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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아정체성 탐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3. 3. 13:44

해설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아정체성 탐색

- 배석봉의 소설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1. 글 머리에

 

배석봉은 1958년 대구 출생이고, 원적은 동해를 밝히는 섬 울릉도다. 대구에서 중학교 1년을 마치고 상경하여 이대부고와 건국대를 다녔다. 일찍이 문필에 경도되어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반 활동을 했고, 대학에서는 학보사 기자로 일하며 습작을 했다. 재학 중이던 1979년 건대신문 문화상 소설 부문에 당선하고,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건국대에 적을 두고 학보사 주간을 맡고 있던 이동하 소설가, 국문과 교수로 있던 조남현 평론가, 그리고 정창범 평론가로부터 가까이 지도를 받았다. 건국대 문단의 김홍신, 김건일, 나호열, 오만환 등의 문인, 김한길 소설가 등과 문학적 교유가 있었던 터이니 천생 작가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배석봉이 문단에 나온 것은 2018년 직장인 신춘문예 소설 부문 가작으로 입상하면서였고 그 심사위원은 김선주 소설가였다. 그런 연후에 3년이 지나 지금 이 첫 창작집을 묶게 되었다. 젊은 시절의 문학 행적에 비추어 보면 늦깎이인 셈이다. 물론 그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집중적으로 소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겠으나, 그의 내면에서 불타고 있던 열정이 여전히 그 불씨를 강고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창작집에는 모두 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자아와 타자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그 상호작용의 설정이 강박신경증에까지 진행되는 외형을 보여준다. 참으로 치열하게도 시종일관 타자의 거울에 비친 내면적 자아를 탐색하고, 그 의미를 궁구(窮究)하는 소설의 길이 그가 선택한 문학의 강역(疆域)이다.

 

소설에 있어서 자아의 개념은 궁극적으로 창작 주체인 작가의 형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자아의 각성과 문학적 요체로서의 확립이 이루어진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사회의 시발 또는 근대정신의 형성과 맞물려 있다. 서민의식 또는 민중의식이 성장하고 서민 자신이 자기 삶의 중심이라는 자각과 더불어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여러 본격문학 장르 가운데 소설이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출발한 사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한 국가의 문학이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데 견인(牽引)의 역할을 한 것이 시보다 오히려 후발(後發)의 소설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에 견주어 볼 수 있다. 근대 이전의 시가 일견 귀족의 것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소설은 확연히 대중의 것이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의 러시아나 독일의 문학, 사상이 범람하고 기법이 후진하던 그 문학을 세계문학사에 기록하게 한 것은 대체로 소설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는 1850년 경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출현하던 그 시기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아정체성과 그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톨스토이는 아예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고,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이 문제를 총체적으로 추적했다. 그러기에 세계문학사에서 위대한 작가로 기록된 이들은, 묘사가가 아니라 해설가들이다. 그 이후의 많은 소설가가 이들의 뒤를 이어 자아 탐구의 구경(究竟)을 향한 문학적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 창의적인 문학의 역정(歷程)을 이끈 이들의 생애는, 그 자아의 심원(深遠)에 도달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사정은 다른 언어권의 작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에서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살았던 영국의 작가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신비로운 타자성의 인식에 전력을 기울인 경우였다. 타자는 마침내 자아를 반사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지경(地境)에 이르도록 자아 정립의 주체인 창작자의 고통을 건너뛸 수는 없다. 1840년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골이 만든 신조어 실존적(existental)’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내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삶의 실존과 자아정체성의 탐색은, 이를테면 오늘의 작가들이 짊어지고 있는 숙명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배석봉과 그의 소설들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세기를 넘긴 한국 현대문학에서 이러한 작품들의 문학사적 계보는 만만치 않다. 손창섭의 신의 희작을 비롯한 일련의 전후문학 소설들, 이청준의 퇴원을 비롯한 심리적인 소설들, 그리고 서영은의 먼 그대나 양귀자의 숨은 꽃같은 내면적 동통(疼痛)의 소설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문학사적 배경 위에서 이제는 배석봉의 소설들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볼 차례다.

 

 

2. 죽음 앞의 두 사내, 기묘한 동행

- 공범 연습떠나는 자와 남는 자

 

공범 연습은 음산한 겨울밤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두 사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먼저 말을 건 사내는 두 시간만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하고 군에 있을 때의 사건을 들려준다. 동료였던 녀석은 말년휴가를 나갔다가 귀대하지 않았고 애인이었던 여자와 음독자살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그는 죽고 여자는 살아났다. 사내는 오늘이 살인하고 이틀째 되는 날이라고 말한다. 결국 군대 친구의 애인을 죽였다는 것이다. 기실 이 모든 사실은 그의 토로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며, 소설이 굳이 그 증거를 제시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내의 인생 행로에는 그 바탕에 어린 시절부터 겪은 부모, 특히 아버지와의 불협화가 완강하게 잠복해 있다. 사내만 두고 분석하자면, 그의 강박증은 성장 환경의 피폐로부터 연동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모티브는 이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화자 또한 그 내면의 통증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면서 화자는 작년에 자살한 복수를 떠올린다. 화자는 아직 복수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모른다. 더군다나 소설에서는 화자와 복수의 관계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복수는 집을 나간 며칠 후 죽었는데, 그 전에 어떤 암자에 머물다가 여승을 훔친 후 바위에 머리를 박았다는 것이다. 화자와 사내에게는 허망한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사내가 돌을 던져 수은등을 박살 내는 공공 범죄를 두고 모종의 사건을 함께 저지르고 있는 공범의 기분을 느낀다.

 

눈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졌다. 부서지는 흰 파도가 밀려오는 파도 소 리와 함께 떠올랐다.

눈이 쌓이는 속도가 만만치 않았다. 사내에게 담배를 하나 주고, 나도 한 대를 물었다. 사내는 거의 다 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더 빨고는 신경질적으로 공중에 꽁초를 튕겼다. 꽁초는 포물선을 그 리며 허공을 날다 떨어졌다.

내리던 눈이 그쳤으며, 차가운 북풍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너무나 많은 생명들을 보고 있다고 느껴졌다. 탈영병이 총을 들고 다방을 점거하여 인질극을 벌였던 뉴스가 생각났다. 죽음을 각오하며 최후로 벌이는 생명 연습이 탈영인 것은 너무 맞지 않아 보였다.

나는 자기 말을 마치고 꼬꾸라진 사내가 누구일까 생각했다. 당번병이 자살해 퇴역당한 중대장 혹은 선임하사. 나는 사내가 내게 준 봉투를 뜯을까 생각하다가, 부질없는 일인 것 같아 태워 버렸다. 사내 의 흔적이 잠깐 반짝이며 빛났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 공범 연습중에서

 

겨울밤 눈 속에서 두 사내는 담배를 나눠 피운다. 이들의 관계가 공범 연습인 것은, 어떤 음모를 함께 꾸미거나 사건의 생성을 도모한 적이 없으며 단지 대화를 통해 심정적 차원의 접근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정황은 아무런 탄력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는 다른 일이다. 그것 자체가 충분히 생사를 가름하는 동인(動因)이 될 수 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살인자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기제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상황적 부조리가 심리적 강박을 매개로 담론을 전개하는 소설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소설 공범 연습도 그렇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또한 죽음 앞에 선 두 사내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앞서 살펴본 작품과 유사한 구도를 가졌다. 남한산성 중턱 산속 움막의 사내가 있고, 그를 관찰하면서 그 타자의 형국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라는 화자가 있다. 화자는 각혈의 수준에 이른 병세로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명색이 집주인인 그는 늘 돌아앉아 도망간 애인의 나신(裸身)을 빚고 있다. 화자는 사내가 기거하는 움막의 두 방 중 다른 한 방에 산다. 죽음을 앞둔 자들이 머무는 공간이 된 곳이다. 사내는 한 오 년쯤전에 애인과 헤어졌고, 그로부터 병이 악화되었다. 화자 또한 폐병으로 이 움막으로 기어 들어왔으니, 이들의 동행은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의 합류인 셈이다.

 

사내의 시신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기 위해 나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사내의 홑이불 을 이용한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나는 간신히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방으로 가서 쓰러졌 다.

나는 이제야 겨우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어딘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처럼, 아무런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절망의 끝에서, 지난날의 꿈과 추억만을 곱씹다가 쓰러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는 나도 용기 있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자리에 누워 사내의 방에서 찾아낸 유일한 유물인 수면제를 한 움큼 털어 넣었다.

청량산은 계속 사태가 났고, 그 밑 조그만 움막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길게 하늘을 긋다간 이내 사 그라졌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며 사내는 분명히 하늘로 올라가 멋쟁이 애인을 만날 것이라 되뇌었다.

 

- 떠나는 자와 남는 자중에서

 

결국 사내는 먼저 길을 떠났다. 화자가 여러 모양으로 파악한 사내의 삶은,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것이었으며, 그 간난신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최후를 마쳤다. 이 우울한 삶의 모형은 화자에게도 전이되어 그 길을 따라가게 한다. 다만 여기서 새롭게 납득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사내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하여 화자가 선택한 길이 그나마 용기 있는 행동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화자는 절망의 끝에서 지난날의 꿈과 추억에만 잠겨 있다가 쓰러지지는 않겠다고 결심한다. 여기에 작지만 완강한 인간 의지의 위의(威儀)가 숨어 있다면, 사내의 삶은 화자의 결의에 유효한 반사경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 것이 된다. 그 기묘한 동행의 값을 얻은 터이다.

 

 

3. 관계성의 이탈, 3자의 존재

- 신기루버려진 혹은 잊혀진

 

신기루와 남편의 관계성에 관한 소설적 구명(究明)의 기록이다. 이 관계성의 성격을 부양하기 위하여 시어머니가 등장하고, 다른 한 사내의 존재도 필요하다. 나는 남편을 따라 섬으로 살러 온 여자다. ‘처음은 이 섬에 내리는 눈 때문이었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시어머님의 매서운 눈초리와 섬에서의 적막한 생활이 주는 단조로움이 숨 막히게 한다. 시어머님은 당신의 아들을 곁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의 하나로 나의 머무름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안식처였으나 정작 필요해서 찾을 때는 사라지고 없는 신기루같은 남자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전날 늦게까지 술과 불면으로 새벽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밤을 새우는 내내 거친 바람이 창을 두드려댔다. 북에서부터 밀려오는 매운 겨울바람은 무시로 사람과 집과 거리를 파고들었다. 미친년 달래 캐듯 난분분 싸돌아다니는 왜바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섬을 기억해 냈고 남편을 생각했다. 남편과 들어간 섬은 나의 작은 목선을 대피시킬 수 있는 신기루였고, 남편은 나를 인도해줄 가장 완벽한 해도였다. 남편을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오아시스를 찾는 길 잃 은 양처럼 헤매는 중이었다. 나는 시어머님한테서 쏟아질 꾸중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섬으로 들어가기 로 했다.

남편의 위로와 사랑을 바라며 섬으로 돌아왔으나 정작 남편은 없었다. 남편은 내가 섬을 떠난 후 나 를 찾으러 뭍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다가, 얼마 전 다시 원양바리를 떠났다고 했다. 시어머 님은 무슨 책을 읽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내게 얘기를 했으나, ‘무슨 염치로 다시 돌아와 억장을 지르 느냐는 원망과 질투가 담긴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 신기루중에서

 

이렇게 어긋난 관계의 구조를 바로잡을 힘이 에게는 없다. 동시에 그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길도 없다. ‘바다를 보며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있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오고 의 도발에 따라 그는 마침내 일정한 역할로 소설의 이야기에 편입된다. 그는 댁의 남편조업 중 실족으로 죽었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남편은 결코 실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나를 찾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의 남편이 실족하여 죽었건, 아니면 어떤 유의미한 종말을 조성하려 했건, 그는 에게 신기루의 존재 양식으로 남았다. 이 실종의 방식은 마치 이청준이 쓴 수발(秀拔)한 작품 이어도에서의 종결 논리와 비교해 볼 만하다. 이 작가의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천착은 또 다른 소설에서 계속된다.

 

죽 이 고 말 리 라. 사내는 그런 음모를 꾸민 후 혼자서 즐기고 있었을 잭슨 브라운과 그에 놀아나 사내의 뒤통수를 치고 날아가 버린 여자를 죽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과는 달리, 사내는 이 내 이미 무력하게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내가 죽이리라고 맹세한 대상들은 이미 사내의 손을 벗어났다.

하지만 사내는 여자에 대해, 잭슨 브라운에 대해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리라는 생각을 굳혔다. 일장춘몽이나 미친개에게 물린 것으로 돌리기에는, 여자에게 빠져있었던 사내의 자존 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여자는 사내의 순수했던 사랑을 희롱했다. 그리고 지금은 노랑머 리 잭슨 브라운이 자극적인 희분질을 할 때마다 주체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서대는 말초신경이 만들어 주는 무한의 쾌락에 들떠, 사내의 사랑을 낄낄대고 웃으며, 장난치기 아주 재미있는 덜떨어진 사내였 다고 농()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내는 두 사람에게 완벽하게 복수하여, 그들의 기만을 누르고 자신의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다.

 

- 버려진 혹은 잊혀진중에서

 

버려진 혹은 잊혀진에 등장하는 주인공 사내는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자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가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고 계약 동거를 끝낸 여자가 약속대로 사내를 떠난 형편이다. 사내가 여자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것, 그리고 여자가 찾아갔을 것으로 여겨지는 잭슨 브라운이란 제3자까지 복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거 기간에 저도 모르게 여자에 대한 애정을 가꾸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도회를 떠나 여자와 함께 살던 산골의 움막에서 복수를 위한 칼을 간다. 이 움막은 앞서 살펴본 작품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그 움막과 환경 조건이 거의 닮아 있다. 종내 사내가 복수를 달성할 수 있을지, 그 복수가 온당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사내는 확실하게 여자가 두고 간 새를 죽일 태세인데, 그것이 복수를 대사(代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수긍 또한 독자에게 남겨져 있다.

 

 

4. 대상과의 거리, 그 괴리와 불협화

- 뫼비우스의 띠바다의 혼

 

뫼비우스의 띠는 보기 드물게 단편소설 안에서 두 인물의 시점(視點)을 교차하며 쓴 작품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눈을 교대하며 소설을 진행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복수(複數)의 관찰자가 대상을 조명함으로써 훨씬 본질적이고 입체적인 담화의 범주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야기의 객관적 균형성과 소설적 사고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익하다. 그러기에 김원일이 도요새에 관한 명상이나 노을에서, 이문열이 영웅시대에서, 전상국이 아베의 가족이나 여름의 껍질에서 이 방식으로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다만 단편소설이라고 하는 소설의 분량을 감안하고 보면, 이를 사용하기에 궁벽한 후감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의 교차 시점 활용은 사뭇 잘 된 선택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서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몇몇의 전송객만이 걸음을 재촉하며 승강장을 떠났다. 버스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도 돌아섰다. 지금 나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머 님의 부고를 통보받고도 미적대는 나를 그냥 두고 그녀 혼자 내려갔기 때문이다. 혼자 보낸 것에 대한 미안함뿐만 아니라 같이 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사하지 못한 그녀 쪽 가족 이나 친척에 대한 부담, 아니면 며칠 서울을 비울 수 없는 중요한 일. 둘 모두 아닌데 나는 같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자괴심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꿈속에 사는 이상주의자였다. 얘기를 잘해서 나를 웃게 만드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술 이 좀 들어가면 겨울 같은 깊은 고립감이나 풍요 속의 피폐함을 얘기했다.

우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같은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나누며 먹게 된 것도, 그리 고 서른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대한 아무런 예비도 없이 그와 그럭저럭 생활을 함 께 하는 것도 서로가 배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둘을 묶고 있는 감정에 의해서일 것이다.

 

- 뫼비우스의 띠중에서

 

두 예문은 앞의 글이 남자를 화자로 한 것이고, 뒤의 글이 여자를 화자로 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함께 묶여 사는 이들은, 남자가 혼자 어머님 상가로 떠나는 여자를 배웅하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남자가 그 어머니의 초상(初喪)미적대는데는 그 나름의 사유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여자의 혼잣길 또한 만만찮은 파장(波長)을 예비한다. 이들은 길을 나누면서, 그 내면의 사유(思惟)공간을 한껏 확장한다. 그렇게 이들의 석연찮은 삶과 사랑은, 그 바닥까지의 면모를 독자 앞에 드러낸다. 남자는 아직도 승낙받지 못하고 있는 둘의 관계외에도 그녀의 가족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결여를 걱정한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예측불허의 사내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가 건네준 기차표는 뫼비우스의 띠로 기억에 남아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좁고 긴 직사각형 종이를 한 번 꼬아서 양쪽 끝을 맞붙인 것으로, ‘풀려고 애쓰면 더 얽혀드는 매듭이자, 벗어날 수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띠를 말한다. 이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만큼,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의 도형이다. 1858년 독일의 수학자 페르디난트 뫼비우스가 발견했고, 한국문학에서 1980년대의 억압적 사회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조세희의 동명(同名) 소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배석봉 소설의 뫼비우스의 띠는 두 남녀의 사랑이 그들 의식의 차원에서, 또 가족들과의 관계성 차원에서 모두 출구를 얻지 못하는 사태에 대응한다. 그렇게 사고의 주체와 타자의 거리가 좁혀지기 어렵고, 그 사이에 괴리와 불협화가 상존하는 소설의 유형이 또 있다.

 

낮의 거리는 조용했다. 시골 도시 특유의 정밀감이 오후의 대천 읍을 감싸고 있었다.

끝까지 같이 하지 못해 미안해. 건강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픔을 삭이는 법을 찾았으면 해. 분노의 젊은 청춘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은 이렇게 헤매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비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봄인데도, 전부가 건강히 살아 움직이는 봄인데도, 버스 안은 후덥지근한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버스는 개나리가 한창 피고 있는 지방 국도를 각기 다른 용무와 모습의 사람들을 싣고 달렸다. 낮은 능선을 끼고 모여 있는 촌가들은 봄볕을 함빡 받으며 누워있었다. 봄보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라고 있는 경지 뒤로 맑은 하늘이 청아함을 한껏 펼치고도 있었다.

 

- 바다의 혼중에서

 

바다의 혼이 그렇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사내과 함께 대천 바닷가를 찾았다. 사내와 김의 대화는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고 있지만, 사내는 그로부터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경할 어떤 감응도 촉발하지 못한다. 사내의 강박감은 오히려 선한 여자가 되어서 열심히 사랑하고 싶어요. 이번 여행은 혼자 가게 해주세요란 말을 남기고 수화기 너머로 사라진 그녀에 잇대어져 있다. 바닷가의 동행이었던 김이 떠나고 혼자 남은 사내가 목격하는 시골의 좁은 어촌은 그 나름의 풍광과 활력을 보여준다. 사정이 그러하니 고뇌하는 한 영혼과 이에 반하는 경물(景物)들은, 양자의 상거(相距)를 더 크게 하고 불화를 조장한다. 그런데 이 또한 소설적 묘미의 하나다.

 

 

5. 환경의 재구성, 사랑의 진정성

- 아직 가지 않은 길백합은 향기로 남는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은 얼핏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이름 있는 시를 연상케 한다. 지금까지 검토해본 배석봉의 소설들은 거의 모두가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모색하면서, 그 운동 공간에 침윤하여 새로운 활로를 열어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직 가지 않은 길은 등장인물들의 관점을 전환하고 환경을 재구성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또 다른 진정성의 차원에서 성찰하는 소설적 국면을 추동한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이란 소설의 제목이 이미 그와 같은 이야기의 경로를 예정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범상한 인간관계와 사랑의 교류가 어느덧 전에 없던 활력과 전망을 담보할 수도 있다.

 

여자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사랑에 눈을 뜨면서이죠. 이 땅의 남자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사랑, 결혼 같은 달콤한 것보다는 삼 년의 군대 생활을 먼저 거쳐야 하죠. 이것은 한 사람의 완전한 남자가 되기 위한 대한민국식 성인식이라고 보면 되죠.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남자들이 그것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대부분의 남자들이 날짜가 적힌 영장을 받으면 많은 혼돈과 두려움에 빠지죠. 과연 잘 때우고 나올까 하는 걱정도 함께 하며 말이죠. 입영 전날 밤은 혼자 보내야겠다며 집을 나와 깎은 중머리로 인옥 씨를 만났을 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죠.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찾은 그 기억의 대상이 인옥 씨였죠. 하지만 그것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그때까지 쌓아왔던 둘의 탑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뭉개는 그런 슬픈 시간이 되어 버렸죠.”

 

한강의 네 번째 교각에서 만나오던 세윤과 인옥은 서로 간의 거리감을 극복하려는 최소한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소설들에서는 잘 도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한 성향이 세윤의 탈영을 막는 힘이 되었다. 인옥이 세윤을 두고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바는, 입대 전날에 몸을 나눈 그 기억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입대를 기다리는 남자를 만나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서로의 가슴 속에 숨겨두고 있던 말을 꺼내어 소통하고, 그를 통해 같이 걷고 싶어 했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소설의 유형은, 앞으로 이 작가가 음울한 이야기의 터널을 빠져나와 화명(花明)한 경계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불러오게 한다.

 

산을 타다가 형이랑 별을 본다. 자신 있게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라고 하던 형. 하지 만 그런 형도 세상을 버린 것을 보면, 살아있는 자가 자신 있는 자인지는 모를 일이다. 모든 자들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라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인지, 깊은 사랑, 얕 게 살아가는 자들.

별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이름지어 타박네란다. 걸치는 것 하나 없이 나 태어났던 고향, 어머님을 찾는다. 단 한 번 사랑하고 싶었던 분.

 

이 소설의 화자인 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신장 수술 환자.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간 군상(群像)들은 그에게 크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세상을 버린형이나 단 한 번 사랑하고 싶었던어머니가 소설의 중심부로 육박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에게는 이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기색이 없다. 언제나 시무룩한 인턴’, 병실에 술을 들고 온 친구, ‘고향을 찾지 못해술을 마시던 아버지 등과 화자는 긴장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대상은 담당 간호사다. 그는 간호사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이 모든 관계 형성은 그래도 크게 무리 없는 순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러기에 화자는 퇴원하고 어머니 산소를 갔다 오면 정신이 맑아질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이다. 실상은 이처럼 사소하고 단발적인 작중 화자의 태도 변화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의 소설은 여러 모양의 정신적 굴곡과 복잡다단한 심리적 경로를 거쳐 왔다. 그의 작중 인물과 그 내부의 존재 자아가 세계와 접촉하고 길항(拮抗)하는 경과는, 환경과의 갈등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성 파탄이라는, 그리하여 강박신경증의 증상에까지 나아가는 고단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자아 정체성의 확인과 치유 및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추단은, 여기서 후반부에 살펴본 작품들과 더불어 가능했다. 유사 이래의 소설이 인간 존재의 탐구와 인간 구원을 향한 소박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단초를 배석봉의 그 소설들에서 면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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