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좋은 크리스마스 맞이하시고, 저무는 한 해 훌륭히 마무리하세요
시계가 멈췄습니다. 책상에 자리하고 앉아서 고개 들면 바라보이는 책장의 벽시계가 멈췄습니다. 고장은 아닐테고 언제 갈아끼웠는지 기억나지 않는 건전지가 다 된 모양입니다. 공교롭게 책상 위에 놓인 작은 탁상시계도 비슷한 시간에 건전지가 다 닳았는지, 함께 멈추었습니다. 시간을 보려면 휴대전화기를 들어올려 화면을 깨우거나 늘 켜있는 에이오디 기능의 손목시계를 들여다 봐야 하겠지만 잠시 시간을 모르는 채 가만히 앉아 있기로 했습니다. 두 개의 멈춘 시계가 작업실의 시간이 모두 멈추어놓았습니다. 새 건전지는 새해가 시작되는 이천이십삼년 일월일일에 새로 끼워넣을 생각입니다. 멈춘 시간 안에 가만히 머무르겠습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따로 특별한 계힉을 세우지 않고, 그야말로 ‘무계획의 계획’으로 지나온 이천이십이년 한 해가 흘러갑니다. 나무를 보러 길 위에 오르고, 언제나처럼 길 위의 나무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나무편지》의 빈 페이지에 채워넣으며 지나온 한해입니다. 다시 또 새 달력을 내건다 해봤자, 천년을 살아가는 나무에게 달라질 게 없듯이 천년의 나무를 찾아다니는 일에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지금처럼 그저 나무를 찾아 더 멀리 더 오래 걷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갈수록 나이 들고 다리힘 줄어들어 하릴없이 걸음은 차츰 느려지겠지만, 지금 따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밑과 새해. 어쩌면 한결같을 수밖에 없는 세밑과 새해여서 더 간절하게 다가오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라디오에서 잇달아 흘러나오는 달콤한 크리스마스 노래들 덕에 시간이 멈춘 작업실 안에서의 시간도 나른하게 늘어니는 오후입니다. 《나무편지》를 띄워야 할 이른 아침부터 한낮이 지날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들만 떠올리며 지났습니다. 시간을 멈춰놓은 채 맞이하는 이번 세밑과 새해 즈음, 아직 채 마무리하지 못한 이 땅의 큰 나무 이야기를 천천히 돌아보겠습니다. 그 사이에 소식 없던 사람들의 안부 소식 오겠지요.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세밑의 월요일 한낮입니다만, 기분 좋은 예감입니다.
중천에 해 올라서인지, 차가웠던 작업실에 난방기가 켜진 탓인지, 이른 아침의 한기는 잦아들고 조금씩 온기가 오릅니다. 멈췄던 시계가 다시 초침을 움직입니다. 차가운 기온에서 맥을 못 추리던 건전지가 남은 힘을 다 하는 모양입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벽시계의 시침을 바라보며 아직 띄우지 않은 《나무편지》를 끄집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앞이어서 사진첩에서 ‘크리스마스 로즈’ 사진 몇 장을 끄집어내고, 또 크리스마스여서 ‘호랑가시나무’ 열매 사진 몇 장을 끌어냈습니다. 텅 빈 오늘의 《나무편지》 페이지에 사진 몇 장 채워서 에멜무지로 오후 늦은 시간에 《나무편지》 띄웁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시고 이천이십이년 한해 보람되게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2년 12월 19일 늦은오후에 …… 솔숲에서 고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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