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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0. 1. 00:37

[임요희의 요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스카이데일리2023-09-30 10:51:21

백지 / 나호열 시인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  백지(2007)/ 나호열

▲ 백지는 없다. 백지의 전생 위에 빼곡하게 쌓인 흰 눈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백지만큼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도 없을 것이다

꼭꼭 감추어진 백지의 전생을 캐내는 일

지워진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을 찾아내는 일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백지는 눈 내리는 하늘이고

건너지 못하는 강이고

눈밭에 하염없이 새겨진 발자국이고

눈 그 자체이다.

 

백지는 없다

백지의 전생 위에 빼곡하게 쌓인 흰 눈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외로움을 하얗게 지운 눈송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밭에 쓴 글자들을

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요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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