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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

존재와 인식의 먼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2. 30. 22:00

존재와 인식의 먼 길

 

「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나호열 시집 / 정한용(시인 . 평론가)

 

 

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친숙하며 낯익은 용어 중 하나는 ''서정성''이다. 어찌보면 이젠 낡아빠져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줄 것 같지 않은 이 용어가, 그러나 지금도 많은 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적절한 말이며, 동시에 그럴수록 잘못 이용되는 경우도 흔하다. 객관을 자아화시키되 자아에 의해 굴곡되지 않고, 단지 투영만 할 수 있는 정확한 인식체계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대상의 중간지점 어디쯤에서 우리는 늘 머물게 마련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나호열의 시를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부담감을 지울 수 없다.

사물은 본질과 언어상징이라는 두개의 축 사이에서 변증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시적 인식은 사물이 자아를 향하는 수동성과 자아가 사물을 향해 의미화시키는 능동성의 교차로 이루어진다. 모든 시인이 다 그렇겠지만 이 두 과정 중 어느 하나만이 형상화 과정을 모두지배할 수는 없다. 나호열 시인에겐 이 두 개의 갈등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즉 3·4부에 주로 보이는 존재론적·서정적 인식체계와 1·2부에 보이는 현실적 격절의식 사이에서 시인의 방황은 쉽게 자리잡히지 않을 것 같다. 시집에 실린 시의 배열과 관계 없이 그의 시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나호열 시인의 현실공간은 동화·조화가가 아니라 대립·격절의 세계이다.

 

리모콘의 단추를 누를 때마다

세계의 앞날이나 나의 장래가

순식간에 명멸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물 같은 공포는 쾌감으로 번져가고

눈 앞에 보이는

브라운관에 나타나는 세상풍경이

갈라선 애인 사이같이 서먹해지기도 한다

소녀야, 네가 이어놓은 섬약한 선들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끊겼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는 모른다

ㅡ「티·브이에 관하여」

 

시적자아는 현실에 직접 참여하여 소녀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티·브이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섬약한 선>으로 이어져있다. 티·브이에 나오는 소녀는 <세상풍경>의 구체적 상징인데, 소녀와의 관계의 선들이 <어디에서 끊겨>버리고 결국 자아는 고립되고 만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을 이끌어가지 못함으로 오히려 세상은 그를 억압하는 <이상하게 그물 같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가 내뱉는 많은 말들은 세상을 향하지 못하고 자아를 향해 되돌아올 뿐이다. 시인과 세상 - 사물 사이에 놓여 있는 커다란 단절, 나호열 시인의 인식의 기반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럴 때 세상은 왜곡되기 마련인데, 그가 바라본 세상은 <뒤집혀진>(「바람부는 날」)것이기도 하고, 찌그러진 <빈 깡통>(「통조림」)이 되기도 한다.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역사의 가파른 비탈길을 빈 물통이/요란한 소리를내며 굴러올 때마다/ 우리는 두통을 느끼면서>(「희망의 나라로」) 패배를 인정한다.

인식의 차단에서 빚어진 적절의식은 자아의 소극성이라는 부정적 측면과 동시에 존재를 자아에 의해 굴곡시키지 않고 사물의 자체 힘으로 존재하도록 하는 긍적적인 측면을 동시에 낳는다. 대상은 스스로의 법칙에 의해 서 있으므로 자아와 대등한 위치에서 자아를 감싼다.

 

그곳에 가고 싶다

죄도 사랑도

다시는 올 수 없다

감옥에 갇히는 거다

욕망도

그리움도 제멋대로

섞이고 또 섞여서는

크낙한

사막으로 남는 일이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꿈이 한 발 앞선다.

바로 오늘 일이다.

ㅡ「타클라마칸 ·2」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을 이루는 사막은 앞에서 지적한 나호열의 격절의식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자아가 사회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존재, 혹은 또다른 대상으로서의 존재와의 거리감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인의 모든 <욕망/ 그리움/ 죄/ 사랑 /꿈>등을 묻은 곳이다. 욕망과 그리움이 꿈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죄도 사랑도/ 다시는 올 수>없게 된다. <그곳에 가고 싶다>는 불완전한 희망만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때의 사막은 닿지 못할 꿈의 장소인데, 비록 거기에 닿는다 할지라도 남는 것은 사막의 속성이 던져 주는 그대로 허망함뿐인 것이다. 사막의 꿈은 시인의 것이지만 사막의 사물로서의 힘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즉, 사막은 인식론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특징은 특히 4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나호열 시인은 존재와 인식 사이의 먼 길을 오가는 시인이다. 이 두 개의 극이 가까워질 때 세상에 대한 좌절과 패배가 짙어지고, 이들이 멀어질 때 서정에 물든다. 좌절과 패배 속에는 숨겨진 사랑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지만, 세상의 어두운 벽을 깨지는 못한다. 서정에 잠긴 대상들은 섬뜩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절대적 공간에서 외부로 향하지 않는다. 결국 나호열의 시는 고독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를 감춤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아와 대상을 드러낸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그의 절망은 세상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득한 강

저 편 바라보면

건널 수 없어 나는 좋아라

두터운 침묵의 옷을 입은

미루나무 흔들리듯

꿈꾸기도 황홀하여라

(중략)

건너갈 수 없는 저편

가보지 못한 한마음을 꿈꾸는 일과

노을과 함께

독백을 지우는 일은

기쁨이어라

 

여기에서 세상과의 단절은 <강/ 저편/ 건너갈 수 없음>으로 상징된다. 인용에서 생략된 부분을 보면, 이 때의 강을 <봄날/ 잔기침을 하며 일어서는>소생의 장소이다. 그런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오히려 <두터운 침묵/독백을 지은 일>등을 <황홀하다>거나<기쁨이어라>말한다. 이 황홀과 기쁨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즐거움인가. 그렇지 못하다. 거대한 단절 앞에서 맞게되는 자조의 웃음이나 여기에 보이는 역설적 웃음이 다른 시에도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대와 자신에 대한 적절한 좌절에 빠질 때가 더 많다.

 

바람이 몹시 센 날에는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마주할 수밖엔 없다

사금파리로 부서져 내린 별빛을 밝으며

온밤을 헤메인다 해도

그저 바람을 바람으로 맞이할 수밖엔,

넋두리와 한숨을 버무려

힘을 뺄 수밖엔 없다

나야, 나야 외치며 불러본들

누구도 나 대신 대답할 수 없다.

ㅡ「바람부는 날」

 

바람 솔에서 <나>이외에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별빛/밤/넋두리/한숨>등으로 분산된 <나>는 바람을 <바람으로>마주할 수밖엔 없는 운명이다. 곧 <나-바람>인 셈이다. 자아확인의 방황과 고독이 깔려나갈수록 세상과 <나>는 멀어진다. 이것은 <모든 길이 내 앞에서 뚝뚝 절벽으로. 끊겨져 있었다>(「스물 셋 가을에서 …」)의 인식태도와 일치한다. <조였던 나사가 풀리고/못들이 떨어지고/오늘만큼 썩어가는 무덤들>(「오늘의 뉴스」)을 만나는 것과도 같다.

나호열 시의 또다른 우수한 특징으로 예민한 감각과 관찰력을 들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대상들은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치밀한 대상파악을 바탕으로 하여 그 속성을 존재 자체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우수하다. 간단한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① 소리없이 진군한 소문은

곳곳에 봄을 퍼뜨려 놓고

철없는 아이들처럼

개나리로 피어 있다

ㅡ「추운 봄」

 

② 한 겨울 사물은

눈이 내려야 비로소

눈을 감는다

ㅡ 「한 겨울의 눈은」

 

③ 울지 말아라

지난해 움텄던 자리에

다시 새 잎이 돋고

슬픔 뒤에

따스한 손으로

다시 슬픔이 얹힌다

ㅡ 「가을 나무에게」

 

임의로 추출한 위 구절들은 그의 감각의 예리함을 잘 보여 준다. ①은 봄이 확짝 피었음을 개나리라는 구체적 사물과 순수함 ·유년 등의 상징인 어린이들로 나타낸다. ②는 눈이 덮여 단순해진 세상에서 사물들이 내면으로 눈뜸을 절실하게 표현해 준다. ③은 슬픔위에 새로이 얹힌 슬픔이 새 잎이나 따스한 손을 통해 구체화된다. 모두 정태적인 이미지들을 동적으로 바꾸어 표현함으로써 생동감과 함께 생명력을 띠게 한다. 이미지 결합의 독특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도하게 사용이 될 때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두 가지로 요약하여 그의 시의 표현상 결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이미지 변화의 수법이 시집 전체를 통하여 단조롭게 전개됨으로, 시 한 편마다에서 느낀 긴장감이 시집 전체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지 변형이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의미화되어 개인상징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단점을 다음의 예에서 확인한다.

 

① 나도 산으로 가야 하는데

부끄러워라

어리석은 양초 몇 자루

되돌아올 지도

ㅡ 「깊은 산에서의 일박」

 

② 육십사 킬로에서 육십오 킬로그램 사이를

개펄처럼 오락가락하는

이 무게

ㅡ 「몸무게」

 

①의 구절에서 <어리석은 양초>는 인용되지 않은 시 전편을 세밀히 읽어보면, 거대한 산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작고 하찮은 길잡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때의 양초는 전체 의미의 확신이나 연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부적절한 비유이다. ②의

경우에도 <개펄처럼 오락가락>한다는 비유가 몸무게가 늘 고정되 있다는, 그래서 변화없고 단조롭다는 의미를 갖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위의 구절은 단순히 언어로 드러난 것일 뿐인데, 상상력의 전개와 시 구조의 전개에도 이러한 무리한 의미화가 따를 경우 시는 실패작이 되는 셈이다. 다행히 나호열 시인의 경우는 그 위험성을 감각의 예민함으로 극복하고 있다. 표현방법상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장점으로 지적한 감각과 관찰력의 예리함은 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전개되는데 반하여, 결점으로 지적한 지나친 작위적 의미화는 존재를 인식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빚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도 나호열 시인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파악할 때 그 시세계를 옳게 드러내는 시인인 셈이다.

그에게는 존재와 인식 사이에 놓인 먼 거리감이 두꺼운 절망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그 방황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아와 현실대상을 확인하고 있다. 모든 시인이 그러하듯 대상은 확연하게 명확한 의지로 시인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존재와 인식 사이에 깊게 드리운 늪을 어떻게 헤쳐내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호열 시의 자장은 방황과 모색으로 점철될 것이며, 절망의 깊이에서 아름다운 존재들을 그려낼 것이다. 세계관의 비극성이 지나친 허무에 경도되지 않는다면, 방황은 삶을 빛나게 하는 한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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