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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아직 가지 않은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10. 14:20

아직 가지 않은 길

 

단단히 작정을 하고 세윤이 인옥을 만났지만, 시린 차가운 겨울 강바람이 부는 을씨년스런 한강다리 위에서 둘은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촌의 불빛과 모래를 파내고 있는 준설선의 검은 동체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으로 서 있다. 네 번째 교각 위에서 느끼는 세윤의 감정은, 부조화 그림 속에 잘못 등장한 어릿광대가 앞선 차에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운전자의 경적에 맞춰 지어야하는 의미없는 몸짓처럼 허황하다.

“바람이 상당히 차군요.”

네. 바람이 상당히 차요. 너무 추워 지금 세윤씨가 지키고 있는 그런 침묵마냥, 꽁꽁 얼어버릴 것 같아요. 왜 내게 이런 숨 막히는 고통을 주세요. 청춘 남녀가 이런 썰렁한 다리 위에서 만나야만 할 이유가 뭐죠. 날이 춥다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데, 세윤씨는 마치 날씨가 추워 얘기하지 못하고 그냥 서 있다고 하는 것 같군요.

“차에 탄 사람들이 우릴 보고 궁상떨고 있다고 킥킥 대겠어요. 오늘은 같은 방향으로 걸어요.”

맞다. 인옥의 말에는 하나도 틀림이 없다. 첫 번째 이 교각 위에서 보냈던 침묵 속의 시간이 얼마나 쓰라린 아픔이었던가는 세윤도 잘 알고 있다. 처음 네 번째 교각 위에서 만나 인옥과 아무런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세윤은 검은 강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차에 무심히 눈길도 주고, 또 저 놈의 아파트는 왜 그렇게 자꾸만 하늘로 기어 올라가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쯤, 둘이 돌아서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걸었던 일년전의 그 날을 세윤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세윤은 오늘도 그 날과 똑같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옥도 세윤한테 강요를 당하기나 한 것처럼 똑같이 침묵하고 있다. 세윤도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축복인 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세윤이 안으로 잠근 벽은 그런 대화를 막고 있다.

앞서 걷기 시작한 인옥의 뒤를 따라 세윤도 쫓아가기 시작했다. 세윤이 이렇게 함께 같이 걸어 지금까지 두텁게 쌓이기만 하고 삭여내지 못한 감정들을 털어내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을 수 있다면, 언제 어떤 길이든 같이 걸어갈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할 때, 인옥이 소리질렀다.

“이, 네 번째 교각에서 만나는 일은 정말 짜증나고 오기 싫은 자리예요. 하지만 같이 있고 싶어 왔지만 세윤씨는 여전히 전과 같군요.”

이 놈의 바람은 왜 이렇게 사정없이 불어대는 걸까. 이런 젠장.

“아마 더 멀어지고 소원해졌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 날을 기점으로 해서 말예요. 안데르센 동화에 주먹 하나로 시민을 구한 장한 고추아이가 나오죠. 그 주먹은 수천 톤의 수압으로 댐의 균열이 벌어져 무너지는 것을 막았죠. 어느날 윤희씨와 저 사이에 이런 균열이 생겨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거죠. 그 날 일이 일방적인 저의 강요에 의해 일어났으니 제가 해결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있는 제 잘못이요.”

세윤이 말하는 그 강요는 인옥은 물론 세윤에게도 큰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의 번째 교각 위에서의 만남이 소 닭보듯 데면데면한 것도 해결되지 못한 그 일의 앙금이 남아 있어서인 것이다.

“세윤씨. 이젠 그 날 일은 서로 잊어버려요. 아직도 전 이렇게 세윤씨를 만나고 있잖아요. 누구 잘못이라 탓하기엔 지나간 일이고, 우리는 지난 이 년을 그 일로 고민해왔잖아요. 전 이미 세윤씨가 휴가를 나온 것도 알고 또 내일 귀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세윤씨는 지난번에도 그랬으니까요. 오늘 제가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으로 끝날 것 같아, 작정하고 나왔어요. 남은 시간은 함께 보내요. 저 할 얘기 참 많단 말예요.”

다리를 검문하는 헌병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은 나를 가만히 보내줄까 세윤은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멋진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내가 아니꼽게 보일 수 있으며, 그래서 장난처럼 몇 마디 귀찮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윤의 짬밥은 그런 남자끼리의 얘기는 얼마든지 받아넘길 만큼의 연륜이 쌓였다. 그러나 인옥과의 일은 매우 힘든 문제이다.

아마 어떤 자들은 세윤을 병신 같은 녀석이라 말을 할지도 모른다. 군에 가기 전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을 갖고 뭐 그리 고민하냐며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술먹고 떠벌이는 농담으로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세윤은 인옥의 말에

“인옥씨는 여전히 저를 좋아하는군요. 어쩌면 인옥씨 말처럼 나는 전혀 필요없는 악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레요 맛있는 곳에 가서 얘기해요.”

마주 앉아 모두 털어놓으리라 세윤은 작정했다. 어차피 혼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인옥의 처음 육개월의 침묵과 그로인해 세윤의 마음에서 싹튼 싹은 아직도 세윤을 힘들게 하고 있는 아픔이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오고, 또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을 합리화시켜 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이어온 인간의 끈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겪는 그렇고 그런 일 중의 하나로 치부할 수 없는, 늪에 빠진 세윤을 조여 오는 올가미와도 같았다. 세윤은 만나면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점점 잃어갔다. 그리고 그 아픔은 본인이 짊어져야할 사슬로 혼자서 견디기로 했다.

“양의 탈을 쓴 여우였죠. 사랑하고 믿던 세윤씨가 그런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세윤씨가 입대를 한 후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저를 추스르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이 저를 더욱 옭아매었죠. 왜 그렇게 허둥지둥 죄짓듯 하고 헤어져야 했을까? 미리 내게 왜 얘기하지 않았을까? 내가 안된다고 할까봐 지레 포기한 걸까? 세윤씨는 나와의 만남이 행복하고 즐겁지 않은 거짓사랑이었을까? 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이 즐겁지 않고 숨어서 할 일이었을까? 쉽게 답이 구해지지 않는 이런 질문들로 멍하니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어요. 나의 일부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나눠가졌다는 답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처음부터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세윤씨가 굳어 있어서요.”

경양식집에 앉자마자 인옥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을 얘기를 했다. 세윤은 말로 못하는 숨겨진 인옥의 애증을 함께 들었다. 인옥의 얘기는 지난 이 년 동안의 군대생활에서 그를 버티게 만들었던 악이나 깡보다 훨씬 독하게 세윤을 적셨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득차 올라 그녀를 끓어오르게 만든 지나간 세월에 대한 분노였다.

“고마워요, 솔직한 얘기를 해줘서요. 인옥씨 말처럼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즐거운 시간을 갖기 전에 우리는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묵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쏟아내어야지요. 오늘 우리가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아픔을 풀지 못한다면, 아마 우리는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고 섭섭하거나 묵은 미움의 말만 남은 사이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 다시 그 네 번째 교각에서 인옥씨를 만나자고 연락할 때 결심을 했습니다. 그동안 못한 얘기를 모두 할 것이라고. 저도 네 번째 교각의 만남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인옥은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끝날 때까지 현재의 세윤은 잠시 지우기로 했다. 지금부터 인옥이 하는 얘기는 세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 다짐하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

세윤은 불을 붙여주며, 자신이 인옥에게 너무 많은 아픔을 주었다고 느꼈다. 첫 휴가 때 만나 쓸쓸히 돌아서던 인옥의 모습이 겹쳤다. 서로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세윤에 대한 확실한 거부의 표시였다. 육개월만에 받았던 인옥의 첫 편지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서늘함이었다. 사랑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세윤은 그것을 싸늘하게 돌아앉은 여자의 응어리진 원망으로 읽었다. 세윤은, 인옥이 오랫동안의 고민에서 벗어나 깨알 같이 적어 보낸 사랑의 글이, 비수처럼 그의 마음에 새겨질 때 인옥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인옥을 사랑했고, 그래서 인옥과 하나가 되고 싶었으며, 찬 내무반에 누워서도 아파하고 그리워했던 인옥이 그날 송두리째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사랑하지 않는 남녀도 섹스는 하죠. 때때로 그것은 이성을 억누르는 가면을 쓴 인격이 되기도 하죠.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서로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눴는데 그것을 아파했던 내가 원망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런 원망을 이기기에는 시가도 필요하고 쉽지도 않았죠.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죠. 그래서 빨리 연락할 수 없었어요. 아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 세상이 이렇게 넓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산을 오르기 위한 노력은 해야죠. 용기를 내서 편지를 쓰면 나를 사랑한다는 답장을 바로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의 그런 기대는 무참히 부서졌어요. 적어도 오늘 이 자리 전까지는 말예요. 제가 받은 답장은 첫 휴가에서 봤던 싸늘하게 식어 굳어져 있던 세윤씨와 오늘의 피곤한 얼굴이었어요..”

인옥은 울고 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보며 세윤도 같이 울었다. 한겨울 경계근무를 위해 두터운 파카로 온 몸을 감싸고 있어도 끊임없이 파고드는 지오피의 칼날 같은 바람보다, 인옥의 얘기는 더 매서웠다.

추위는 결코 한꺼번에 밀려드는 법이 없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방아쇠를 걸고 있는 손가락에 파고들었다. 참기 어려운 고문이었다. 처음은 온 몸의 기력을 앗아가 버릴 만큼 차고 깊게 파고 들었다. 신병으로 야간 경계에 투입되면 밀려오곤 하던 솥뚜껑보다 무겁게 눈꺼풀을 누르던 졸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세윤은 그 고문과 솥뚜껑을 침묵이라는 아픔으로 참을 수가 있었다.

인옥에게 담배를 권했다. 젖은 얼굴을 닦으며 받는 인옥의 손이 가볍게 떨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속에 웅크려 있던 묵은 찌꺼기를 모두 털어내고 난 뒤의 허탈감 일 것이라 세윤은 생각했다.

서로가 갖고 있는 모든 얘기를 모두 다할 수 있다면, 그 나머지는 매우 간단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옥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모두를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세윤은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가 새로 태어나는 것은 사랑에 눈을 뜨면서이죠. 이 땅의 남자들이 새로워지는 것은 사랑, 결혼 같은 달콤한 것보다는 삼년의 군대생활을 먼저 거쳐야 하죠. 이것은 한 사람의 완전한 남자가 되기 위한 대한민국식 성인식이라고 보면되죠.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남자들이 그것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죠. 대부분의 남자들이 날자가 적힌 영장을 받으면 많은 혼돈과 두려움에 빠지죠. 과연 잘 때우고 나올까 하는 걱정도 함께 하며 말이죠. 입영 전날 밤은 혼자 보내야겠다며 집을 나와 깎은 중머리로 인옥씨를 만났을 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죠. 누군가에게는 기억을 남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찾은 그 기억의 대상이 인옥씨였죠. 하지만 그것은 처음 생각과는 달리 그때까지 쌓아왔던 둘의 탑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뭉개지는 그런 슬픈 시간이 되어 버렸죠.”

세윤은 여기서 말을 끊었다. 인옥은 하나의 청사진을 보는 것 마냥 세윤의 속을 그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이성과 감정을 가진 모든 남자들에게 주어진 이탈할 수 없는 주어진 의무였다.

“처음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지요.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을 이기기 위해서 되도록 많은 인옥씨와의 기억을 끄집어내려고 했죠. 그 생활에서 좋은 기억의 되새김은 훌륭한 위안이 되죠. 그러면서 육체적 고난이 적응될 때쯤에 다른 괴로움이 생겼어요. 마지막 밤 보았던, 웅크리고 앉아 있던 울고있던 인옥씨의 모습이 즐거웠던 모든 기억들을 밀어냈죠. 견딜 수 없는 압박이자, 피할 수 있는 도피처를 찾을 수 없었죠. 결국 그 모습을 잊는 방법으로 찾은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나름대로는 꽤나 고지식한 결론을 내렸죠.”

옛 말은 열 번 재고 가위질하라고 했다. 인옥은, 만약 세윤이 열 번을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올가미를 만들어 목을 매는 작업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인옥이 순결을 뺏겼다고 생각했던 순간부터 세윤에게 품었을지도 모르는, 세윤이 스스로 올가미로 동여매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자 한 살인심리를, 세윤이 알아차렸을까 싶었다.

인옥의 눈에 들어온 경양식집은 고급스럽게 칸막이를 하고 있었다. 앞에 앉은 짧게 깎은 세윤의 머리에 붉은 조명이 걸린 것을 보니 온 몸의 모공이 삐쭉 서는 전율이 밀려왔다. 중머리의 세윤이 더럽고 피해야할 속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저런 상태에서의 인간은 모두가 자신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기를 원할 것이니까.

“저 담배 피우는 것 보고 놀랐어요? 그랬어요. 세윤씨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이런 시답잖은 것도 배웠어요. 하지만 마음이 착잡하고 안정을 찾지 못할 때는 종종 도움이 되죠. 첫 번째 다리에서 헤어진 후, 한참을 고민하다가 면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길이 상당히 험하더군요. 하지만 막상 위병소가 눈에 들어오자 괜히 왔다는 후회와 함께 노곤함이 확 밀려오더군요. 침착해지자고, 좀 안정을 찾기 위해 걷던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매서운 겨울바람도 멀리 보이는 위병들도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참을 주저앉아 있다가 위병소는 가지 않고 돌아섰어요. 차가 끊긴 전방 부대의 여인숙의 좁고 퀴퀴한 골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올 땐 흰 눈이 날리고 있었어요. 언제 이 눈같이 마음이 희고 순수해진다면 다시 찾아오리라 작정했죠.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마음의 평안은 수많은 모래 속에 잃어버린, 제가 갖고 있던 단 하나의 모래와도 같았어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가 간직하고 있었던 얘기를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겠죠. 그 새벽에 내리던 흰 눈과 같이 세윤씨가 제 앞에 않아 있으니까요.”

뿌옇게 내려앉아 있던 새벽안개가 걷히며, 숨어있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세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확실히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는 두려워해야 할 적은 아니었다. 인옥은 분명 참한 여자라 단정지었다. 비록 예기치 못한 한순간의 아픔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 아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여자이다.

세윤은 위병소 앞 황량한 벌판에서 인옥이 추위도 모른 채 혼자서 울었을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인옥에게 연락하지 않고 그냥 귀대했더라면, 인옥이 언제까지 그 황량한 벌판을 헤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돌파구가 찾아진 것 같아 다시 위병소를 찾더라도, 인옥은 또 돌아설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세윤과 인옥의 거리감은 점점 멀어져,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남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을 잃어버린 뒤 가장 괴로운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었죠.”

세윤은 단숨에 맥주를 한 잔 들이켰다.

“제일 먼저 생각해 낸 것이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었죠. 탈영. 그것이 나를 학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되었지만, 그 일을 저지르기에는 너무나 잘 길들여진 에프엠의 남자였어요. 그로 인해 일어날 여러 가지 불편한 상황들을 해결하기에는 저와 연관된 많은 인연들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막았죠. 종종 뉴스에 본 탈영병은 죽는다는 것도 두렵게 느껴졌고요. 그 다음으로 생각해낸 것이 몸으로 때우자는 것이었죠. 철책 말뚝을 지원했죠. 생각을 할 시간없이 야간 근무와 훈련이 힘들기는 했으나 그것은 감당할 만 했죠.”

세윤은 인옥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늘 세윤과 인옥은 그동안 가슴 속에 굳게 닫고 있던 문을 모두 열었다. 둘의 얘기는 지난 시간 동안 하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혀왔던 울분일 수도 있다. 그리면서 둘은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이전과 똑같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을 마친 세윤이 후줄근하게 녹아내린 해면처럼 보였다.

남은 것은 인옥이 풀어야 할 마지막 아픔이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옥은 세윤을 한 남자, 자신은 세윤이 잘 모르는 여자 인옥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꺼내기는 힘든 말이다. 세윤에게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그리고 그가 한 사람의 남자로 돌아갔을 때 인옥은 그 아픔을 말할 것이다.

“세윤씨, 옛날에 하던 성냥개비 점 좀 쳐볼까요. 오늘은 그 다리를 건널 수 있다면 축복받는 날이 될 거 같아요.”

성냥개비 머리의 두 개의 유황을 맞대고 불을 붙여 성냥개비가 하나로 붙으면, 그 날은 둘이서 술을 마시기로 약속했던 이전에 했던 사랑놀이의 하나였다. 그 놀이는 세윤이나 인옥이 모두가 서로 은근한 기대를 갖고 했던 둘의 마음을 모으는 장난이었다.

세윤은 서로가 갖고 있던 가슴 속에 숨겨놓았던 얘기를 다하고 난 지금, 예전에 좋아했던 놀이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순수한 증류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과지를 통해 찌끼를 걸러내고 그 물을 다시 가열해서 그 증기를 모아야 하듯이, 서로의 아픔을 토해내고 난 뒤에 하는 옛날의 놀이는 비온 뒤의 청순함 마냥 상쾌해질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두 개의 유황이 머리를 맞댄 채 세윤 앞에 내밀어졌다. 수없이 많이 하고 싶었던 그 말들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언어다.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던 그 많은 생각들보다도 더 명징한 사랑의 행동이다.

불을 붙였다. 아스라이 타오르던 불이 주위를 밝혔지만, 금세 꺼졌다. 기대를 잔득 갖고 한 그들의 시도가 부질없는 사랑놀이가 되고 말았다. 세윤은

“오래간만에 하니까 이것도 안 되네요. 아마 내가 너무 굳어서 그랬을 거야.”

‘아녜요. 세윤씨 때문은 아니에요.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남은 저 때문일 거예요. 여기서 얘기하기는 너무 힘들어요. 나가요. 나가서 모두 얘기해 드릴게요’

인옥이 먼저 일어섰다. 세윤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인옥을 보다가, 이내 따라 나갔다. 먼저 나온 인옥이 차를 잡아놓고 있었다. 게딱지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차 앞에서 인옥은 웃었는데, 웃음은 쓸쓸하다고 세윤은 생각했다.

차는 고가도로를 타고 휑하니 내뺀다. 고가도로 위에서 일년 만에 내려다 보는 서울의 거리는 죽어있었다. 뎅그렇게 버려지거나, 혹은 서로 맞대고 서있는 건물들만이 매서운 북서 계절풍을 맞으며 마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유리창에 서린 김 때문에 그 불빛마저 둘로, 셋으로 뿌옇게 갈라져 보였다.

긴 겨울밤이 낮은 하늘에 짧게 드리우고 있었다.

둘은 학교 앞에 내렸다. 오래간만에 교정을 밟으며, 세윤은 인옥을 감쌌다.

그녀와 만난 곳도 이 길이었다. 도서관에서 교문까지의 긴 길을 타박타박 걸어내려 가던 어느 날, 인옥의 뒤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쫓아왔고 그 중의 하나인 세윤이 인옥에게 와서 다짜고짜 팔짱을 끼고는 얘기를 떠들어댔다. 그 때 세윤은 인옥의 얘기를 막고 자신도 이 길을 당신처럼 타박타박 걸어 다닌다며 앞으로 같이 걷고 싶다고 했다.

한 건물의 뒤를 돌아 뒷문으로 빠지는 길목에 둘은 앉았다. 겨울바람에 나무들이 싱싱 울고 있었고, 잔가지들은 후두둑 몸을 떨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문 세윤에게 인옥이 얘기를 꺼냈다.

“어떤 사람을 만났어요.”

추위 때문인지 인옥이 몸을 떨기에, 세윤은 파카를 벗어 걸쳐주었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 친구들이 군대를 간 여자들이 고무신을 언제 거꾸로 신을까는 항상 연구대상이지만, 지금 인옥은 그것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에 세윤은 기다렸다.

“일부러 입대를 기다리는 남자를 만났어요. 그를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사고의 현장에 다시 가보고 싶어 하듯이 말예요. 입영전날 세윤씨가 남긴 추억. 추억이 아니면 상처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 친구와도 세윤씨처럼 입영전날 함께 했어요.”

인옥은 얘기를 하면서, 경양식집을 나올 때와는 달리 좀 더 뚜렷하게 자신이 해야할 얘기가 떠오르며, 얘기를 할수록 머리가 정리되고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자신이 돌아설 때가 아닌 세윤이 돌아설 때라 생각했다. 만약에 세윤이 화를 내고 일어선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겠지만, 그래도 할 얘기는 다하리라 생각했다. 더 이상은 그 황량한 벌판을 헤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는 단지 하룻밤을 그 애와 보냈다는 생각밖에 아무런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면회를 갔지만 만나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죠.”

짧은 얘기였지만 세윤은 들고 있는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가고 있는 것을 못 느꼈다. 인옥이 세윤에게 하고 있는 얘기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얘기가 아니었다. 인옥은 세윤에게 서로가 믿고 알고 있어야 할 확신과 사랑을 얘기하고 있었다. 세윤이 한 번의 아픔 끝에 탈영에 대한 환상을 그렸듯이, 인옥은 확인을 위해, 관객도 배우도 대사도 없는 철정한 자신과의 무언극을 펼친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하죠?”

묻는 인옥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세윤은 인옥이 불확실한 어떤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침묵을 끝내고 자신을 안아줄 것인지를 묻는 것이라고 알았다. 인옥이 담배를 배운 것과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 준 것은 같은 때였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녀의 슬픔을 내게 얘기함으로써 서로의 기다림과 아픔을 이제는 묻어버리자는 것도.

세윤은 떨며 앉아 있는 인옥을 일으켜 세워 같이 걷고 싶어했던 길을 걸어가지 시작했다. 둘의 뒤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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