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정성 부모의 기도 들었나…
‘학사모 쓴 부처’ 붉게 떠오르다[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2-20 09:18
- 업데이트 2025-02-20 09:19
동틀 무렵의 팔공산 갓바위. 갓바위 부처가 그윽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팔공산은 대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갓바위는 경산에 있다. 가장 짧게 오를 수 있는 코스도 경산 쪽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수험생들의 소원 깃든 곳… ‘경북 경산’
대구 - 경산 경계 위치한 갓바위
‘한 가지 소원 들어준다’ 전설에
입시시즌이면 학부모들로 붐벼
수직 벼랑끝 바위굴 속 홍주암
무협지 나올 법한 기이한 모습
시청도 백화점도 사라진 서상길
주민들 ‘이발소’라도 간직하려
십시일반 모아 작은박물관 세워
카페로 변신한 ‘안 부잣집 한옥’
담장 너머 ‘노거수 라일락’ 장관
경산=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대학생 10만 명의 늙은 도시
경북 경산은 ‘변두리’다. 변두리가 경산이라면, 중심은 두말할 것 없이 ‘대구’다. 대구와 경산의 행정적 경계는 선명하지만, 그걸 뺀 다른 구분 선(線)은 희미하다. 문화·경제 측면에서도, 교통 등 실생활 면에서도 대구와 경산의 경계를 구분하기는 쉽잖다. 두 도시가 공유하고 있는 게 많아서다.
경산과 대구가 함께 쓰고 있는 건 다음과 같다. 대구 시내버스와 경산 시내버스는 요금체계가 같다. 환승할인도 된다. 작년 말 지하철 1호선 연장 개통으로 신설된 3개 역을 포함해 대구 지하철의 7개 역(驛)이 경산 땅에 있다. 시외통화에 요금을 더 받던 시절에도 대구와 경산 사이 전화통화는 시내요금을 받았다. 지역 번호도 대구와 경산이 053으로 같았다. 경산 공공도서관은 대구 동구와 수성구 주민을 회원으로 받아준다. 마찬가지로 대구 공공도서관도 경산 시민을 회원으로 받는다.
공유하는 게 많다 보니 경산인지, 대구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잦다. 대구대, 대구가톨릭대, 대구한의대, 대구미래대는 학교 이름에 ‘대구’를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산에 있다. 경산의 영남대는 애초에 대구에 있다가 경산으로 옮겨간 경우다.
경산은 소도시다. 경북의 22개 시군 중 세 번째로 면적이 작다. 울릉군과 고령군 다음이다. 반전은 인구다. 면적은 경북 시군 중 뒤부터 세서 세 번째인데, 인구는 앞에서 세 번째다. 경산은 경북지역에서 ‘인구가 줄어들지 않는 유일한 도시’다. 변두리인데도 인구가 줄지 않는 이유는 대학 때문이다. 사이버 대학 3개를 포함해 13개 대학이 경산에 있다. 이들 대학의 학생 수를 다 합치면 10만 명이다.
10만 명의 대학생이 있는데도, 경산은 늙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거리 하나 변변하게 조성된 곳이 없다. 젊은이들이 일할 곳도, 놀 곳도, 특화된 상권도 없다. 짐작하다시피 이웃 대구 때문이다. 경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의 대구가 경산의 소비를 빨아들이고 있다. 대도시와 가까이 있는 중소 위성도시가 가진 한계다. 경산은 이렇다 할 지배적 이미지도 없다. 근사한 자연경관도 없고, 눈길을 확 휘어잡을 만한 유적이나 유물도 없다. 그나마 ‘경산 대추’가 유명하다지만, 맛을 감별할 수 있을 정도로 대추를 자주 먹는 게 아니니 별 감흥이 없다.
# 도시 안쪽 늙은 풍경을 들여다보다
젊은 인구에 늙은 도시. 소도시 경산의 분위기는 독특하다. 대구와 잇닿은 도시 외곽은 대도시 경관인데, 도심 안쪽에는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적산가옥과 쇠락한 한옥이 있다. 도시 성장은 대부분 ‘도심에서 외곽으로’의 방향성을 갖는 법. 그런데 경산은 반대로 성장의 방향이 ‘바깥에서 안으로’다. 대구와 가까운 도시 바깥이, 도심보다 성장과 변화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얘기다. 경산이 다른 도시와 구분되는 개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경산이 여행자에게 흥미로운 건 바로 이런 독특한 개성 때문이다. 중소도시가 가진 개성이야말로, 여행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밑바탕이다.
한때 경산의 중심이었으나 오래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 경산의 원도심부터 가보자. 경산 원도심 얘기의 맨 앞에 나와야 하는 건 ‘서상길’이다. 서상길이야말로 근대기 경산에서 가장 번화하고 상징적인 길이었다. ‘경산의 종로’. 경산사람들은 서상길을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말했다. 경산에서 압도적인 번성을 누린 당시의 서상길의 지위를 표현하는 데 ‘종로’로는 좀 부족한 게 아닐까. 서울에 비유한다면, 종로에다 명동과 신촌쯤을 다 합쳐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은 다 떠났지만, 그 시절 서상길에는 시청이며 등기소, 경찰서, 우체국, 농촌지도소가 줄지어 있었다. 경산의 유일한 의료기관이었던 도요다의원도 여기 있었고, 경산의 두 번째 목욕탕인 ‘안전탕’도, 경산 최초이자 유일한 백화점이었던 경일백화점도, 나중에 두부 공장이 된 서상동 양조장도 서상길에 있었다. 서상길에 대한 진술은 대부분 ‘있다’가 아니라, 과거형인 ‘있었다’이다. 명절 때면 목욕 대야를 들고 줄을 서던 목욕탕도, 작았지만 ‘없는 게 없었다’는 백화점도,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공짜로 주던 두부 공장도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으니 말이다.
경산이발테마관에 재현해놓은 이발소 ‘중앙이용원’의 이발 모습.
# 작은 박물관이 된 58년 된 이발소
유일하게 이전의 모습 그대로 서상길 주변에 최근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던 건 이발소였다. 허름한 단층짜리 이발소 ‘중앙이용원’이다. 지금은 쇠락한 원도심의 허름한 골목일 따름이지만, 그때는 ‘중앙’이란 이발소 상호처럼 여기가 도시의 중심이었다. 이발소는 1956년 문을 열어 2014년 폐업했다. 자그마치 58년이다. 폐업한 이듬해 이발소 주인은 손때 묻은 이발 기구를 100만 원에 국립민속박물관에 팔았고, 이발소 건물은 이웃 식당에 넘겼다. 두꺼운 시멘트 모르타르 위에 도드라지게 양각된 가게 이름만큼 경산시민의 추억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늙은 이발소가 지우개로 쓱쓱 지워지려던 순간이었다.
이발소를 지켜낸 건 주민들이었다. 매각소식을 뒤늦게 들은 지역의 민간단체 회원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주민들은 경산시와 시립박물관, 건물 매입자와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해결책을 도출했다. 우선 이발소 건물을 시가 매입하도록 했다. 이발 도구 등 내부 집기는 국립민속박물관으로부터 되사들이기로 했다. 박물관 측이 ‘전례가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이발소 전시관 조성을 전제로 ‘무기한 임대’ 방식으로 빌려달라는 데 합의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발소와 그 옆 건물을 사들여 2018년 문을 연 공간이 ‘경산이발테마관’이다. 이곳은 이발소를 주제로 한 손바닥만 한 박물관이다. 중앙이용원을 예전 모습 그대로 두고, 그 옆에다 노출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붙여서 전시공간을 조성했다. 전시공간에는 이발의 역사와 변화상을 낡은 이발 도구와 과거 신문기사, 당시 영상자료 등으로 펼쳐두었다. 전시품 중에는 이발소에 걸어두었던 ‘이발소 그림’도 있다. 통속적인 이발소 그림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근검과 절약, 노동과 풍요, 아름다운 풍경과 삶의 위로다.
다음은 경산이발테마관에서 알게 된 이발소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소는? 1901년 서울 인사동에 문을 연 ‘동흥이발소’다. 1980년대쯤의 이발 의자 중에는, 최고 120㎏이 되는 것도 있었다. 1960년 1만866명이던 이용사 수는 1966년에 3만8761명으로, 불과 6년 만에 3.4배가 늘었다. 이것 말고도 경산이발테마관에서 읽는 이발소에 얽힌 이야기가 제법 재미있다.
왼쪽 사진은 한옥카페로 단장된 경산 원도심 서상길 주변의 안 부잣집. 오른쪽은 하양읍의 영화세트장 같은 옛 병원 건물. 도시재생을 통해 감각적인 카페가 됐다.
# ‘버리지 않은 것’의 진정성
중앙이용원 공간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것 같은 분위기다. 낡은 이발 의자와 연탄난로, 수도 펌프, 타일 욕조까지 과거의 물건이 다 그대로다. 1980년대 초반의 이발 장면도 재현해 놓았는데, 이발 의자에 걸쳐놓은 판자에 올라앉은 아이의 모습이 오래전의 추억을 소환한다.
이발소를 구석구석 들여다보다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발소에 있는 오래된 것들이 ‘수집한 것’이 아니라 ‘버리지 않은 것’이라서다. 가죽에다 쓱쓱 비벼 날을 벼리는 접이식 면도기도, 면도 거품을 내는 까슬한 솔도 늙은 이발사 손길이 닿은 자리가 반질반질하다. 어딘가에서 구해 곱게 보관한 게 아니라, 반복된 노동의 실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낡아진 것들. 거기 손을 대보면 늙은 이발사의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을 것 같았다.
노동의 손길로 낡아진 것은 다 감동적이다. 게다가 오래됐다는 걸 뻐기거나 자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일상의 손때가 묻은 채 낡아가는 중이라면, 그 감동은 더 배가 된다. 경산에서 만나는 오래된 것들이 다 그랬다.
눈길을 붙잡았던 또 하나는 액자에 담긴 요금표였다. 이발소에 전시해놓은 가장 오래된 요금표는 한국이용사중앙회에서 1966년 인쇄해 배포한 ‘이용보수규정’이다. 당시에는 이발요금을 갑, 을, 병, 정으로 나눠 책정했다. 급지(級地)에 따라 차등요금을 받았던 모양이다. 가장 비싼 갑급 지역의 이발요금은 70원, 가장 싼 정급이 40원이다. 고등학생은 50원, 25원이고, 소아는 40원, 20원이다. 머리 감는 요금도 30원, 도라이야(드라이)도 30원이었으니, 이발요금에 비해 싸지 않았다. 그 시절 이발소에서는 화장(化粧·메이크업)도 해줬던 걸까. 이발소 요금표 목록에 ‘화장요금’도 있다.
시대별로 전시한 이발 요금표를 비교해봤다. 1966년 70원이었던 갑급 이발요금이 1968년 가격표에는 120원으로, 1971년에는 150원으로, 1973년에는 250원으로 올랐다. 8년 만에 자그마치 257%나 오른 셈이다.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의 시대. 그래도 그 시절을 ‘살 만했다’고 기억하는 건 압축성장 시대의 초입, 수입도 그만큼 빠르게 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 서상동 근대한옥의 매력
서상길이 지나가는 서상동은 과거 경산 원도심에서 가장 번성했던 동네였다. 서상동에는 골목이 많다. 경산읍성의 정문 역할을 한 서문 ‘진옥루(鎭玉樓)’가 마을에 접해 있고, 마을 주변에 큰 시장이 열렸으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문에 이르는 큰길을 따라 서상동에는 우후죽순 집이 먼저 들어섰으리라. 집과 집 사이로 자연스럽게 골목이 생겨났을 것이고, 골목 끝에 다시 실핏줄처럼 뒷골목이 이어졌겠다. 그 시절의 번성은 아득한 과거의 일이 됐지만, 그때 만들어진 골목이 비어가는 원도심 마을 안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경산이발테마관에서 중앙로 쪽으로 이어지는 서상길 주변은, 퇴락해가는 여느 중소도시 뒷골목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너무 평범해서 여기서 도대체 뭘 봐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런데 걸음을 늦추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제야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이나 퇴락한 건물에 낡은 간판을 단 오래된 가게가 보인다. 근대의 적산가옥과 현대 양옥 건물이 시멘트 블록으로 지은 누추한 집과 각진 5층 건물이 마구 뒤섞여 있다. 숨은그림 찾듯 그걸 살피고 골라내는 재미가 제법이다.
서상길을 끼고 규모가 제법 큰 일본식 가옥 한 채가 다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일본 상층계급 주택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집이다. 가옥 안쪽에는 창고, 관리사 등 5개 건물이 들어차 있다. 어떻게든 쓰러지는 집을 살려내면 좋겠는데, 민간은 관심이 없고 행정은 예산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담장과 지붕이 무너졌다.
일본식 가옥에서 몇 걸음 더 가면 허름한 창고처럼 보이는 2층 건물이 나온다. 녹슨 함석판과 조각조각 이어붙인 유리창이 꽤 인상적인 적산가옥이다. 레트로 감성을 앞세운 대폿집으로 운영하다가 영업부진으로 근래 문을 닫은 곳이다.
일제강점기 지어진 이 건물은 본래 일본인이 운영하던 철공소였다. 해방 후 그걸 사들인 이가 방앗간으로 업종을 변경하고 ‘철공소’를 상호로 쓴 ‘철공소 방앗간’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철공소와 방앗간이 문을 닫고, ‘서상상회’ 간판을 내건 대폿집까지 문을 닫은 지금 건물은, 이제 쓸모를 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 카페와 식당이 된 근대한옥
서상동과 잇닿은 삼남동에는 근대 한옥이 여럿 있었다. 삼남동 한옥을 대표하는 건 ‘안 부잣집’이다. 안 부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산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다고 한다. ‘경주 최 부자 다음가는 부자’였다는 얘기도 있고, 해방 전후에 ‘경산에서 안 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안 부자는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와 관선 도평의회원, 경산수리조합장, 경산면협의회 의원 등을 지냈다. 썼던 감투가 끝이 없다. 경산금융조합 조합장과 경산청년회 회장, 조선박람회 평의원, 대구상공은행 감사역….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이런 전력 탓인지 폐가처럼 방치되다시피 했던 안 부잣집은, 경산시가 매입한 뒤 고쳐 지어 근사한 한옥 카페로 문을 열었다. 카페는 평일에도 붐빌 정도로 인기다. 원도심으로 안쪽으로 젊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안 부잣집에서 담장 너머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한 채의 근대 한옥이 있다. 한옥의 사랑채와 곳간채를 식당으로 쓰고 있는데 본래 칼국수 집이었다가, 근래 찜 요리로 주메뉴를 바꿨다. 메로찜과 아구찜, 가오리찜을 비롯해 LA갈비찜과 닭찜까지 한다. 식당 문을 연 건 1996년. 당시 상호는 ‘종가집’이었는데, 종가가 4대째 내려온다는 의미를 담아 식당 상호를 ‘종가집4대’로 바꿨다.
식당으로 쓰는 한옥은 1920년대 지어진 조선 말엽 근대 한옥의 전형이다. 행랑방이 붙어 있는 대문채가 있고,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와 一자형의 안채가 있다.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의 배치가 ㅁ자 모양이다. 중앙에는 화단과 우물을 두었다. 화분으로 어지러운 마당이며, 소품을 전시해놓은 툇마루 주변이 어수선하게 느껴지지만, 전체적인 집의 느낌은 아늑하다.
이 집에서 가장 독특했던 건 나무다. 마당에는 늙은 가지를 뒤틀고 있는 노거수 라일락이 몇 그루 있다. 이만한 크기의 라일락이 있다니…. 꽃도, 잎도 없는 계절에 라일락 꽃피는 봄날을 상상한다. 진한 라일락 꽃향기는 한옥의 느낌을 또 어떻게 바꿀까. 그때 다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산 와촌면 절집 불굴사의 산내 암자 홍주암. 수직의 바위가 벼랑을 이룬 자리에 들어섰다. 불굴사 법당에는 여성적인 느낌의 석불이 있는데, 갓바위 부처와 부부 사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 갓바위 남편과 석조입불상 아내
익히 알려진 곳이라 뒤로 미뤄뒀지만, 경산의 명소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있다. 경산 최고의 명소, 갓바위 얘기다. 갓바위는 팔공산에 있다. 팔공산에서 사람들이 곧바로 떠올리는 건 ‘대구’다. 갓바위가 ‘대구에 있다’고 잘못 아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팔공산 남쪽은 대구와 경산의 경계를 이룬다. 은해봉과 노적봉에서 갓바위가 있는 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대구와 경산을 가르는 경계다. 갓바위는 이 경계선에서 경산 쪽으로 스무 발자국쯤 들어온 자리에 있다.
갓바위의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갓바위라 불리는 건 머리에 이고 있는 납작한 바위가 갓처럼 보여서다. 갓바위에는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언제 가도 갓바위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절을 올리는 이들을 볼 수 있다.
갓바위가 가장 붐비는 건 입시시즌이다. 학사모를 닮은 갓을 쓴 갓바위 부처가 수험생 합격 기도를 잘 들어준다는 속설 때문이다. 신년 초에도 한 해의 무탈을 비는 기도객들로 붐빈다. 입시생 부모도, 신년 기도객도 없는 지금 갓바위는 한적하다. 갓바위의 가장 근사한 모습은 이른 새벽에 볼 수 있다.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달아오른 갓바위의 얼굴에서 장엄한 기운이 느껴진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산에는 갓바위와 부부의 인연이라는 불상이 있다. 와촌면 강학리 불굴사의 약사보전 법당 안에 모셔둔 고려 시대 석조입불상이다. 좌불인 갓바위와 비교하면 좀 왜소해 보이는 듯하지만, 일어선 석조입불상의 키가 2.33m로 작지 않다. 석조불상은 머리 위가 족두리 모양이어서 여성상으로 본다. 남성적인 선의 팔공산 갓바위 불상과 부부라는 얘기가 전해지는 이유다. 불굴사와 갓바위 딱 중간쯤에 음양리(陰陽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불굴사가 음(陰), 갓바위를 양(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두 불상을 조성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실 불굴사에서 인상적인 건 절집 뒤의 산내 암자 홍주암(紅珠庵)이다. 홍주란 ‘붉은(紅) 구슬(珠)’로 태양을 의미한다. 홍주암은 절집 뒤편의 수직 벼랑의 바위굴이다. 벼랑으로 이어지는 길에 계단을 내고 한옥 기와와 추녀를 매달았다.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경관이라 탄성이 나온다. 갓바위를 다니러 오가는 길이라면 꼭 들러보자.
■ 눈에 띄는 근대건축물
경산 하양읍에서도 근대건축을 볼 수 있다. 먼저 붉은 벽돌로 지은 높은 첨탑의 하양성당. 고딕양식에 로마네스크양식이 가미된 단아한 모습이다. 성당에서 시내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범상찮아 보이는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ㄴ자 모양의 2층 건물인데 둥글게 처리한 중앙부 정면이 워낙 독특해 영화세트장처럼 보인다. 1972년까지 하양성당 부속 성가병원이었다가 팔려 2013년까지 한일의원으로 운영됐다. 지금은 ‘커피키친 한일’이란 세련된 카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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