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권력과 싸워야 할 문인들의 하찮은 갑질에
시는 하루아침에 ‘난봉꾼 면허증’이 되어버렸다
먼 봉건시대에 "기생 첩을 옆에 끼고” 치마폭에 시를 흘리던 문인들의 생활이 ‘풍류’의 이름으로 미화되던 시절이 있었다. ‘주색잡기’ 생활이 ‘치열함’의 외피로 포장되던 시절도 있었다. 예술가들의 ‘일탈적’ 삶이 범부들은 감히 흉내도 못 낼 예술가의 특권처럼 간주되던 시절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풍습이 봉건시대부터 21세기의 현재까지 외피와 강도(强度)만 변한 채 알게 모르게 계속돼 왔다는 사실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서 그간 벌어져 온 온갖 추잡한 성 스캔들들을 다 기억한다. 심지어 ‘영웅호색(英雄好色)’의 분위기마저 있어 성적 일탈은 문인들 사이에 ‘신화’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이제 드디어 이런 시대가 끝장나고 있는 것이다. 먼 과거에서 지금까지 관행처럼 벌어져 왔던 일들이 이제 와 ‘사건’으로 불거 진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을 주권과 인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타자화된 ‘사물’로 대하는 태도의 야만성에 ‘공분(公憤)’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야 우리 사회가 이러한 비판에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절박한 인식에 도달했고 이것이 소위 ‘시민사회’로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안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딘가.
문단 내 성폭력이 더욱 문제인 것은 그것이 소위 ‘문하생’들에게 가해진 ‘갑질’ 폭력이었다는 데 있다. 문하생이라는 명명 자체가 이미 봉건적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는 ‘문하(門下)에서 배우는 제자’라는 뜻도 있지만 ‘권세가 있는 집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문인들이 휘두른 폭력은 그것이 이른바 ‘권력(권세)’의 형태로 가동됐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문단 내 성폭력에 연루된 문인들의 공통점은 문단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하찮은(!)’ 지위를 자랑하며 그것을 빌미로 상대를 유혹·회유·협박했다는 것이다.
잘못된 위계와 권력에 대해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앞장서 싸워야 할 문인들이 (보잘것없는) 권세를 역설적이게도 문학(인)에 대해 가장 큰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휘두른 것이다. 이들에게 문학은 자신들의 폭력적이고도 봉건적인 사생활을 감추는 ‘알리바이’에 불과했다. 심지어 10대 여성들에게까지 자행된 성폭력 앞에 시는 하루아침에 허접스러운 ‘난봉꾼 면허증’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문학(예술)은 모든 형태의 상식과 ‘공리(axiom)’에 대한 도전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름의 혁명성을 갖는다. 누군가 문학을 영원한 ‘아나키즘’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좁은 의미의 정치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문제의 손쉬운 해결을 거부하는 ‘끝없는 질문태’으로서의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봉건적 퇴행’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이 도저(到底)한 본성 때문에 문학은 때로 상식을 뒤엎고 공리의 세계와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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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사는 어찌 보면 이런 도전의 역사이다. 그러나 문학인들의 ‘삶’이 저 봉건시대의 오만한 ‘제왕(帝王)’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에게 기대할 것은 더 이상 없다. 문인들이 자초해 “제정신이 아니어서 분별력이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시인들)”(플라톤)이 된다면 그들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시인들이 쫓겨났듯이 진리의 나라에서 추방될 것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실 송구스럽다. 이것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 담론이 흐트러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학은 싸구려 연애질과 외도의 방패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행위들은 선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소크라테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