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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비애에 대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9. 16:40

비애에 대하여

나호열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에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걱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톳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서범석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시집 안부, 밥북, 2021.

 

<시 읽기>

 

비애에 대하여는 시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며 그것을 강조한다. 누구의 비애인가. 시의 서정적 자아는 베틀을 객관적 상관물로 그리고 있다. 그것은 현재 늙고 구석진 골방에 있는 소외된 존재이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과거도 고된 한숨의 시간이었음을 안다.

생산의 주체인 주인이 없는 베틀은 이제 수동태의 긴 문장일 뿐이다. 능동적인 그 무엇도 할 수 없이 골방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이역에 서 있는 삐걱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나가는 급행열차(주인 = 과거 = 고전적 가치)를 다만 응시하다 놓칠 뿐이다. 망연한 한숨으로 주인이 그리울 뿐이다.

문화나 역사의 시간차에서 느끼는 지식인의 적막의 깊이를 버려진 베틀로 형상화하여 아름다움의 높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범석. 대진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 시인, 문학편론가)

 

[출처]나호열, 비애에 대하여|작성자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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