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기억의 이름으로 가족을 묻다 / 김경애 시집 『가족사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5. 31. 10:04

김경애 시집 『가족사진』

기억의 이름으로 가족을 묻다

나호열

 

1.

 

아무리 문학이 허구 fiction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의 서사敍事를 작품 속으로 끌어 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감성의 균형을 잃고 사사로운 감상感傷으로 빠질 우려가 많을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화자話者와 작자作者를 동일시하게 만들어 문학이 지향하는 상상계의 폭을 좁히게 하는 상황으로 이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김경애의 시집『가족사진』은 과감하게 가족의 서사를 풀어놓으면서도 독자의 공감共感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공감은 사실에 기반한 동감同感과는 달리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개연성에 동의한다는 것이므로, 일방적인 시인의 고백, 서사의 진술이 아니라 그 고백과 진술로 하여금 새로운 문제를 환기하게 만드는 일관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시력詩歷이 상당한 시인들도 한 권의 시집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주제의식을 추출해내는 일이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신예 新銳의 패기로 시집가족사진』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2.

 

‘가족사진’은 액자 속에 갇혀 있는 과거의 산물이다. 어느 특정한 시간, 꼭 기억해 두어야만 할 것 같은 예감으로, 한껏 부풀린 웃음 속에 깃든 어색함으로 거실 벽에 무심히 걸려있는 가족사진은 시인에게는 시간의 갈피갈피에 켜켜이 각인되어 있는 기억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되어 버린 줄 알았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그 옛날의 가족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가족사진』을 관통하는 열쇠를 찾는다면 다음 시를 읽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몇 해 전에는 목사님 따라

선운사에 갔을 때

산사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근처의 유스호스텔에서

밤새 기도만 하고

산에만 오르다가 내려왔다

 

오늘은 스님과 목사님을 따라

선운사 뜰을 거닐며

예수님도 부처님도

온전히 내 안에 모시지는 못했지만

먼발치서 그들이 주고받는

정겨운 웃음소리를

독경 소리처럼 듣는다.

 

아름답다. 스님과 목사님이

선운사 뜰을 정답게 걷는다.

 

- 「스님과 목사님」전문

 

이 시의 전언傳言은 한 마디로 말해서 '화해'. 덧붙여 말한다면 역지사지 易地思之의 정신이다. 반목하는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다면 화해和解는 이루어 질 수 없다. 화해는 용서와는 다르다. 부당하게 상처받고 압해를 당한 이가 가해加害 한 자에게 먼저 손 내미는 행위가 용서라면 화해는 자신에게도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의 발로에서 비롯된다. 만일 시인의 자아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나르시즘에 빠지거나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길을 걸었을 텐데『가족사진』속에 등장하는 화자話者는 놀랍도록 자아를 냉철하게 드러낸다. '내 뜻을 모르는 것 같아/ 미친년이라고 피 토하듯 욕한 적 있다/ 오늘 그 미친년이 좋아/... /다른 미친년을 욕'(「시가 뭔데?」부분)하는 변덕스런 나, '사람들과 부대끼는 게 싫어 / 혼자 평화광장을 걷는다./ ..../ 오래 전의 애인을 떠올려'(「에코의 서재」부분)보는 새침한 낭만의 나, 시「교회에 가지 않는다」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누구에게 예배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회의하며 교회에 가지 않으면서도 절대를 향한 외로움을 잊지 않아 꿈속에서 자주 교회를 간다는, 불안해하는 나(시인)가 절절하게 드러남으로써 허구와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무관심해 할 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죄책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할머니 목소리를 들었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언니가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날

친구가 100일 지난 첫 아이를 떠나보낸 날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교통사고로 그가 죽은 날

축축한 담요를 두른 듯 무거운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미워하는 엄마.

아이들을 팽개쳐두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올케.

변변찮은 땅문서 들고 서울로 가버린 사촌 오빠.

팔순의 당신보다 늙고 병든 시누이 때문에 아픈 시어머니.

우글거리는 걱정의 뱀들이 엉켜 머릿속이 짜글거린다.

 

온종일 생을 두리번거렸다.

 

- 시 「걱정의 뱀」 전문

 

어쩌면, 시집『가족사진』의 시편들은 「걱정의 뱀」의 부록이거나 주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걱정의 뱀」은 이 시집의 심주心柱 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집에 등장하는 개개인에 관련된 시들은 이 글에서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

이 시에 등장하는 혈족들을 향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무관심으로 대할 때 화자가 느끼는 죄책감으로부터 출발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혈족들의 불행은 화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기우로 치부해도 그만일 죄책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지점에 시집『가족사진』을 관통하는 중요한 화자의 심리가 숨어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앞에서 이미 시집을 읽는 열쇠로 화해를, 역지사지를, 그리고 측은지심의 경로를 탐색해 본 바 있거니와 이제 마지막으로 화자가 체득한 타자에 대한 '관심'의 영역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화자(시인)는 그를 둘러싼 혈족을 포함한 타자들이 화자에게 '관심' 즉, 사랑을 베풀어준 존재라고 인식한다. 이러한 심리가 선천적이라고 해도 좋고 살아오면서 체득한 소중한 미덕이라고 해도 좋다. 화자는 타자들이 결코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혹여 화자에게 유쾌하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하더라도 그들을 영원히 미워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이미 우리는 세월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 '가족사진'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족은 늙거나, 다른 세상으로 떠났거나 소문 속으로 사라져 갔다. 권위와 복종을 배경으로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음각陰刻되어 있는 기억을 들추어내는 일은, 들추어내되 회오 悔悟에 휘둘리지 않고 담담히 조망할 수 있는 미덕을 토로하는 일은 아무나 성취할 수 있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숨어버리는 말들」부분), '웃고는 있지만 , 독한 말이나 생각으로 / 누군가를 죽이지나 않았나'( 「마흔 다섯, 협죽도 꽃 같은」부분) 걱정하는 가족을 우리는 왜 사랑해야 하나?

 

앞마당 평상 위 둥근 밥상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을

가족이 함께 먹던 그때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꽃송이

그 꽃자리에 남겨진 까만 꽃씨가

통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때

 

서툰 몸짓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하지 못한 것이

이별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

 

상처가 상처를 보듬어야

새살이 돋는다는 것을 알았을 그때

그때, 늦은 인사가 되어버린 사랑, 당신

 

시 - 사랑, 당신」 전문

 

비트겐슈타인은 가족닮은꼴 이론 family resemblances을 통해 공통된 특질로 전체라는 단위를 묶을 수 없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가족이 혈연임을 내세워 공통된 형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가 교집합의 관계로 극히 일부분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가족이 소중한 까닭은 이러한 일부분의 공유가 가져오는 관계의 느슨함이 가져오게 될 가족 와해의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족 간의 불화는 유교적 위계의식이 가져오는 상하좌우의 예절을 상호간의 이해와 존중이라는 틀로 전환시키지 못한데 있다고 본다. '상처가 상처를 보듬어야 / 새살이 돋는다는 것을 알았을 그때/ 그때, 늦은 인사가 되어버린 사랑, 당신'이라는 뒤늦은 깨달음이 가슴 깊이 메아리쳐 오는 것은 오늘날의 가족의 위기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사진은 과거의 기억을 퇴행적으로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다. 아프기는 하지만 오늘의 '나'의 의식 속에는 완벽하지 않은 부모와 형제와 무수한 타자들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 『가족사진』의 성취는 완전하지 않고 부분으로 존재하는, 그러하기에 온전한 합일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품은 가족의 의미를 되살려준 데 있지 않을까.

 

와락, 껴안아주며 그들과 한 몸이 된다.

어느새 아이들 까르르 웃는 소리,

손잡고 산을 오르는

늙은 부부의 발자국 소리.

......

 

작은 돌멩이들까지 징검다리 되어

혼자면서 함께 가는 길 열어주고 있다.

 

- 시 「군산동 단풍나무 숲에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