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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봉의 소설 읽기

신기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4. 10:08

신기루

 

남편이 그사이 집을 나갔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어 달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남편은 없었다. 대신 행랑채에는 이른 7월의 낯설은 피서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붉은 수영팬티에 흰 티셔츠를 입고 평상에 앉아 있던 사내는, 나의 출현에 약간은 흥미로운 눈짓을 지었다. 그런 사내의 등 뒤로 저녁 햇살이 붉게 저물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그런 표정은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내가 섬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옷가지나 화장대 위의 화장품은 잠시 마실을 다녀온 주인을 반기는 모습 그대로 놓여있었다. 내가 잠시 집을 떠난 것만 빼면, 모든 것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방안에서 나는 남편의 부재를 생각했다. 어쩌면 남편은 지금까지 내가 헤매고 다녔던 남녘의 도시에서 나의 행적을 뒤밟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리의 모퉁이마다나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은밀한 시선을 던지며, 남편은 그렇게 나의 흔적을 찾아 다닐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가출이 그러한 것처럼 남편과 나 사이에 되풀이되는 술래잡기와도 같은 일이다.

 

처음은 이 섬에 내리는 눈 때문이었다. 남편을 따라 섬으로 들어온 나는, 시어머님의 매서운 눈초리와 섬에서의 적막한 생활이 주는 단조로움 때문에 거의 숨 막힐 지경이 되었다. 시어머님은 당신의 잘난 아들이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계집을 하나 꿰차고 들어온 것이 마냥 불만이었다. 일찍 혼자되어 아들 하나 보며 수절해온 당신에게 나는 화냥기 붙은 년이었고, 금지옥엽 아들의 육체와 영혼을 앗아가는 잡귀이고, 항상 당신의 애간장을 태우게 만드는 미움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남편의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에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들어간 섬은 좁았고, 뱃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섬으로 들어온 후 당일치기 배만 타던 남편은 한겨울을 걱정하며, 나와 시어머님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기어이 남편은 겨울이 들어서기 전에 일주일짜리 원양바리를 탄다고 했다. 남편이 떠난 날 나는 섬에서 처음으로 눈을 맞았다.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많은 눈이 내렸으며, 마을을 벗어나는 자그마한 재는 이내 눈에 파묻혔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을 보니 나는 심한 외로움과 또 그리움을 느꼈다. 문짝에서 백여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바다를, 섬에 들어온 후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바다를, 나는 내리는 눈 속에서 생각해냈고, 시어머님의 따가운 눈총을 뒤로 하며 바닷가로 나섰다.

섬 전체가, 아니 나를 제외한 섬의 모든 것들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바다는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계속 삼켜 댔지만 어쩔 수 없이 눈 속에 묻히며 포효하며 거칠게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백사장에 남는 내 발자국을 소리 없이 지우며 따라오는 눈과 함께 백사장을 한없이 걸었다.

 

눈의 유혹에 빠져 백사장의 끝과 끝을 걸으며, 나는 자꾸만 왜소하고 초라해져 갔다. 눈이었다. 남편과 남도의 어느 술집에서 마주앉았던 것도, 단아하게 보이던 남편의 눈 때문이었고, 함께 며칠을 보낸 후 그를 따라 섬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한 것도 축축하게 젖곤 하던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매운 해풍은 사정없이 나의 가슴을 파고들었으며, 쉼 없이 내리는 눈이 그 공간을 채웠다. 나는 내리는 눈 속에서 나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반항과 이 섬이 아닌 남도의 어느 도시에 내리던 눈과 그리고 오늘 남편이 나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이러한 사실의 확인은 내게 떠남을 부추기는 은근하고 끈적끈적한 유혹이었으며, 나는 꽁꽁 언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시어머님은 나의 형편없이 구겨진 몰골을 보고 혀를 찼다. 나의 행동을 남편의 출어에서 이해했을 시어머님은 당신의 지난 시간들에 비춰보면 내 행동이 가당치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날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일찍 뭍으로 나가는 배를 얻어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나갔다. 그런 나를 어느새 나왔는지 시어머님이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시어머님의 목소리와 사내의 소리가 함께 들렸다. 얘기는 한참 나누고 있었던 모양으로 시어머님의 매운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며늘 년이 온 거여.”

쇳소리가 담긴 칼칼한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갯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시어머님은 바깥의 이른 피서객과 얘기를 하고 있지만, ‘며늘 년이 온 거’라고 높인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표독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하기야 어느 시어머닌들 두 번씩이나 집을 나간 며느리를 좋게 보아 주련만은, 갯바람이 싣고 온 그 말에는 어느 곁에 당신의 수절과 나의 방랑벽을 싸잡아들어, 나를 화냥년으로 욕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슴에 품고 있는 독기와는 달리,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나의 물건들에서 시어머님이 한번도 내 방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나를 반대해온 시어머님이었기에, 나의 가출이나 이런 식의 돌아옴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시어머님은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당신의 아들을 곁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의 하나로 나의 머무름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계륵같이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어머님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그 원망의 칼날까지 무뎌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님은 속으로 더욱 날카롭고 확실한 칼날을 세우며, 단 한번의 칼질로 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러한 시어머님의 모습을 첫 번째 가출에서 돌아왔을 때 알아차렸다. 긴 동면의 겨울에 사람들이 무기력할 때, 나는 섬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거리마다 사람마다 돌아다니는 매일의 무절제한 생활에 싫증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무채색의 쳇바퀴의 단조로운 생활과 남편의 출어가 나를 뭍으로 나오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지만, 주거지없이 이곳저곳을 헤매는 생활 역시도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다. 만나는 사내들은 항상 그만그만해서 나의 몸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나는 그런 사내들의 탐욕스런 표정을 잊기 위해 과음을 하는 날이 많아져갔다. 물론 그런 식의 낯선 남자들과의 만남이 나의 의도적인 행동이었든 아니면 사내의 멋진 유혹에 때문이었든 간에, 나는 종내에는 그런 일들에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그 날도 나는 전날 늦게까지 술과 불면으로 새벽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밤을 새우는 내내 거친 바람이 창을 두드려댔다. 북에서부터 밀려오는 매운 겨울바람은 무시로 사람과 집과 거리를 파고들었다. 미친 년 달래캐듯 난분분 싸돌아다니는 왜바람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섬을 기억해냈고 남편을 생각했다. 남편과 들어간 섬은 나의 작은 목선을 대피시킬 수 있는 신기루였고, 남편은 나를 인도해줄 가장 완벽한 해도였다. 남편을 만났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오아시스를 찾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는 중이었다. 나는 시어머님한테서 쏟아질 꾸중과 수치심을 무릅쓰고 섬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남편의 위로와 사랑을 바라며 섬으로 돌아왔으나 정작 남편은 없었다. 남편은 내가 섬을 떠난 후 나를 찾으러 뭍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다가, 얼마 전다시 원양바리를 떠났다고 했다. 시어머님은 무슨 책을 읽듯이 아무런 감정 없이 내게 얘기를 했으나, ‘무슨 염치로 다시 돌아와 억장을 지르느냐’는 원망과 질투가 담긴 도끼눈을 하고 있었다.

“네 년이 돌아오면 암말 말고 집에 붙어있으라 하고는 갔어. 그 놈도 제 명에 못 죽을 놈이여. 그렇게 지 기집만 끼고 싸돌아 보라지.“

시어머님은 비수가 꽂힌 마지막 말을 던지고는 휑하니 돌아섰다. 시어머님한테 들을 독한 꾸지럼과 수치심을 이겨내리라 독한 마음을 품고 돌아왔건만, 나의 그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그 무엇은 없었다.

섬이 내가 찾는 신기루 갖기는 했지만, 나를 데려다 줄 완벽한 해도를 가진 남편은 이미 길을 떠나고 없었다. 시어머님은 자신에 대한 화를 이기지 못해 돌아서 나가기는 했으나, 억장이 무너지는 그 가슴에는 나에 대한 길고 튼튼하고 뾰족한 칼을 갈고 있을 것이었다.

 

답답했다.

움직임이 없는 칠월의 섬은 답답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남편이 보이지 않는 집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나는 밖으로 나섰다.

들어올 때 봤던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방에 계신 듯, 이끼가 낀 푸른 기운이 도는 댓돌 위에는 흰 고무신이 올려져 있었다. 돌아온 집에는 바뀐 것이 없었다. 병적이라 할 정도의 결백성을 가진 시어머님은 매일 당신의 흰 고무신을 빠득빠득 문질러 윤기 나게 만들어 신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마당 한 쪽에 덩그러니 놓인 절구나 푸른 빛이 도는 댓돌도 시어머님이 수시로 어우르며 만졌을 것이나, 낡은 고가의 우수나 칙칙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직은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 방문을 열고 쏘아붙이지는 않았지만 이미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고, 이번에는 처음보다 훨씬 더 강한 칼날을 야무지게 벼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석양이 내리는 바다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하루의 붉은 잔광에 어떤 것들은 숨어들고 또 어떤 것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사장으로 가는 길 양 편에는 못 봤던 낮은 키의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급조한 흔적이 뚜렷한 것이 올해를 넘기기 힘들어 보였으나, 그래도 그들은 나름의 운치를 조금씩은 뽐내고 있었다.

발밑에서 모래들이 한 줌씩 흩어졌다 모였다 한다. 모래들은 내 발가락 사이로 하나씩 둘씩 파고 들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눈 내리던 날 나를 지분거렸던 눈송이처럼, 모래들도 겁없이 나의 발밑을 파고들며 애무해댄다.

은밀히 하지만 쉼 없이 모래는 내게 달려들었고, 그들끼리 낄낄댔다. 그것은 수백 수천의 아우성이었고, 또 그만큼의 은밀한 유혹의 속삭임이었다. 바다는 내가 조금도 편안해지지 못하도록 내게 함부로 덤벼들고 있다.

백사장으로 들어서는 조그만 사구에 집에서 보았던 예의 사내가, 바다를 보며 혼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붉은 잔광에 물든 사내의 조끼가 감청의 바다와 어울리며 강한 인상을 주었다. 사내는 아주 묘하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쪽으로 턱짓을 해보였다.

어둠이 내리는 외진 섬의 백사장에는 사내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내의 오라는 듯한 턱짓은 무시하고 천천히 백사장으로 걸어 나갔다. 나의 이런 행동을 사내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게 분명해 보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잔광은 사라지면서도, 흰 이를 드러내며 감추고 있던 백사장의 속살을 조금씩 벗겨내고 있었다. 아득하게 자신을 애무하며 오라고 손짓하는 바다를 받아들이는 백사장을 나는 계속 걸었다.

바닷바람이 차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상쾌했다. 야간조업을 나가는 몇 척의 어선의 불빛이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백사장을 거닐며 나는 다시 돌아올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남편은 나의 안식처였으나, 정작 내가 필요해서 찾을 때는 그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섬을 벗어난 남도의 생활이 권태로운 시간들의 연속이여서 남편을 찾아 돌아왔지만, 나를 기다리는 것은 그 허한 적막감 밖에 없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니 예의 사내가 웃고 있었다. 나는 사내가 나 때문에 비밀의 장원에 빠져들어 흥분하고 들뜨는 그런 호기심에 빠진 것이라 단정지었다.

“얘기 들었습니다. 어머님한테요. 뵈었으면 했어요.”

사내는 어둠에 몸을 숨기며 얘기했다. 사내의 뒤로 검은 산이 조금씩 여린 실루엣을 드러내며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얘기에 일순 긴장했다. 나를 알고 있다는 말과 뵈었으면 했다는 말이 한 영상의 이중자막으로 겹쳐 바다 위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사내에 대해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백사장은 조금씩 짙어져가는 어둠에 몸을 내어주며 웃던 미소를 뺏겨버렸다. 모래는 여전히 나의 발밑에서, 지금까지 보다는 훨씬 자극적으로 나를 자극하며 소리내어 낄낄댔다.

“그래서요?”

사내는 나의 도전적인 응답 때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이 내게 먹혔다는 일종의 헛된 자만심 때문에서인지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냥입니다. 한 두 주 되었습니다, 댁에 묵은 지가. 차일피일 하다 보니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네요. 어머님이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하던데요.”

사내는 얘기의 요점을 교묘히 끌어내는 화술을 지닌 듯 보였다. 시어머님을 어머님이라 부르고, 자신이 묵고 있는 방을 구태여 ‘댁’이라 부르며 시어머니와 나를 함께 엮었다. 이는 사내가 시어머니를 통해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행적을 듣고 알고 있음에 틀림없어 보이나, 비밀을 감추는 마술사처럼, 본인의 얘기는 숨긴 채 내가 섬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묻고 있다.

이제 사내는 검은 실루엣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어둠 속에 자신을 숨겼다. 나는 끊임없이 속살거리는 파도의 속삭임과 대놓고 분탕질해대는 모래의 유혹만 느껴졌다. 대답 대신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섬은 나에게는 신기루이며, 남편은 잡을 수 없는 무지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가 끝없는 사막이라면 신기루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고, 그 신기루는 목마른 자에게는 멋진 낙원일 것이다. 비록 내가 꿈꾸어온 낙원이 실체없는 환영으로 밝혀지고, 그 뒤에 밀려오는 절망감과 고독감이 더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막을 헤매는 내게 신기루는 잡지 않을 수 없는 낙원인 것이다.

“시간은 사람을 쉽게 망각 속에 빠트리죠. 내가 집으로 돌아온 후 한 달여만에 돌아온 남편은 내가 집나간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서요. 그대신 남편은 아주 거칠게 나의 옷을 벗기고는 오랫동안 저를 놓아주지 않았죠..”

사내는 나의 얘기에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달이 구름에 가려 사내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사내가 내 얘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내는 나의 가출과 이런 식의 돌아옴에 대해서 알고 있고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도의 지분거리는 속삭임이 멀어져감에 따라, 바다는 백사장을 거의 다 벗긴 모양이었다.

“남편과 저는 일주일을 꼬박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죠. 그사이 시어머님이 몇 번이나 남편과 저를 불러내려고 했지만, 남편은 그런 시어머님의 요청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죠.”

나는 의도적으로 사내에게 몸을 붙였다. 그 순간 나는 사내가 내 얘기를 들으며 긴장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탄탄한 사내의 근육을 느끼며 나는 얘기를 계속했다.

“여자도 말이죠. 욕망과는 상관없이 몸이 달아오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여자는 모두 창부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욕망과는 전혀 무관하게 서서히 그런 관능의 늪에 빠지게 되는 거죠. 저와 일주일을 보낸 남편은 배를 탄다고 집을 나갔어요. 한달만에 돌아온 남편은 한 주일은 또 저를 껴안고 지내다가 다시 배를 탄다고 나가는 그런 행위를 두 번이나 더했죠. 남편은 배만 타는 운명을 갖고 태어난 것 같아서요.”

나는 사내를 자극하며 말초신경을 건드려댔다. 사내는 파도의 지분거림에 속곳마저 내던지고 나부러져 드러날 듯 말 듯 한 은밀한 달빛의 마사지에 온 몸을 맡긴 백사장을 보고 있었다. 파도를 전초병으로 내세워 어둠 속에 숨는 나부의 백사장을 여린 달빛을 통해 훔쳐보는 바다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느긋한 승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람이 차요.”

나를 쫓아올 때의 그 당당하던 태도가 나의 얘기 때문인지 아니면 도발적인 내 태도 때문인지는 모르나 많이 꺾였다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사내가 일부러 꺾인 채 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덮칠지는 모를 일이었다.

“전 그런 생활이 주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어요. 순간적인 욕망은 참을 수 있었지만, 제 자신에 대해 한없이 외로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어요. 남편이 와도 마찬가지였어요. 말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첫 번째 집을 나간 이후 남편은 저와의 관계에만 빠져들었죠.”

얘기를 하면서 나는 사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나의 몸을 조금씩 더 사내와 밀착시켰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무엇보다 함께 얘기를 나누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그리워진 거죠. 그래서 남편이 세 번째 배를 타러 나간 다음날 저는 다시 떠났어요. 뭍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지만 신기루로 생각했던 이 섬이 갑갑한 유형지가 되었기 때문이죠.”

사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상체를 거의 사내에게 맡기다시피 기댔지만, 사내는 거친 숨소리 외에는 나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피안의 거리만큼 물러선 바다는 달빛에 조금씩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고 있었다.

나는 사내가 중무장한 갑각류 같다고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두텁게 자신을 중무장하고 나의 얘기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그 속에서 혼자 삭이고 있었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는 남도의 거리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났죠. 오랫동안 섬에 갇힌 섬을 벗어낫다는 해방감에 처음 얼마간은 재미있었죠. 반짝이는 네온과 사람,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적당한 양의 음담패설과 욕설, 그리고 욕정까지도 재미있고 흥미 있는 놀이였죠. 하지만 그것들 역시도 시들해지고 무엇보다도 섬에서 느꼈던 마음의 공백이 다시 살아났죠. 남편도 그리워지고요. 어떻게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다시 돌아오기로 했죠.”

나는 얘기를 마치고 사내를 올려다봤다. 사내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데이서울이나 삼류소설의 그렇고 그런 삼류소설의 신파조 얘기를 읽고 났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사내에게 한 얘기가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단지 사내의 반응을 떠보고 사내가 내게 보이는 관심의 실체가 뭔지를 알기위해 좀 더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를 골라 남편과의 얘기를 이어나갔고, 사내에게 내 몸을 좀더 많이 기대는 구체적인 도발 행위를 더했던 것이다. 단지 내가 다시 돌아온 이유, 나도 잘 모르는 그 이유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짙은 구름을 서서히 벗기며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내 주변의 산과 바다와 사내의 모습이 내게 들어왔다.

“며칠 전 댁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사내는 아직도 중무장을 하고 말을 꺼냈다. 사내는 분명히 나의 얘기를 긴장해서 듣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사내가 남편을 만났던, 남편이 사내를 불렀던 간에, 신기루였던 이 섬에서 내가 찾던 남편은 사라져 버렸다.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에 집어넣었다. 숨겨진 가슴은 크고 탄탄했다. 사내는 나로부터 자신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조그마한 유두가 손가락에 들어왔다.

“댁의 남편은 죽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며칠 전에 선박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받아왔다고 했습니다. 조업 중 실족으로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떠나지 못하고 차일피일하고 있다가 당신을 만난 겁니다.”

순간 나는 사내의 유두를 힘껏 비틀었다. 사내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뺐고, 사내에게 기대어 유두를 비틀었던 나는 손을 허적이며 백사장에 자빠졌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바다는 폭풍의 눈처럼 잠시 멋을 부린 달을 밀어내고는 먹구름으로 채우고 있었다. 바다는 속살을 드러낸 백사장에 내어주었던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거센 바람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둘러싸고 은밀히 속삭이던 모래들도 새로이 다가오는 제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내는 잠시 멈칫하더니, 백사장에 나뒹굴어진 내게 다가왔다. 내게 있어 신기루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만, 또 어디에도 없는 신기루이기도 했다.

나는 사내보다 먼저 사내의 목을 끌어안으며 사내의 얼굴을 핥았다. 사내는 예기치 못한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몸을 빼는 척 하다가, 사내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지금까지의 나의 도발적인 행동과 자극적인 말은 이미 사내의 말초신경을 충분히 달궈났을 것이다. 아니면 남편의 죽음을 핑계로 차일피일 떠날 날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이런 식의 나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나를 벗기기 시작했으며 나는 사내의 행동대로 몸을 맡겼다. 사내의 몸에서는 온통 짠 소금내가 났다.

기어코 비가 내리는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사내의 등을 훑은 비는 내게로 흘러내렸으며, 파도의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와 함께 된 사내를 느끼며, 나는 남편의 죽음과 내가 보냈던 남도의 생활을 생각했다.

남편은 결코 실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나를 찾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님이 나를 찾도록 만드는 구실을 주기 위해서 일 것임에 분명했다. 남편은 지난 시간 시어머님의 수절과 나의 방황, 그리고 스스로 풀지 못하는 문제를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기고 간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사내의 입술이 나의 유두를 깨물었을 때 나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냈다. 어둠의 그늘 저편에 가려져 있는 사내는 자신의 환영과 꿈의 상상 속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서두르는 몸짓에서 나의 가출이나 남편의 죽음보다 사내에게도 급했던 것은 나의 몸이었단 것을 알았다. 사내는 이 순간까지 자신의 예리한 발톱을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갈고 있다가, 단숨에 나를 낚아챈 것이다.

사내의 등 뒤로 보이는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사내는 마지막 낚아챔을 위한 그의 행동에 집중했다. 나를 지분거리던 모래 대신에 어느새 점령군이 된 바닷물이 사내 모르게 나의 등을 애무하고는 물러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찼다.

그동안 피안에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바다는 어느 순간 백사장을 점령하고는 모래처럼 꿇어 앉으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나의 유혹에 의한 사내의 복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내의 집요한 음모에 내가 빠져들었다고 생각되는 것처럼, 바다는 역시도 쉬면서 그의 칼날을 세웠고, 모래를 밀어낸 자리에서 애무하며 나의 등에 비수의 날을 꽂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나는 섬뜩한 황홀감에 느꼈다. 사내는 내 몸 위에서 거친 동작으로 나를 학대하고 있었고, 바닷물은 고립된 나의 등을 비수의 칼날로 생채기 내고 있었다.

나는 완전한 고립과 벗어나지 못하는 음모 속에 빠져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내의 등 뒤로부터 파고드는 빗물은 거리낌없이 나의 전신을 핥거나 농락하고 있었고, 바람은 차갑게 돌아서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사내를 밀칠 수가 없었다. 사내는 숨어서 훔쳐보던 나의 모든 욕망을 일깨우고 그의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쫓아 반응하는 미세포로 나를 만들어버렸다. 사내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사내의 숨결이 덮칠 때마다 나는 나를 잊고 아득히 초월해갔으며, 사내는 그런 나를 보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칼을 들이밀었다.

바다는 점점 광포해져 갔으며, 모두는 그만큼씩 흥분해갔다.

 

금방 한기가 들었다.

처음 사내의 몸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몸에서도 온통 소금냄새가 났다. 사내는 단지 내게 소금냄새만 남기고 사라진 이 밤의 어둠이며, 남편은 사라진 신기루였다. 가증스럽게도 나는, 물론 사내의 말이 사실이던 아니던 간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다른 한 남자를 받아들였다. 나는 시어머님의 말대로, 서방을 괴롭히는 화냥년이고 당신의 영혼을 후벼 파는 요귀여서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등 뒤에서 파도는 계속 나를 어루만지며 즐겁게 속삭이고 있다

순간 나는 땅과 떨어진 바다 위에 내 자신이 있음을 알았고, 바다는 계속 자신에게 무릎 꿇기를 강요하며 나를 자신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온 몸에 비늘 같은 소금이 일었지만, 나는 그냥 파도 위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으며 나는 내가 다시 이 섬에 돌아온 이유와 남편의 죽음이 하나가 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신기루는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섬은 다다를 수 없는 신기루이고, 남편은 이미 나의 곁을 떠난 허상이 되고 말았다. 나의 신기루는 무엇일까?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여전히 나를 감싸안고 있었고, 바다는 나를 뭍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고립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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