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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희망 품으러 가는 삼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1. 23. 15:32

민화 한점 술 한잔… 동해바다서 한해를 다짐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1-23 09:09
  • 업데이트 2025-01-23 09:40

삼척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민화 호작도(虎鵲圖). 호랑이와 까치를 그린 호작도는 신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마음으로 문에 붙이거나 선물하던 그림 풍속인 ‘세화(歲畵)’의 단골 그림이다. 집을 지켜주는 강한 호랑이와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까치를 함께 그려 가정의 평안과 기쁨을 기원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새해 희망 품으러 가는 삼척

100년전 ‘민화의 전설’ 살던곳
박물관엔 대표작 ‘효제문자도’
4개 고사성어 뜻 새겨 읽는 맛

봉황산 미륵불의 투박한 매력
미륵바위 해하려 하면 ‘재앙’
민중 안식처…새해 소원 빌기도

불 써서 빚는 100일 숙성 ‘불술’
담황색 빛깔에 감칠맛·향 일품
대량유통 안하고 단돈 5000원

삼척=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민화(民畵)는 순수한 매력을 가진 민중의 그림이다. 비율도 맞지 않고, 때론 과장되기도 해서 어색하지만 정감이 간다. 사대부들이 그린 문인화를 클래식 음악으로 비유한다면, 민화는 저잣거리의 백성들이 흥겹게 흥얼거리던 대중가요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정서에 공감하기도 하고, 따라 부르기 쉬운 대중가요 말이다. 설날을 앞두고 신년의 여정을 민화 얘기로 시작하는 건 민화가 가진 ‘벽사(피邪)’의 의미 때문이다. 벽사란 액(厄)을 물리치는 액막이의 의미다. 강원 삼척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화가가 제 이름을 당당히 적어 넣은 민화와 흉사를 막아주던 오래된 미륵, 그리고 새로 빚은 마음으로 담은 술 얘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이야기의 뜻은 다른 게 아니다. 재앙에 가까운 신년의 혼돈을 털어내고 다시 을사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여행으로나마 되새겨 보자는 뜻이다.


삼척해수욕장 해변. 여기가 삼척을 대표하는 바다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바다가 근사한 데다 이름난 식당과 운치 있는 카페도 가득해서 겨울철에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 삼척은 독보적인 민화의 도시

삼척은 독보적인 민화의 도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삼척에서 활동했던 두 명의 민화작가 때문이다. 황승규와 이규황. 100여 년 전쯤 삼척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 두 사람을 길잡이 삼아 민화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본디 민화는 작가가 드러나지 않는 그림이다. 민화는 기원을 담은 부적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책을 가까이하는 마음을 위해 책가도(冊架圖·책꽂이 그림)를, 출세를 기원하며 어변성룡도(魚變成龍圖·물고기가 용이 되는 그림)를 집에 걸었다.

민화는 ‘소비자 중심’이다. 필요에 의해 주문을 받고, 그에 맞춰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개성이나 독창성이 발휘될 여지는 없다. 표현이 직설적이고 기교도 서툰 편이라 민화를 보는 사회적 인식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민화작가들이 구태여 그림에 제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드문 예외가 있다. 민화 작품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삼척에서 활동하며 ‘황 노인’으로 불렸던 석강 황승규다. 민화에 이름을 써넣었다는 건 곧 긍지와 자존감의 표현이었다.

황승규는 1886년 경북 울진 출신으로 어려서 삼척 근덕으로 이주했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칠능(七能)’이라 불렸다. 시(詩), 서(書), 화(畵), 기(棋·바둑), 주(酒), 재담(才談)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 민화의 전설이 그린 병풍을 보다

황승규는 ‘이 초시 어른’으로 불렸던 이규황에게 민화를 배웠다. 이웃 마을에서 대대로 민화를 그려온 집안의 후손 이규황은 황승규보다 18살이 많았다. 자기 아들 종하에게 민화를 가르치던 이규황은 황승규에게 아들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황승규는 독보적이었다. 불과 6개월여 만에 더 배울 것이 없었던 황승규는 독학으로 그림과 글씨를 수련했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금세 유명해진 황승규에게는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 그는 꽃과 새를 그려 넣는 혼수용 병풍은 물론이고, 제사 때 쓰는 제병(祭屛)이며, 아낙네들이 쓰는 가림 병풍까지 닥치는 대로 그렸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택된 이들만 할 수 있었던 사찰 단청 작업에도 참여했다. 오대산 월정사의 단청에도, 근덕면 신흥사의 단청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일은 많았지만 정작 수입은 보잘것없었다. 황승규가 만든 10폭짜리 병풍 한 틀의 가격은 쌀 3∼4가마니쯤이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만들면 보름 정도, 옥양목이나 천에 그리면 한 달쯤 걸렸으니 그저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먹고살자면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황승규가 남긴 병풍만 수백 점이 넘을 정도로 흔한 건 그래서다.

그가 생전에 가장 많이 그린 민화는 ‘문자도(文字圖)’다. 그가 문자도를 많이 그렸다는 건 주문이 많았다는 뜻일 테고, 주문이 많았던 건 곧 작품의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 문자에 뜻과 그림을 새기다

문자도는 글자의 의미와 관계있는 고사 등을 한자 획 속에 그려 넣어 서체를 구성한 그림을 말한다. 문자도 중 가장 흔한 것이 ‘효제(孝悌)문자도’다. 효제문자도는 유교 철학의 기본 윤리를 집약한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여덟 글자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로 8폭으로 구성되는 병풍과 구성이 딱 맞아떨어져 병풍이 유행한 조선 후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지금 삼척시립박물관에 가면 황승규가 그린 효제문자도를 볼 수 있다. 병풍 한 폭에 각각 한 글자씩을 써넣고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담았다. 이를테면 ‘효(孝)’ 글자 위에 쓴 4개의 고사성어가 이렇다. 대순탄금(大舜彈琴·순임금이 눈먼 아버지와 계모, 이복동생의 구박에도 효심을 지켰다). 왕상빙리(王祥氷鯉·진나라 선비가 계모를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았다). 맹종읍죽(孟宗泣竹·오나라 맹종이 한겨울 눈 속에서 뜨거운 눈물로 죽순을 자라게 했다). 황향선침(黃香扇枕·후한 때 황향이 부친 이부자리를 여름에는 부채로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자기 몸으로 데웠다). 고사(故事)의 뜻을 새겨야 진면모가 보이는 문자도는 보는 게 아니라 ‘읽는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을사년 정초에 삼척시립미술관을 찾아서 글자마다 ‘관계 속에서 사람 된 도리’를 담은 황승규의 효제문자도를 보고 신년의 다짐을 새겨보면 어떨까.

근덕면 동막리 7번 국도변에는 황승규 생가가 있다. 생전에 그가 손수 고쳐 지은 집이다. 생가 건너편 언덕 위에 그의 묘가 있다. 여기 살던 황승규는 삼척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손주를 보러 40리 밤길을 걸어 하숙집을 찾아가 등교하는 손주를 보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지극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손주가 소장하고 있는 황승규의 ‘최고 걸작’이라는 10폭짜리 관념산수도는 이런 마음으로 그려 손주에게 준 그림이라는데, 수소문해 봤지만 볼 수 없었다. 시립미술관에서 그걸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살기 막는 석인이 미륵이 되다

‘비단같이 아름다운 물결’이란 뜻의 ‘정라(汀羅)’라는 이름이 삼척에서 자주 보인다. 조선 시대 삼척에는 동해안 수군사령부 정라진(汀羅陣)이 있었다.

삼척의 중심 격인 남양동과 정라동에 걸쳐진 봉황산 동남쪽 아래는 조선 시대 사형장이 있었다. 정라진 수군의 죄수들은 재판을 마치고 여기로 압송돼 형을 집행당했다.

마을 주위에 사형장이 있었으니 그걸 꺼림칙하게 여겼던 건 당연한 일. 주민들 사이에서는 죽은 죄인의 사악한 기운이 봉황산을 넘어 마을 쪽으로 내려온다는 불안한 소문이 번졌다. 때마침 흉흉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보다 못한 삼척부사가 나섰다. 1835년 삼척부사 이규헌은 사형장 주변의 살기(殺氣)를 막기 위해 석인상 3기를 만들어 봉황산 꼭대기에 세웠다. 그 뒤로 마을의 재앙이 사라졌단다. 이후 1857년 주민들은 석인상을 마을과 가까운 봉황산 자락으로 옮겼다. 마을의 살기를 진압한다는 명분에서다.

마을로 내려온 석인상을 주민들은 미륵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석인상이 하루아침에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미륵불로 둔갑한 것이다.

6·25전쟁 와중에는 피란 온 병사들이 장난삼아 미륵을 발로 차서 강물에 빠뜨리는 일도 있었다. 미륵이 사라지자 저주처럼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됐다. 마을 주민 꿈속에 나타난 미륵은 ‘나를 물에 빠뜨린 대가로 내린 재앙’이라고 말했다. 결국 장정 50명과 머구리를 동원해 미륵불을 건져낸 뒤에야 번개와 천둥이 치며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봉황산 자락의 미륵삼불. 본래 살기(殺氣)를 막기 위해 세운 석인상이었는데, 주민들이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면서 미륵이 됐다.



# 미륵의 영험함을 증언으로 듣다

예전에 미륵불은 오십천 물속에 잠긴 봉황산 바위 위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62년 남산 절단 공사로 삼척 시내를 휘감고 흐르던 오십천 물길이 바뀌면서 미륵불은 도시 한복판에 올라 앉아버렸다. 미륵불은 서툰 솜씨로 만든 것이어서 단순하고 투박한 느낌이다.

미륵불의 영험함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또 있다. 다음은 민선 삼척시장을 내리 3번 연임했던 김일동 씨의 증언. “시장으로 있을 때 미륵불이 있는 봉황산 능선 자락에 터널을 뚫으려 했어요. 그런데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가 미륵바위를 쓱 보고 오더니 ‘미륵바위는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재앙을 받는다나. 결국 설계만 하고 공사는 하지 않았지요. 후임 시장이 터널을 뚫고는 그다음 선거에 낙선했어요.”

본디 미륵은 민중의 마음속 안식처이자 민중을 구원하는 구원자다. 삼척의 미륵 앞에서 신년 소망을 빌어보는 건 어떨까. 정색하고 권하는 진지한 제안은 아니고, 그저 위안 혹은 자기 믿음을 얻는 가벼운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 전설처럼 전해지는 불술 이야기

이번에는 삼척의 ‘술(酒)’ 얘기다. 흔히 새롭게 마음을 다지는 일을 ‘새 술 빚기’에 비유하곤 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라는 익숙한 구호도,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삼척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불술’이 있다. 다른 지역에는 없고 오로지 삼척에만 있는 토속주다. 이름처럼 ‘불(火)을 써서 만드는’ 술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상에 올릴 수 없는 질거나 된밥, 혹은 쉬게 생긴 밥으로 불술을 빚었다.

불술은 밑술과 덧술로 빚는 이양주(二養酒)다. 술 단지를 묻은 왕겨에 불을 붙여 타오르게 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 밑술을 발효시켜 감주를 만들고, 여기다 다시 덧술을 넣어 삭힌다. 이렇게 두 번 담근다 해서 ‘이양주’다. 저온창고에서 100일을 숙성하는 불술은 담황색의 술 빛깔도 좋고, 감칠맛이 가미된 단맛과 은은한 향도 훌륭하다.

불술은 삼척을 대표하는 술이지만, 삼척에 간다 해도 쉽게 맛볼 수 없다. 제조면허를 받지 않아 불술을 시중에 유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30년 전쯤 불술 기능계승자가 제조면허를 받아 상품화한 적이 있는데, 자금 사정으로 2002년쯤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기능계승자가 타계하면서 명맥이 끊어질 뻔한 불술을 되살린 이는 도계읍의 산중 외딴 마을 점리의 박병준(68) 이장이다. 그는 발효주의 명인이자 대학과 농업기술센터에서 발효기술을 가르치는 실전형 미생물전문가다.

박 이장은 불술을 빚지만, 시중에 유통하지 않는다. 제조면허를 내지 않아서다. 왜 면허를 내지 않았을까. 박 이장의 대답이 놀랍다. “면허를 내서 술을 대량 유통하면 장삿속이 개입할 수밖에 없어요. 덜 된 술을 내거나, 원가를 낮추게 되고…. 그러면 술맛을 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두메산골 폐교에 차린 농촌체험휴양마을에서 불술을 빚으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병에 덜어 술을 나누고 있다. 거기서 불술의 가격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한 병에 5000원. 전설적인 불술의 명성에다 대면 깜짝 놀랄 만큼 싸다.

그건 그렇고, 궁금증 하나가 남았다. 왜 왕겨를 태우는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의 불술을 빚는 것일까. 아랫목에서 더 간단히 발효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복잡하게 술을 빚는 이유가 있나요.” 박 이장에게 물었다. 답이 명쾌했다. “그게 더 복잡하니까요.” 불술의 가장 강력한 매력은 ‘어렵고 복잡하게 빚는다’는 데 있다. ‘어렵게 만든 술’이 십중팔구 더 가치 있는 법이니까.

정하동 언덕 위의 성황당에서 내려다본 삼척항(정라진) 전경.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성황당은 이름난 기도 터이기도 하다.



# 백발노인이 아이가 된다고?

삼척 미로면 무사리에는 술도가 ‘미로주조’가 있다. 미로주조에서는 ‘백수환동주(白首還童酒)’란 술을 빚는다. 한자를 뜻풀이하면 ‘하얗게 센 머리를 아이처럼 돌려놓는 술’이란 뜻이다.

조선 시대 금주령이 내렸을 때도 백수환동주는 예외 조항을 두어서 ‘늙고 병들어서 약으로 먹는 것’으로 따로 분류했단다. ‘하늘의 비밀방문(秘密方文)’으로 빚은 것이라 이 술 10말을 마시면 수명 12년이 늘어난다는 얘기도 있고, 술을 ‘약주(藥酒)’라 부른 것도 이 술이 기원이란 주장도 있다. 젊음을 되돌리는 술이라니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신년에 곁들일 한 잔 술로는 제격이 아닐까.

백수환동주가 다른 술과 결정적으로 다른 건 누룩이다. 밀 누룩이 아니라 찹쌀과 녹두를 갈아서 띄운 ‘백수환동곡’이란 누룩으로 담는다. 백수환동곡은 1㎏ 가격이 30만 원을 호가한다. 재료비가 워낙 비싸 미로주조는 백수환동곡을 20%만 쓰고 나머지는 일반 누룩을 써서 담근다.

미로주조의 장경순 대표는 불술의 명맥을 잇고 있는 박 이장의 제자다. 장 대표는 백수환동주를 잔에 따르며 자신만만했다. 그는 “한번 맛을 보면 왜 백수환동곡을 쓰는지 금세 이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맛이 얼마나 다를까 싶었는데, 깜짝 놀랄 만큼 향이 짙다. 백수환동주는 쌀과 누룩과 물 외에는 어떠한 첨가물도 사용하지 않는 순곡주. 그런데 신기하게도 농익은 과실 향이 풍성하다. 이 향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백수환동주를 빚는 술도가가 ‘미로’면에 있고, 상호가 ‘미로주조’라는 게 의미심장하다. 미로의 지명은 ‘아닐 미(未)’에 ‘늙을 노(老)’자를 쓴다. ‘늙지 않는다’는 뜻이니 백수환동주와 결이 같다. 장 대표는 “식전주로 입맛을 확 당기게 하는 힘이 있다”며 “깔끔한 맛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백수환동주는 삼척의 일반 소매점에는 내지 않는다. 삼척에서는 딱 한 곳, 쏠비치리조트 특산품 매장에서만 살 수 있다. 서울 역삼동의 보틀숍 ‘요즘우리술’에서도 살 수 있고, 마포의 주점 ‘수을관’에서는 술맛을 볼 수 있다.

꽈배기로 이름난 근덕면 교가리의 ‘문화제과’. 주말이나 휴일이면 튀겨놓은 꽈배기가 오전 나절에 다 팔린다.



# 삼척에 꽈배기 집이 많은 이유는

삼척에는 꽈배기 집이 많다. 고속버스터미널 주변에도, 해안가 쏠비치리조트 인근에도, 손바닥만 한 근덕면 교가리에도 꽈배기 집만 서너 곳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다. 삼척에는 왜 꽈배기 집이 많을까. 결정적 이유를 찾을 수 없었지만, 자그마한 단서는 있다.

삼척에는 오랫동안 전승돼 온 ‘기줄다리기’ 전통이 남아 있다. 줄을 꼬아서 만든 거대한 ‘기줄’로 하는 줄다리기다. 해마다 ‘삼척정월대보름제’의 대표행사로 치러진다.

삼척시는 첫 대보름제를 개최한 지난 2021년 축제 행사로 ‘꽈배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줄다리기와 꽈배기가 대체 무슨 관계일까. 삼척시의 대답. 꽈배기의 ‘꼬임’이 줄다리기의 기줄과 비슷하단다. 삼척에서는 그동안 ‘기줄과 똑같은’ 형태의 꽈배기를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단다. 삼척시도 한때 꽈배기를 ‘지역 명품식품’으로 육성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일의 선후는 분명하지 않다. 삼척에 꽈배기 집이 많아서 지역 축제 행사를 열었던 것일 수도 있겠고, 거꾸로 축제 행사를 할 정도로 관심이 높아 꽈배기 집이 늘었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삼척의 꽈배기가 맛있다’는 점이다.

삼척의 꽈배기 집 중 가장 유명한 곳은 근덕면 교가리의 ‘문화제과’다. 작은 시골 마을의 그야말로 허름하기 짝이 없는 제과점이다. 겉으로 봐서는 영업을 하는 건지, 폐업한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문화제과는 영업시간이 들쑥날쑥인 데다 꽈배기가 다 팔리면 문을 닫는다. 운이 좋아 순번 안에 들었다 해도 한 사람당 사가는 ‘꽈배기 종류와 개수의 상한선’이 있어 많이 살 수 없다. 찹쌀도넛 5개, 꽈배기 4개, 생도넛 1개. 이렇게 10개 묶음이 5000원이다.

문화제과에서는 하루 한 번 튀겨낸 꽈배기를 한 김 식힌 뒤에 파는데, 식은 꽈배기가 탄탄하면서도 쫄깃하다. 아직도 주말이면 문화제과 앞에는 줄이 여전하지만, 평일에는 줄의 길이가 예전만 못하다. 인근에 주문과 동시에 튀겨주는 꽈배기 집이 속속 문을 열어서다.

문화제과도 갓 튀긴 걸 팔면 압도적인 맛일 텐데, 문화제과의 이용남(74) 씨는 그럴 기운도, 의지도 없다. 아무리 잘 팔려도 정해진 양만 팔고 문을 닫는다. 이렇게 소비는 분산된다.

모든 고객들이 말랑하고 따끈한 꽈배기만을 원하는 것도, 식었으되 탄탄하면서 졸깃한 꽈배기를 찾는 것도 아니다. 여행의 즐거움은 ‘최선’이 아닌 ‘다양함’을 즐기는 데서 나오는 법. 삼척 같은 중소도시에서 명소와 맛집을 고를 때 특히 명심해둘 만한 얘기다.



■ 이사부독도기념관

삼척 시내에 ‘이사부독도기념관’이 새로 들어섰다. 삼척 시내로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기념관에는 영상관 두 개와 카페 라이브러리가 있다. 영상관에서는 독도를 정벌한 이사부와 독도를 주제로 한 실감형 애니메이션을 상영한다. 도서관 개념의 카페 라이브러리에는 ‘100권의 책’이란 서가(書架)가 있다. ‘시민이 추천하는 책 100권’을 소개하는데 정치인의 이름이 많다. 삼척시의회 의장과 부의장을 비롯해 예닐곱 명이다. 다들 바쁘실 텐데 뭐 이런 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