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시집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 2017년 7월 29일 발행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
64편이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 신간 소개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자기만의 세계를 꾸준히 축조해온 나호열 시인의 신작 시집. 쓸쓸한 정서를 기반으로 마주한 세계를 부수고 다시 쌓아올리는 64편의 시편은, 노래처럼 들린다. 무너뜨린 폐허에선 존재에 대해 묻는 노랫말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고, 새롭게 쌓아올린 곳에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정서가 노래로 시작된다. 시인이 사물과 풍경 사이를 거닐며 갖는 연민은 우리가 시집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연민과는 조금 다르다. 상처와 슬픔을 수긍하는 방식에서도 놓치지 않는 따뜻함이 시인의 시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몰락’은 소멸로 향하는 선택이 아니라 ‘시작’으로 나아가는 시인만의 쓸쓸한 희망이다. 턱을 괴고 무너지는 상상을 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싱싱한 것이 새롭게 자라난다. 이 시집은 이토록 고요하고도 시끄러운 세계를 거닐게 만든다. 어느 하나 내 것이 없고, 어느 하나 내 것일 수 없는 세계에서 시인이 놓치지 않는 ‘믿음’은 시집을 덮어도 영영 끝나지 않는다.
“‘저 너머’라는 말이 가슴속에 있다. 눈길이 간신히 닿았다가 스러지는 곳에서 태어나는 그 말은 목젖에 젖다가 다시 스러지는 그 말은 어디에든 착하다.”(「저 너머」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언어는 따뜻함을 품고 오랜 생명력을 지닌다. ‘선(善)’의 입장에 서서 몰락을 지켜보고 제 손으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이질감이 들기도 하지만, 더 넓고 멀리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안에서 읽는 이는 이 이질감과 동기화 된다. 이런 작용을 통해 이 시집은 소외된 존재를 몰락시키고 소멸시키는 것을 비판하는 대신 따뜻함으로 응수하는 시인의 고투를 엿볼 수도 있다.
▣ 책 속에서
짧은 생은 촘촘한 기억의 나이테로 현을 묶고 백년쯤 지난 발자국으로 술대를 젓는 늦가을을 기다리는가
아, 거문고의 긴 날숨이 텅 빈 오동나무의 가슴을 베고
아, 거문고의 깊은 들숨이 나비가 되지 못한 음을 짚어낼 때
나는 다만 첫발을 딛는 꽃잎의 발자국 소리를
사막에 담을 뿐
수화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 뿐
―「거문고의 노래 1」 중에서
그리워서 멀다
외로워서 멀다
눈길이 먼저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너를 향하여
나는 생각한다
목을 매달까
저 아슬한 줄 위에 서서 한바탕 뛰어볼까
이도저도 말고 훌쩍 넘어가 버릴까
매일이라는 절벽을 힘겹게 끌어당기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아직도 내게는 수평선이 있다!
―「수평선에 대한 생각」 전문
나호열 시인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정서는 쓸쓸함이다. 많은 시편들에서 ‘텅 비고 사그라지고’(「가을과 술」), 스러지고(「저 너머」), 저물고(「낙엽」), 무너져 내리는 (「서있는 사내2」)등 소멸 내지는 ‘몰락’의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몰락’의 이미지가 ‘몰락’의 의미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나호열의 시에서 ‘몰락’의 이미지는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탐구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중략)한편 나호열 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중심에서 벗어난 대상, 주변화된 대상을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측면에서 그려지기도 하고 주변화된 대상의 상처, 이에 대한 시적주체의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박진희(문학평론가 ․ 대전대 교수)
해설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중에서
▣ 시인의 말
천만 번 겨루어
천 번 만 번 진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일
사랑을 주는 일
천 번 만 번 내주어도
천 번 만 번 부족하지 않은
가난해지지 않는 일
사랑을 주는 일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끝끝내 남아 있을
우리들의 양식
이제야 그 씨앗을 얻어
동토에 심으려 한다
눈물 한 방울
백년 뒤에라도 좋다
피어주기만 한다면
2017년 7월 無籬齋에서
▣ 저자 소개
나호열
1953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촉도』 『눈물이 시킨 일』 『타인의 슬픔』 외 다수가 있다. prhy0801@daum.net
▣ 목 차
시인의 말
제1부
후일담(後日譚) 13 / 가을과 술 14 / 못난 15 / 모텔 아도니스 16 / 거문고의 노래 1 18 / 거문고의 노래 2 20 / 거문고의 노래 3 22 / 땅에게 바침 24 / 구름에게 25 / 강 26 / 꽃, 꽃, 꼿꼿이 28 / 봄비 29 / 파티, 파리, 빨리 30 / 낙엽 31 / 물든다는 말 32
제2부
뿔 35 / 저 너머 36 / 몸과 살 37 /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38 / 생각하는 사람 2 40 / 소품들 41 / 바위 속에서 42 / 서 있는 사내 1 43 / 서 있는 사내 2 44 / 서 있는 사내 3 45 / 돌아오지 않는 것들 46 / 블루 48 / 시월 49 / 오래된 밥 1 50 / 오래된 밥 2 51 / 우리 동네 마을버스 1119번 52
제3부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55 / 오대산 선재(善財)길 56 / 내력 57 / 모시 한 필 58 / 자낙스 60 / 수평선에 대한 생각 61 / 가을을 지나는 법 62 / 별똥별이 내게 한 말 64 / 객이거나 그림자이거나 65 / 덤 66 / 내가 하는 일 67 / 노을 앞에서 68 / 겨울비 70 / 극락 71 / 꽃짐 72 / 수오재(守吾齋)를 찾아가다 73 / 토마스네 집 74
제4부
비가(悲歌) 77 / 늙어간다는 것 78 / 봄눈의 내력 79 / 알맞은 거리 80 / 동행 82 / 씨름 한 판 84 / 휘다 86 / 만월 87 / 심장은 오늘도 걷는다 88 / 말의 행방 89 / 맹물 90 용오름 91 / 아무개 92 / 큰 산 93 / 이순(耳順) 94 / 행복과 항복 96
해설 불모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몰락의 상상력 97
박진희(문학평론가·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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