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끙끙 앓으며 詩 첫문장을 기다린다”
제주 이주 1년 시인 문태준, 시집·산문집 동시에 펴내
“자연은 낭만이 아닌 노동… 구름·태풍·고립이 나를 맑게해”
이기문 기자
조선 입력 2022.02.21 03:00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한 지 1년 반 동안 시인의 손은 투박해졌다. 문태준 시인은 “퇴근하면 텃밭을 일군다”며 “자연 속의 생생한 시어들이 싸락눈처럼 쏟아질 때 즐겁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문태준(52) 시인은 지난 2020년 8월, 오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 애월읍 장전리로 갔다. 고향은 경북 김천. 제주도 출신 아내가 태어났던 폐가를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 방 2개와 작업실을 갖추고 ‘문정헌(文庭軒)’이라 이름 붙였다. 글과 뜰이 있는 집에 살며 최근 여덟 번째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창비)와 산문집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마음의숲)를 펴냈다. 1994년 등단한 그는 서정시의 계보를 이으며 2000년대 미당문학상·노작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두루 받은 시인이다.
‘아침’과 ‘첫 문장’이란 낱말이 먼저 다가왔다. 도시를 떠나 시작한 섬의 삶과 문학은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 서울에서 만난 시인은 “체중이 8㎏ 빠졌다”고 했다. “낮에는 제주 불교방송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퇴근하면 돌 쌓고 풀 뽑고 농약 치고 가지를 쳤습니다. 완전히 ‘노동하는 몸’으로 1년 넘게 살았습니다.”
자연과의 교감을 주로 노래한 시인이지만, 제주의 자연은 낭만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내륙의 자연과 달랐습니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고 불현듯 태풍이 일어요. 밤은 길고 깊습니다. 머리가 깨지도록 사나운 추위에 시달린 적도 있어요. 외롭고 고립된 섬처럼 고독감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섬 생활을 처음 경험한 시인의 눈에는 떠나는 모습이 주로 보였다고 했다. 매일 여객선이 출항하고, 손님들은 뭍으로 떠나갔다.
산문집은 봄·여름·가을·겨울로 목차를 나눠 계절마다 마주한 감상을 적었다. 그는 “옮겨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생활이 안정되는 데 사계절이 걸렸다”고 했다. 생활이 단순해지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시린 추위가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눈이 시원해졌다. “아, 한기가 이렇게 깨끗하고 맑을 수 있구나.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제2의 자연이었습니다.” 이번 시집엔 꽃과 새, 눈과 돌이 등장하는 시가 유난히 많다. 꽃봉오리 속으로 들어가 앉고(’꽃’), 손바닥에 내려 앉는 첫눈에서 사라진 얼굴을 발견한다(‘첫눈’). 이경수 문학평론가는 “자연과 한데 어울려 있거나 동화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며 “문태준 시의 세계는 위계가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나란히 함께 있는 연대의 세계”라고 평했다.
남편이자 아빠, 직장인으로 사는 시인에게 캄캄한 새벽은 “빈 마당에 혼자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는 “등단했을 때만 해도 아무도 쓰지 않았던 문장을 시로 쓰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며 “28년 시인으로 살면서 시를 태어나게 하는 조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조건은 “맨손 맨발로 굳은살 박이면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제주살이는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나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새벽마다 시 쓰려 끙끙 앓으면서 첫 문장을 기다립니다. 이런 조건들이 저를 만들고 있다는 게 흡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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