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村의 속살, 詩 70편으로 노래했죠
입력 : 2016.10.06 03:00
[북촌살이 시집에 담은 신달자]
열 평짜리 한옥에서 2년간 거주
골목길·우물터·창덕궁 등 거닐며 "마음속에 들어온 것들 써 내려가"
서울 계동의 북촌길에서 열 평짜리 한옥에 살고 있는 신달자(73) 시인이 새 시집 '북촌'(민음사)을 냈다. 2년 전 이사 온 뒤 오로지 북촌을 노래한 시만 모아서 한 권의 시집을 묶었다. 시인의 집은 '발 닿고 머리 닿는/ 봉숭아씨만 한 방'에 부엌 겸 서재로 쓰는 지하실이 딸려 있다. 골목길 초입에 자리 잡은 집의 대문 위엔 '공일당(空日堂)'이란 당호가 걸려 있다. 시조 시인이기도 한 신흥사 조실(祖室) 설악 무산(雪嶽霧山) 스님이 집 이름을 짓고 건넨 글씨가 목판에 새겨져 있다. 신 시인은 그 사연을 시 '공일당'에 풀어놓았다. 스님이 신 시인의 단출한 살림을 보곤 '다 비우면 새롭게 쌓이는 법/ 공이 만(滿)이 되는 것'이라고 한 뒤 가톨릭 신자인 시인에게 '공일(空日)은 예배로 채우는 날'이라고 덧붙였다는 것.
'공일당' 앞엔 늘 화분이 놓여 있다. 신 시인은 "내 집 앞을 지나가는 외국 관광객에게 차 한 잔 사주는 심정으로 늘 꽃값을 치르며 매일 꽃을 놓는데, 겨울엔 조화라도 갖다 놓는다"고 했다. 대문 앞에 시인이 주문 제작한 빨간 우체통도 있어서 눈에 확 띈다.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추억의 한 컷을 자주 찍는다. 시인은 시 '내 동네 북촌'에서 '골목을 오가는 외국인들이/ 내 앵두만 한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북촌이 다 너희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신 시인은 "처음 이사 왔을 땐 외갓집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며 "차츰 동네에 얽힌 역사를 알게 되면서 북촌의 '겉'이 아닌 '속'을 시로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주문모 신부와 김대건 신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성수(聖水)로 사용했다는 '석정 보름 우물터'를 찾곤 '물은 없지만 불의 마음은 남아/ 이리도 불이 제대로 타오르지 않는 내 신앙의 흉터를/ 가렵게 하는데'라며 마음을 씻었다.
신 시인의 시 '계동 백년'은 북촌의 역사 산책을 안내했다. '계동 아낙들이 왕이 세수를 한 궁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빨래를 하는 빨래터를 지나/ 다시 일제시대가 흐르고'라더니 창덕궁 1길 몽양 여운형의 집터를 지나, 중앙고등학교 계동 1번지를 지나, 만해 한용운이 거쳐 간 유심사 터도 스쳐간다. '계동 백 년은/ 한국의 푸른 피요 붉은 역사 아닌가?'라고 했다.
시인은 시 '별궁길'에선 '풍문여고 별궁길을 걸어 보라'며 '여기가 이상의 상상의 공상의 어느 나라 골목인지/ 발끝에서 성취감이 툭툭 터져'라고 예찬했다. 시 '창덕궁 돌담길'에선 '돌담길 아래 온도가 내려갈 때/ 조각조각 큰 벽을 이룬 돌담 곁을 걸으며/ 조금 더 깊고 그윽하게 창덕궁 나뭇잎 소리를 듣는다'며 전생(前生)을 헤아리듯 돌담길을 숱하게 맴돌았다.
시집 '북촌' 원고를 미리 읽은 후배 시인들은 대부분 수록작 중 시 '서늘함'을 절창으로 꼽았다고 한다.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시인은 "북촌에 더 오래 살면 둔감해지니까 지금 감동이 남아 있을 때 시를 쓰자고 작정했다"라며 "지난 2년 동안 산책할 때마다 하나하나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시로 써 내려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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