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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흰 그늘'이었다…쓸쓸했던 빈소, 49재엔 400명 추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6. 27. 16:00

김지하는 '흰 그늘'이었다…쓸쓸했던 빈소, 49재엔 400명 추모

중앙일보

입력 2022.06.26 19:21

업데이트 2022.06.26 19:32

가톨릭 함세웅 신부는 25일 서울 종로구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 49재 추모문화제에서 "처음엔 참석을 거절했다, 그의 과거 글이 우리에게 큰 상처가 됐다"면서도 "죽음은 화해의 과정이다. 김지하의 초기, 중기, 말기를 나눠서 평가해야하고, 김지하 시인은 천상의 전달자"라고 마무리했다. [연합뉴스]

 

시인 김지하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세상과 불화하는 듯했다. 후배 시인 김사인이 49재 추모시에서 밝힌 것처럼 그의 소신공양으로 엄혹했던 한 시대를 우리가 건널 수 있었음에도 지난달 8일 그의 죽음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썰렁하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1991년 분신 정국에서 잇단 자살을 비판한 시인의 신문 칼럼,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지지 선언 등의 여파가 여전해 보였다. 무기징역형까지 감수하며 체제에 맞섰던 '저항 문인'이 정작 자신의 출발점인 진보진영으로부터 외면받는 모양새였다.
 

지난 25일 49재는 달랐다. 유홍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소리꾼 임진택 등 주로 시인의 서울대 미학과, 문화운동 후배들이 주축이 돼 마련한 추모문화제에는 시인 신경림, 소설가 황석영,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등 범 진보진영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추진위원 등으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개인적으로 시인과 결별했던 가톨릭 함세웅 신부, 시인의 대표작 '오적'을 일본 사회에 실시간 소개해 세계적인 구명 운동을 불러일으킨 일본인 편집자 미야타 마리에가 추모제에 참석해 시인과의 '애증 관계'를 고백했다. 손학규·유인태 등 정치인들도 얼굴을 비췄다. "공이 9라면 과는 1인 인생"(유홍준 이사장), "맺힌 응어리를 풀고 명복을 빌어주자"는 추모제 취지대로, 흠결은 지적하더라도 성취는 객관화하려는 자리였다. 추모제가 열린 서울 삼일대로 천도교 대교당. 400여 명의 인파가 몰려 일부는 바닥에 앉아야 했다. 참가자들의 발언이 길어지면서 오후 3시에 시작된 추모제는 7시를 넘겨서야 마무리됐다.

'민주화 운동 상징'이던 시인의 빈소는 왜 그렇게 쓸쓸했나

지난달 8일 세상을 떠난 김지하 시인의 빈소는 강원도 원주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당시 코로나19 확산세와 원주에 위치한 빈소, 가족장 등으로 추모객이 적었고, 시인의 발인에도 취재진이 거의 없이 조용한 장례가 치러졌다. 문화계 인사들은 "조문객이 적은 게 그 이유만이 아닌 것 같았다"며 별도의 추모제를 열기로 결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연합뉴스]

 

시인 약력 소개,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개막 발언에 이어 김사인 시인이 추모시 '해월신사께 한 줄 祝(축)을 올립니다'를 낭독했다. "심술 궂고 미운 데도 적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릇이 크니 소리도 컸겠지요 (…)". 역시 애증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해월은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 생전 시인이 누구보다 흠모했었다고 한다. 추모식 사회를 맡은 유홍준 이사장은 "시인의 말년에 평소와 다른 언행으로 감정 상하고 척지는 일도 있어 (원주 장례식) 발걸음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 같다"며 "그렇다 해도 쓸쓸히 보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추모제를 열게 됐다고 했다.

 함세웅 신부는 처음에는 49재 참석 제안을 거절했었다고 밝혔다. 신문 칼럼이 커다란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화해의 과정"이라며 "시기를 나눠 김지하를 평가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미야타 마리에는 '오적'을 처음 접하고 압도적 말의 힘에 매료됐으나 박근혜 지지 선언을 편들 수는 없었다고 소개한 다음 "상냥한 누나로 시인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는 게 좋았을지, 나는 마지막 날까지 후회하며 살 것”이라고 했다. 후배 문인들을 대표해 시인의 신문 칼럼에 대한 반박글을 썼던 김형수 시인은 "선생님의 생명운동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됐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다"며 경위를 설명했다. 유홍준 이사장은 진보 문학진영의 좌장 격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지하 시인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시인이 백낙청 선생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지만 '김지하 선생은 병중이라 몸과 마음이 고통받고 있다'는 백 선생의 이해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7년 가까운 수감 생활, 고문 후유증 등으로 시인은 몸과 마음이 아팠다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을 일본에 소개하고, 전 세계적인 구명운동에도 앞장섰던 미야타 마리에 일본 전 중앙공론사 편집장은 "1991년 김지하는 젊은 생명을 사랑한 나머지 고통의 말을 던졌는데, 그 이후 '김지하의 변절' 풍조가 한국 사회에 퍼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2012년 박근혜 지지선언을 한 시인에 대해서는 '실망하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고 했다. 김상선 기자

 

유홍준 이사장은 시인의 생전 활동을 크게 6갈래로 구분했다. 민주화, 문학, 노래, 생명운동, 그림, 민중예술운동이다. 생명운동 등 시인의 후반기를 회고하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소설가 황석영은 추모사 속 우화를 통해 시인의 '흰 그늘' 미학을 이렇게 해석했다. "누군가를 저 세상에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겨워 몇 날 몇 밤을 실컷 울고 나서 피시식 하고 저절로 나오는 희미한 웃음 같은 것." 그늘이 희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문학은 논리로 재단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시인의 대학 시절 친구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김지하 시인은 아직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며 "김지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의 세 권짜리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지금 당장의 잣대로 시인 김지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