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최소한 여자가 함께 있으면서 사내에게 보인 모습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기에, 사내는 심한 괴리감을 느꼈다.

죽 이 고 말 리 라.

사내는 그런 음모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브라운과 함께 그를 비웃으며 즐기고 있을,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날아가 버린 여자를 죽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악이 받치는 그런 다짐과는 달리, 사내는 이미 무력하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내가 죽이리라고 맹세한 대상들은 이미 자신의 손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에 대해, 잭슨 브라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리라는 생각을 굳혔다. 일장춘몽이나 미친개에게 물린 것으로 돌리기에는 여자에게 빠져있었던 사내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자는 사내의 순수한 사랑을 희롱했다. 그리고 지금은 노랑머리 잭슨 브라운이 말초신경을 자극적하는 분탕을 할 때마다 주체하지 못하고 무한의 쾌락에 빠지며, 사내의 사랑을 낄낄대고 비웃으며 장난치기 아주 재미있었던 덜 떨어진 사내였다고 농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내는 두 사람에게 완벽하게 복수하여 그들의 기만을 누르고 자신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다.

사내는 일어나 천천히 커튼이 사라진 창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아주 느리게 창을 열었다. 어둠이, 지난밤 사내를 불면과 외로움과 배신감으로 시달리게 했던 어둠이, 여리게 미명을 파고드는 붉은 기운에 밀려 그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어둠을 밀어내는 잿빛의 안개도 척후병처럼 조금씩 은밀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모든 일들이 소리없이 농밀한 어둠 속에서 사내와 상관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자가 사내의 아파트를 빠져 나갔을 때처럼.

짹째째짹 짹 째째째짹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간 사내의 생각이 새에 멈췄다. 안개와도 같이 주도면밀하게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여자가 새를 두고 갔다. 여자가 두고 갔는지 혹은 버리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새를 남기고 간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여자가 처음 사내의 아파트에 나타났을 때 새 조롱 하나만 들고 왔던 것을 사내는 기억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는 정성을 다해 새를 돌보았다. 그런 여자가 자기의 분신같이 아끼던 새를 두고 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새는, 여자가 사내에게 주고 간, 메시지임은 알 수 있겠으나 그 답은 풀 수 없었다. 데리고 가는 것이 부담되었다면, 베란다 창을 열고 새를 날려 보내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여자는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에 대한 여자의 행동은 여자의 의도적인 태만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새는 여자가 사내에게 두고 간 마지막 메시지임은 분명했다.

여자에게, 새도 사내와 함께 버리고 떠나야 하는 대상이었는지, 잭슨 브라운에게 빨리 가야 하는 애달픔 때문에 잊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말도 못하고 급하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지만 자신의 분신인 새를 남기고 가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봤지만, 사내는 여자가 남긴 메시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여자는 자신의 분신을 남기고 가니 어쩌다 내가 생각나면 이 새를 보며 마음이나 달래라는 식으로 사내를 조롱하며 자신의 떠남을 확실하게 못 박는 행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새나 사내나 모두 여자에게 버려지거나 혹은 잊힌 사물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소꿉놀이처럼 시작되었을지는 몰라도,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끝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내의 여자와 잭슨 브라운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은 새에게로 넘어갔다. 여자의 완벽한 증발을 확인시켜 주는 새를 보는 것은 사내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사내는 새를 죽이리라. 단 한 번의 칼질로 새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찔러 자신을 떠난 여자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여자가 의도적으로 버리고 간 이 새를 자신의 손으로 완전히 없애는 일이, 여자의 배신으로 사내가 받고 있는 상처를 없앨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는 비좁은 조롱에 갇힌 새를 끄집어내 멱을 비틀어 새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일은, 자신이 생각하는 여자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사내는 여자가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간 것처럼, 최소한 새에게도 동일한 자유를 주고 난 후에 하는 복수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많은 여자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이 아파트는 그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부적합하게 느껴졌다.

좀 더 은밀하게, 좀 더 외진 곳에서, 사내와 여자, 사내와 새와의 정당한 대결을 벌여, 새의 심장에 사내의 칼을 꽂을 수 있어야, 여자가 사내에게 주고 간 것과 동일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의 끝에 사내는 이 움막을 기억해냈고, 새와 함께 이 곳에 갇혔던 것이다.

 

칼의 날을 벼리는 일은 사내의 심한 인내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날을 벼리기 위해서는, 칼의 각 면이 균등한 힘을 받게 밀고, 당길 때는 세운 날이 상하지 않게 힘을 빼는, 이론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하고 간단한 작업으로 보였으나, 사내는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증오로 인해 칼을 가는 손에 균등한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사내가 가는 칼이 숫돌 위를 매끄럽게 미끄러지기 보다는 엇물려 헛나갈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헛손질이 반복될 때마다 사내는, 자신의 증오심에 파랗게 빛나는 복수의 칼을 세우리라는 다짐을 반복했다. 칼을 가는 일에만 빠져들면 그의 증오심은 옅어져갔고, 증오심의 강하게 피어오르면 칼날은 숫돌위에서 미끄러지곤 했다. 사내는 움막에서의 전반을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새가 이카로스의 날개를 짜는 속도는 사내가 칼의 날을 세우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사내가 이율배반에 빠져 고민하던 시간에, 날기를 다 배운 새는 자유롭게 움막 안을 날아다녔다. 새의 그런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며, 사내는 다시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처음 사내는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자의 분신이었던 새와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곳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새를 보며, 사내는 또 한 번 자신이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았다. 칼의 날은, 여자나 잭슨 브라운에 대한 사내의 분노나 증오심으로 벼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와의 승부만으로 벼려야 했다.

사내가 여자를 생각하면 새를 잊어버리고, 새를 생각하면 여자를 잊는 버리는 일을 반복하는 사이, 새는 이미 이카로스의 날개를 단 오만한 승자가 되어 사내의 주변을 돌며 멋진 폼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사내는 새의 그런 비상에 초조한 마음도 들었으나, 사내가 지니고 있는 복수와 증오가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여자와의 관계가 계약동거를 하고 싶다는 그의 얘기에서 시작되었듯이, 새와의 승부, 이것도 잘못된 대상과 동기에서 기인하는 것 일수도 있으나, 다시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한 수 접히고 들어갔던 이 승부에서, 새에게까지 진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가 그의 예리한 칼로 새의 심장을 노리기도 전에, 사내는 이미 새에 대해서도 한 수 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는 벌써 자유자재로 움막 안을 돌아다니며 짧은 스타카토의 비수를, 아직 공격할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내에게 던지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까지 움막에서 보낸 자신의 무의미한 시간들에 대해 분노하고, 새의 자유로운 비상에 대해서는 우울해했다. 이제 사내에게는, 여자나 잭슨 브라운에 대해 증오하는 일보다도, 새의 뜨거운 심장에 그의 칼날을 꽂음으로써 스타카토로 가볍게 던지고 있는 새의 공격을 없애고 더 이상 움막 밖으로 새의 노래가 퍼져나가지 않게 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사내는 재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새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태양을 향한 힘찬 날갯짓을 하기 전에, 새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는, 사내는 자신의 일을 빨리 마쳐야만 했다. 사내가 움막에서의 후반 삼일을 그렇게 새에 대한 복수심을 키우며 칼의 날을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사내는 이제는 이 지루한 대치의 시간들을 종식하고 마지막 한 판의 승부를 지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지난 일주일. 새도 사내도 아무런 것을 먹지 않았지만, 사내의 머리는 오히려 명징해졌다. 새의 가장 부드러운 터럭으로 싸여있는 심장을 노리며 갈아온 사내의 칼은 푸른빛을 내며 날카롭게 서 있다. 사내가 칼을 가는 동안 노래로 비수를 던지며 사내를 공격하던 새와의 마지막 승부를 위한 칼이 독을 품고 있는 지금, 사내는 새가 크게 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내는 마지막 복수의 칼을 세웠다. 새에 대해, 여자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 잭슨 브라운에 대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사내는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복수를 향한 칼의 날이 곧추서고 드디어 승부를 가를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는 명쾌해졌으나, 일주일을 물로만 버틴 사내의 기력은 그만큼 쇠약해져 있었다. 사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가누며 새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내가 은빛을 먹은 칼을 들고 새와의 승부를 위해 서서히 다가갈 때, 새는 울음으로 사내를 받았다

짹짹 째째짹

(잭슨 브라운)

짹짹 째째짹

(잭슨 브라운)

사내는 새가 마지막으로 노랑머리를 부른다 생각했다.

그런 새의 울음은 사내에게는 여자를 불러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여자의 살갗. 경쾌하게 뛰고 있을 새의 심장.

칼이 새의 심장을 파고들 때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질 아름다운 살기와 짜릿한 쾌감과 열기를 꿈꾸며, 사내는 새를 향한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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