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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마을 경남 의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13. 10:29

용이 승천하듯 솟은 ‘460살 자송령’… 위풍당당한 노거수 ‘거 참 잘생겼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2-13 09:05
  • 업데이트 2025-02-13 09:41

의령 가례면 운암리 상촌마을의 소나무 자송령. 의령에는 천연기념물 나무가 넷이나 되지만, 그것보다 한 급 아래 보호수인 이 나무의 자태가 훨씬 더 근사하다. 특히 구불구불한 잔가지들이 그려내는 조형미가 인상적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뿌리깊은 나무 마을 경남 의령

1982년 보호수된 운암리소나무
멀리서 봐도 균형잡힌 수형 자랑
하늘 향한 실핏줄같은 가지 으뜸

의령=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축적된 시간을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건 ‘나무’다. 나무는 제가 살아온 유장한 시간을 보여준다. 다 그런 건 아니고, 크고 오래 사는 나무들이 그렇다. 이를테면 소나무나 은행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같은 나무들이다. 늙고 큰 나무를 일러 ‘노거수(老巨樹)’라 부른다. 나무는 늙으면 더 크고 장엄해진다.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 그늘도 깊고,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압도적이고, 견뎌온 세월만으로도 능히 존중받을 만하다. 그런 나무를 만나러 간다. 경남 의령으로 가는 길이다. 상서로운 기운과 영험을 가진 몇 그루의 노거수가 그곳에 있다.

멀리서 본 자송령의 모습.

# ‘나만의 여행지’가 좋은 이유

경남 의령에는 여행자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 ‘의령으로 여행 간다’는 말을 주변에서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으신지. 여행은 고사하고 정체성도 희미한 지경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의령의 위치를 단번에 정확하게 찍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령은 경관도, 역사도 이렇다 할 게 없다.

외지 사람들에게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은 건, 의령에는 이른바 ‘전국구 명소’가 없어서다. 사실 의령에도 ‘의령 8경(景)’이 있긴 하다. 한번 보자. 충익사, 자굴산, 봉황대, 수도사, 벽계관광지…. 어느 한 곳 낯익은 곳이 없다. 가려 뽑은 8곳의 명소인데도 여행깨나 가봤다는 이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곳들이다. 하지만 이름난 명소가 없다고 해서 ‘좋은 여행지’가 못 되는 건 아니다. 대중적인 인기 여행지는 될 수 없을지언정, 관심과 취향이 딱 맞는 ‘나만의 좋은 여행지’일 수 있다.

여행지에 관한 한 가장 소망스러운 경우는 ‘나만의 좋은 여행지’다. 최상은 관심사와 취향이 딱 맞아서 나는 알아보되, 다른 사람들은 그 매력을 잘 몰라보는 경우다. ‘나만의 좋은 여행지’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다.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다들 거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나만의 명소를 갖는다는 건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자기만의 소중한 보석을 갖는 것과 비슷하다. 경험으로 미뤄보면 그런 곳은 얼마든지 있고, 누구든 발견할 수 있다. 그게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모두 다 비슷비슷한 대중적 여행지만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낯선 곳을 여행하는 건 용기다. 그 용기의 가장 큰 효능은 의무감을 지우는 데 있다. 경주에 가면 불국사를 가야 하고, 전주에 가면 한옥마을을 빼먹지 말아야 한다. 강릉에서는 경포대를, 강진에서는 다산초당을 건너뛸 수 없다. 가는 곳마다 먹어봐야 할 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의령에는?

의령에는 ‘꼭 가야 할 곳’이란 없다. 꼭 가보거나 꼭 해볼 것에 대한 의무감이 없다는 얘기다. 알려지지 않을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의무감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지향하는 로망이 ‘익숙한 일상의 반대’ 쪽에 있다고 보면, 이런 자유로움이야말로 여행의 본질적인 즐거움의 바탕이다. 무명(無名)의 여행지에는 ‘규정해놓지 않은’ 공간을 보고 느끼는 자유로움이 있다. 무명의 여행지는 우리에게 ‘시선의 자유로움’을 주고 ‘해석의 여지’를 부여한다. 한 명의 ‘능동적인 여행자’로 그곳을 여행하게 해준다는 얘기다.

# 4그루 천연기념물, 2그루의 보호수

그나마 의령에서 이름난 명소라면 ‘솥바위’다. 조선 시대 한 도사의 예언대로 솥 모양의 바위 주변 20리 안에서 내로라하는 재벌기업 총수들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쌀을 담는 솥은 부(富)를 상징한다. 솥바위는 ‘다리 셋 달린 솥’을 닮았다는데, 부자가 난 땅이 솥바위의 다리 셋이 가리키는 방향이란다. 바위에 깃든 어떤 영험함이 주변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이런 작명의 바탕이다.

새해 인사 중 최고의 덕담이 ‘부자 되세요’였던 시절을 기억하시는지. 생각해보면, 솥바위에 세상의 관심이 쏟아지던 때가 딱 그 무렵이었다. 의령군이 내세우고 있는 관광 캐치프레이즈는 지금도 ‘부자 1번지’다. 의령군의 재정자립도는 7.7%. 경남의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꼴찌다. 주머니 사정이 가장 안 좋은 곳이 부자 1번지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구호가 ‘여행의 재미’ 차원이고, 부(富)의 의미가 ‘축재(蓄財)’보다는 ‘부에 따른 책임과 의무’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부자 마케팅은 어쩐지 좀 불편한 부분이 있다. 의령에서 솥바위 얘기는 여기까지만.

몇 번의 여행을 통해 의령에서 발견한 건 ‘나무’였다. 의령에는 네 그루의 천연기념물 노거수가 있다. 소나무와 느티나무, 은행나무, 감나무 한 그루씩이다. 여기다가 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한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를 더 보탠다. 특별하게 많은 건 아니지만, 의령의 노거수들은 하나같이 자태와 위용이 대단하다. 의령에서는 천연기념물과 보호수가 아니라도, 마을 어귀에 우람한 당산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 카메라 앵글로 보는 나무의 아름다움

의령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네 그루 나무를 다 제치고,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나무가 있다. 가례면 운암리 상촌마을의 ‘자송령’이다. ‘운암리 소나무’라고도 불리는데, 밀양 손씨 집성촌인 마을에서 좀 떨어진 자굴산 자락 아래서 홀로 자란다. 먼발치에서도 ‘거참, 잘생겼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균형 잡힌 수형을 자랑한다. 등 뒤의 자굴산이 북서풍을 막아줘서 그럴까. 나무는 건강하고 어느 한 곳 훼손된 곳 없이 잘 자랐다. 초록의 잎 색도 좋고, 수세도 힘차다. 보호수로 지정된 1982년 당시 추정 수령이 420년이니, 지금 기준으로는 460살쯤 된 할아버지인데도 말이다.

자송령은 나무 아래로 들어가서 서 봐야 비로소 진면모를 볼 수 있다. 가장 큰 탄성은 나무 밑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에서 나온다. 노거수 특유의 위용이나, 용의 비늘 같은 둥치의 붉은 수피도 훌륭하지만 하늘로 뻗은 실핏줄 같은 가지들이 보여주는 구불구불한 선의 조형미는 단연 압도적이다.

자송령을 잘 보는 요령이 있다. 카메라를 꺼내 드는 것이다. 카메라가 없다면 휴대전화로 찍어도 좋다. 카메라의 목적은 ‘좋은 사진’이 아니라 ‘앵글을 통해 보는 다양한 시선의 경험’에 있다. 소나무의 구불구불 휘어진 조형미 넘치는 가지를, 사진에 담다 보면 ‘다양한 구도’를 경험하게 된다. 나무가 그려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흠뻑 느껴볼 수 있다. 날씨나 빛의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느낌도 더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그냥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카메라를 들면 마술처럼 보인다.

# 땅을 움켜쥐고 자라는 소나무

의령에 잘생긴 노거수 소나무가 한 그루 더 있다. 정곡면 성황리 뒤편 야트막한 언덕의 비탈에서 자라는 천연기념물 ‘성황리 소나무’다. 철갑 같은 수피를 두르고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노거수다.

성황의 본딧말은 ‘서낭’이다. 나무가 가져다 쓰는 ‘성황’이란 마을 이름은 근처에 서낭신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거나 굿을 하는 서낭당이나 서낭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것. 마을 서쪽으로 넘어오는 고개쯤에 서낭신이 깃들어 있는 늙은 나무가 있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당집이나 나무가 사라진 뒤에도 서낭의 이름이 남아 있는 건 근처에 있던 서낭당이 필시 ‘기도발’이 잘 받았기 때문이리라.

성황리 소나무를 멀리서 보면 여러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난 반송(盤松)으로 착각하기 쉽다. 꽉 찬 가지와 잘생긴 수형 때문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 굵은 밑동에서 뻗어 나온 3개의 굵은 가지가 나무 전체를 이고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무에서는 굵은 선과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성황리 소나무는 자송령보다 더 크다. 키가 13m가 넘고 가슴 둘레도 4.8m에 달한다. 눈길이 가는 건 땅 위로 드러난 우람한 둥치와 울퉁불퉁한 뿌리 부분이다. 사방으로 뻗은 나무의 뿌리 부분이 땅을 꽉 움켜쥔 모습을 보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라도 마을을 향해 슬슬 기어 내려올 것만 같다.

지금은 죽었지만, 성황리 소나무 옆에 또 다른 소나무 노거수가 있었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암나무라 불렀는데, 오랫동안 수나무인 성황리 소나무와 단짝이었단다. 일제강점기,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암나무와 수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으면 광복이 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실제 두 나무의 가지가 닿았고, 광복도 이뤄졌다. 소원이 전설이 되고, 전설이 또 현실이 되니까 이야기는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나무의 두 가지가 맞닿으면 ‘남북 통일이 된다’는 것이었다. 가지가 맞닿기도 전에, 암나무가 그만 죽어버렸으니 바뀐 이야기의 결말은 허탈하다.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 때 북을 매달아 치고 의병을 모았다는 느티나무 현고수(懸鼓樹). 둥치와 가는 가지만 남은 쇠락한 나무의 형상이 마치 걸어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임진왜란때 북 매달았던 ‘현고수’
곽재우 장군이 의병들 불러 모아
마치 달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 북을 매달았던 의병의 나무

의령에서 가장 이름난 나무라면 단연 ‘현고수(懸鼓樹)’다. 무슨 나무 이름이 이러냐고? ‘매달 현(懸)’에 ‘북 고(鼓)’ ‘나무 수(樹)’자를 쓴다. ‘북을 매단 나무’란 뜻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9일째 되는 날,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이 나무에 매단 큰북을 두드려 의병을 모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고수가 있는 유곡면 세간동은 곽재우 장군의 고향이자 임진왜란 의병의 발상지다.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본진을 두고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군의 진격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당시 의병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의령군이 해마다 여는 의병제전 전야제 때 이곳에서 성화(聖火)를 채화한다. 2020년부터 ‘홍의장군 축제’로 이름을 바꿔 단 채 계속되고 있는 의병제전은, 올해 50주년을 맞는다.

현고수는 나무의 수령이나 수형, 특성 혹은 자원적 가치보다는, 인문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천연기념물이 된 경우다. 나무에 깃든 이야기는 풍성하지만, 사실 나무의 외형은 보잘것없다. 풍성한 가지와 아름다운 대칭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 밑동에는 큰 구멍이 생겼고, 전신은 상처투성이다.

나무는 쇠잔한 모습이 역력하다. 굵은 가지를 죄다 쳐내서 몸뚱이만 남은 듯해 볼품이 없는 데다, 그나마 앙상하게 남은 가지의 수세가 작년 다르고 올해 또 다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거기 이러이러한 나무가 있었다’는 기록으로나 남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앙상한 비대칭의 나무는, 보는 자리에 따라 모양이 다르다. 보호 철책 주위를 빙 돌다 보면 나무가 ‘달려가는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는 자리가 있다. 굵은 둥치에서 뻗은 두 개의 가지 형상이 달릴 때 두 팔로 앞뒤로 흔드는 모습을 빼닮았다. 그렇게 휘적휘적 수백 년을 건너온 나무가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 스러져 가는 나무 앞에서, 힘차게 가지를 뻗고 거대한 그늘을 드리웠던 시절을 생각한다. 둥둥둥 북소리와 그 북소리에 모인 의병의 함성과 기개를 생각한다.

남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암자 불양암. 따스한 볕이 쏟아지는 근사한 자리에 있다. 불양암 관음전 바로 위쪽에 탑바위(오른쪽 사진)가 있다. 돌기둥 위에 구들장 돌판을 얹어놓은 것처럼 생긴 바위다.



기도 잘 들어주는 서낭당 소나무
낙지 발 같은 신포마을 느티나무
겹겹이 쌓인 시간의 美 고스란히


# 은행나무보다 키 큰 감나무

현고수가 있는 세간동에는 곽재우 장군의 생가도 있다. 사실 말이 생가지, 정확한 집터나 건축양식에 대한 고증 없이 지은 것이어서 기념관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2005년 문을 연 생가는 조선 초기 양식으로 안채, 사랑채, 별당, 큰 곳간, 작은 곳간, 대문, 문간채 등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양반가로 지어졌다. 전시 공간보다는 교육장 활용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어서 생가 건물도 민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서 어색하다.

생가 앞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다. 은행나무 노거수 중에서 드물게 좌우 대칭의 균형미 넘치는 수형을 자랑하는 나무다. 높이 24.5m에 가슴높이 둘레가 10.3m에 달할 정도로 나무가 우람해서 단풍 드는 가을이면, 떨군 이파리가 일대를 다 노란색으로 물들인다. 지금은 짙은 먹색의 수피와 잔가지의 흰색이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워낙 압도적인 크기의 노거수라 의령의 나무 중 가장 이른 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정곡면 백곡리에는 흔히 볼 수 없는 감나무 노거수가 있다. 유실수가 노거수로 천연기념물이 되는 건 극히 드문 일. 그만큼 백곡리 감나무는 귀한 구경거리이다. 보통 감나무는 200∼250년쯤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백곡리 감나무는 이의 두 배쯤 되는 500년 수령의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이자, 감나무로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백곡리 감나무는, 보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거대하다. 감나무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 감나무의 높이는 28m. 곽재우 생가 앞의 은행나무보다 키가 4m쯤 더 크다. 감나무가 노거수 은행나무보다 키가 더 크다는 게 믿기시는지. 2023년 가을에 백곡리 감나무에는 50여 개의 감이 열렸다는데, 올해는 감이 열리지 않았다.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백곡리 감나무는, 크기와 건너온 시간만으로 마을 주민들로부터 영물 대접을 받고 있다.

찾아가볼 만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칠곡면 신포리에 있다. 신포마을의 논과 논 사이의 들판에 활개치듯 서 있는 ‘신포마을 느티나무’다. 여느 느티나무와는 달리 밑동에서 여러 가지로 뻗은 모습이 독특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의 수형을 두고 ‘낙지를 거꾸로 박아놓은 모습’이라고 했는데, 나무를 보고 무릎을 쳤다. 뒤로 물러나서 보면 딱 그런 모습이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가지들이 거꾸로 처박힌 낙지의 발처럼 보인다. 신포리 느티나무의 수령은 560년 남짓. 시간과 기운이 느껴진다.

# 불양암과 탑바위, 거기서 비는 소원

의령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곳을 더 보탠다. 나무를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다. 먼저 강과 어우러진 그윽한 풍경의 암자 얘기. 정곡면 죽전리 호미산 아래 남강변에는 암자 ‘불양암’이 있다. 이름을 처음 듣고는 불경스럽게도 ‘불량(不良)’을 떠올렸는데, 가보니 ‘불양(佛陽)’이다. 호미산(虎尾山)은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는 산. 그래서 그런가 능선은 길되 산은 그리 높지 않다. 능선에는 주차장이 있어 차로 갈 수 있다.

능선을 계단 몇 개로 넘으면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지는데, 가파른 계단 길 끝에 불양암이 있다. 불양암은 1946년에 창건한 비구니 스님의 참선도량으로 해인사의 말사다. 해방 직후 어지러운 시절에 누가 이런 거친 자리에다 불사를 했을까. 아슬아슬한 바위 벼랑의 막다른 길 끝에 딱 붙여 지은 관음전과 관음전 가는 길 옆에 딱 붙여 지은 요사, 그리고 자그마한 산신각이 암자의 전부다. 강변을 끼고 있는 적요한 암자는 허름하지만 경관도, 정취도 훌륭했다.

불양암 위쪽에는 탑바위가 있다. 커다란 바위가 아랫부분을 받치고 그 위로 구들장 같은 돌판이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 사실 불양암보다는 탑바위가 더 이름났다. 본래 바위는 쌍탑으로 ‘암탑’과 ‘수탑’이 있었다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게 수탑이다. 사라진 암탑에 대한 전설이 있다. 일제강점기 산 아래 백산마을에서 장애인이 자꾸 태어났단다. 도인에게 물으니 흉사의 원인으로 지목한 게 탑바위였다. 마을 사람들은 한밤중에 탑 하나를 부숴버렸는데, 탑을 부수다가 두 사람은 강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사람들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 뒤로 백산마을에 재앙이 사라졌단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주민들은 탑바위에서 소원을 빌었단다.

탑바위는 강변의 벼랑 안쪽 깊숙한 자리에 숨듯이 서 있다. 바위 앞에는 전망 덱이 놓여 있다. 거기 오르면 탑바위와 그 너머로 강이 보인다. 탑바위 바로 아래가 불양암이다. 암자는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탑바위의 영험함에 마음을 기대서 지은 것이리라. 전망대에는 ‘여기서 빌면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설명이 씌어 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야 ‘솥바위’에서나 어울리는 것일 테고, 이곳에서는 무엇을 빌어야 할까.



■ 의령남씨 소나무

정곡면 성황리는 대대로 의령 남씨 집성촌이다. 성황리 소나무가 ‘의령남씨 소나무’라고 불리는 이유다. 성황리 마을에는 남상순 추모비가 있다. 정곡면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1914년 8월 일제가 주민들이 경작하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해 측량을 감행하자 이를 방해하다 체포됐다.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한다’며 반발했던 그는 소요죄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성황리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정부는 200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