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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혼자 커가는 그리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4. 18. 11:40

 

, 혼자 커가는 그리움

권애숙 (시인)

 

 

어느 계절이 좋아요?”

언젠가 누가 불쑥 물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4계절 열두 달이 휙휙 전신을 디디고 지나갔습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가수 빅뱅의 노래 봄여름가을겨울, 겨울에 당도해 있는 어떤 이의 전생 같은 계절들이, 겹쳐 흘렀습니다. ‘생은 이런 것이야하는 듯 웃으며, 울먹거리며, 생의 희로애락을 보편적인 상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인접한 것들은 서로에게 스며들어 많든 적든 간섭을 합니다. 한 줄에 연결된 혈육처럼. 사계 역시 서로 연결고리로 이어져 앞뒤의 계절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지요. 봄에 태어난 것들에선 겨울의 냄새가 많이 묻어 있습니다. 겨울의 차고 매서운 추위를 건너왔기에 또 어떤 계절에도 바통을 넘겨줄 수 있는 힘이 있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봄은 생명의 시작이며 끝이며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계절마다 좋은 이유는 많지만 저는 어느 계절보다 차고 매운 겨울이 좋습니다. 군불을 땐 따뜻한 온돌방, 화롯불에 묻어둔 고구마, 밤새 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걷기, 동무들과 즐기던 썰매타기, 뭐 그런 추억 속 겨울 같은 것도 좋지만 그 무엇보다 가진 것 다 떨어낸 겨울 산야가 좋습니다. 바닥까지 훤한 시원함이며 텅 빈 곳으로 내려와 앉는 철새 떼의 소리까지 맑게 보여주는 철이니까요.

달리는 길에서 바라보는 겨울산은 어딘가로 내달리는 커다란 얼룩말입니다. 찬 하늘을 향해 갈퀴를 세운 채 꿈틀거리는 얼룩말의 등 너머를 바라보며 드디어 소리 없이 터질 봄을 생각합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먼 곳으로부터 일어나는 기척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더러 손발이 얼기도 하겠지만 기대와 희망이라는 구간에 들기 위해선 겪어야할 아픔도 있겠지요.

 

이파리 하나 달리지 않은

나뭇가지가

툭 하고 부러졌다

무엇인가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 목 부러진다 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나호열 시  어느 봄날에 일어난 일전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보다 더한 희생이 있을까요. 그것이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부분이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전부입니다. 부분을 잃었을 때나 전부를 다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한 채 사라진 이름들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남은 이름들은 봄이란 품으로 더 큰 아픔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봄은 그저 오는 게 아닙니다. 산 너머 남촌에서 그냥 불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아름답게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이에겐 꽃의 시절이지만 어떤 이에겐 아픈 피의 시절이기도 합니다. 피도 신음도 흘리지 않고 툭, 부러져준 누군가의 죽음까지 품고 있는 봄은 그러기에 그보다 진한 희망을 앓습니다. 절망을 희망 쪽으로 밀어 올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이 있는가

굳센 팔이 있는가

어디 힘차게 디딜 다리 힘이 있는가

견고한 땅을 밀어내며

얼굴을 내미는 새싹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으로 말미암아 땅의 틈새가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침묵을 조금씩 들어올려

이윽고 땅의 틈새로 하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눈먼 채로

벙어리인 채로

혼자 커가는 그리움처럼

  -나호열 시 새싹을 노래함전문

 

, 하면 새싹을 연상할 만큼 봄과 새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새싹은 새로 돋아나는 싹으로 여리고 약함의 대표적인 이름입니다. 눈도 팔도 다리도 굳세지 않지만 모든 사물의 근원이며 힘 센 시초가 됩니다. 이 봄의 상징인 새싹은 그저 봄이 열어준 틈새를 기다리거나 그 틈새로 얼굴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얼음으로 덮여있는 침묵들어올려’ ‘하늘받아들인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봄이 봄 같지 않다고 합니다.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며 변화는 자칫 위기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기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보다 희망 쪽으로 길을 내야하지 않을까요. 한 쪽에서 목을 매는 이름이 있다면 한 쪽에선 눈 먼 채로/ 벙어리인 채혼자 그리움을 키우는 이름이 덜컹거리고 있을 테니까요.

 

나호열 시인의 시편들 속 봄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주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 채로 산화하는 꽃들’ ‘불임을 꿈꾸벚꽃 축제, ’아직 몽우리조차 움트지 못한 나무들과/ 칼을 입에 물고 있는 개울물, 마곡, ‘두 손 공손히 받쳐 들어/ 혼자 마음 붉히는매화.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제비꽃이 보고 싶다. 대부분 홀로 매서운 겨울을 견딘 것들이며 스스로 봄이 된 것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시인의 봄은 어떻게든 새 모습으로 모퉁이를 돌아옵니다. 부러진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거나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훨훨 날아 그 어떤 수식도 가당찮은 모습으로 옵니다. 언 몸도 언 역사도 다 넘어온 봄은, 홀로 그 혹독한 겨울의 얼음장을 들어 올리며 당도한 봄은, 그 내공이 엄청납니다. 지난한 겨울을 보내며 천천히 펼치는 봄의 살풀이는 경건하고 신중하며 장엄합니다. 시인의 봄을 믿습니다.

 

 

작가와 사회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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