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마을 소식들

16년 만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소설가 김훈 인터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6. 3. 13:48

내 소설에서 ‘헛된 희망’을 기대하지 마라

16년 만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 소설가 김훈 인터뷰

 

입력 2022.06.03 03:00
 
 
 
 
 
1일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를 낸 소설가 김훈. 이 책은 재작년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이후 2년 만의 신간이자, ‘강산무진’ 이후 16년 만의 새 소설집이다. /김지호 기자

 

“냅둬, 냅둬. 제발 냅둬.”

한 할머니가 6·25 때 전사한 남편의 유해 발굴을 한사코 반대한다. 그립지 않아서가 아니다. 남편이 전쟁 중 ‘상치쌈이 먹고 싶다’ 쓴 편지까지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죽기 직전까지 “냅둬”를 되뇌인다.

작가 김훈(74)의 단편집 ‘저만치 혼자서’(문학동네)의 수록작 ‘48GOP’의 한 대목이다. 유해라 하더라도 보통은 그리운 남편과의 재회를 반기지 않을까. 하지만 김훈은 2일 나눈 전화 인터뷰에서 “백병전 중 구덩이에 뒤섞인 백골은 총과 달리 인민군과 국군의 구별이 잘 가지 않는다”며 “이 할머니는 과거를 들쑤셔서 백골을 놓고 벌이는 편 가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죽어서도 피아 검증을 당하는 현실에 대한 불편함이랄까. 제목의 숫자 48년은 그의 출생 연도이기도 하다. 그는 “48년 이후를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살았다”며 “제목 자체가 괴로운 시대의 문패”라고 했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 장편은 여럿이지만, 작가의 단편집은 16년 만이다. 첫 소설집 ‘강산무진’은 2006년. 그의 겸손이자 자학으로는 “버리는 걸 모면한” 작품들. 단편 7편을 묶으며 “이번 출판을 계기로 써놓았다가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은 버렸다”고 했다. 48GOP는 그런 점에서 예외다. 어느 문예지에도 발표한 적이 없다. 이외의 6편은 2013년부터 9년간 계간 문학동네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특별한 기준 없이 엮었다”고 했지만 단편마다 ‘끌어안고 살아야만 하는 상황’들로 괴로운 이들이 나온다. 자식의 범죄로 괴로워하는 엄마를 그린 ‘손’, 가난을 짊어지고 장기를 두는 두 노인의 ‘저녁 내기 장기’, 죽음 앞 본능적 두려움을 느끼는 성직자들을 담은 표제작 ‘저만치 멀리서’ 등이 그렇다.

단편 ‘명태와 고래’는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작업으로 발간된 종합 보고서를 읽은 뒤 썼다. 납북됐다가 돌아와 간첩으로 몰려 십삼 년 형을 산 어부의 삶이다. 김훈은 “보고서를 모두 읽었고, 비슷한 사례들이 반복돼 괴로웠다”며 “그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다들 입 다물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인간의 고통은 개별적인 것이다. 개념화될 수 없고 계량될 수 없다”며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문학의 사명”이라 했다.

 

김훈의 작품은 주관적 감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인간의 구체적 행동이 있다. “쓰려는 대상과의 거리를 설정하는 일은 카메라 촬영 작업과 같다”며 “바짝 다가가지 말고 멀리서 두어 마디로 끝내야 할 때는 더 이상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막막한 현실에 갇힌 노량진 구준생(9급 공무원 준비생)들의 이야기 ‘영자’를 쓸 때는 “직접 시험 문제집도 구해 들여다봤다”며 “공무원직 수행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은 문제들이 많았다”고 했다.

등단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며 ‘소설가’ 명칭을 거부해온 그는 이번 소설집도 자신을 ‘자전거 레이서’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그가 애마처럼 타온 자전거 ‘풍륜 4호’는 현재 일산 자택에 묶여 있다고 했다. 코로나 이후 “최근 2년간 자전거를 타지 못 했다”고 했다. 그는 “당하는 사람들만 계속 당하는 꼴을 코로나 사태로 분명히 볼 수 있었다”며 “나의 마을에서도 가게들이 수없이 망해서 문을 닫고 새로 개업하고 또 떠났다.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물었다.

작가는 말했다. “나의 소설에서 ‘위안’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희망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살아 내야 한다.” 후배들에게는 너무 힘든 ‘절망론’ 아니냐 물었더니 다음 말을 덧붙였다. “멀리서 반짝이면서 인간을 인도하는 희망의 등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헛된 희망에 의지하지 않고, 생명의 본능으로 절망에 맞서는 사람의 모습을 써보고 싶다.”

그는 최근 작업실 칠판에 좌우명을 바꿔 썼다.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를 지우고 ‘필일신(必日新)’으로. 그가 새 글을 쓸 때 필일신을 써놓는다는 건 유명한 일화. 김훈은 “희망은 이 세상에 있기보다는 생명 속에 있을 것”이라며 “그것을 조금씩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다만 새 작품 계획을 묻자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영업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