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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반추 反芻를 감춘 나무의 언어 / 박명숙 시집 『이곳의 별들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6. 7. 03:23

跋文

슬픔의 반추 反芻를 감춘 나무의 언어

나호열( 시인․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시인 박명숙

 

박명숙 시인의 인상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바람 많은 언덕위에 초연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라고 하겠다. 비록 오랜 시간 교유를 나누지는 못했을지라도 늘 조용한 걸음걸이와 묵언에 가까운 언행을 기억하는 이라면 나의 이런 생각에 기꺼이 동감을 전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하기에 갑자기 서울을 떠난다는 인사를 건네 왔을 때에도 따뜻한 차 한 잔 나누지 못하여 못내 서운했던 차에 반가운 기별을 받았으니 바로 시집『이 곳의 별들은』의 원고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1994년에 시단詩壇에 나온 이후 1997년 시집 『바람 이는 언덕』을 상재上梓한 바 있으니 이 시집은 실로 20 년 만에 출간하게 되는 두 번째 시업을 쌓는 일이 되는 것이다. 첫 시집 이후의 이 긴 공백의 연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당장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어째든 나는 지금 묵언黙言의 나무가 피워낸 꽃들을 관상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해야겠다 . 시집 『이곳의 별들은』에 수록된 70여 편의 시들이 바로 그 꽃들이다.

 

시는 무엇인가

시인은『이곳의 별들은』의 머리말에서 시를 쓰는 일을 '겨울 강을 선회하는 무모한 노질'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시를 앓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토로하였다. 이 말은 '현대인은 부와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 상태에 있다'고 한 트릴링 Lionel Trilling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시는 체험의 잉여이면서 - 체험은 반성이 수반되지 않는 경험과는 다르다 - 기억의 소산 所産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체험된 현실의 반발이며 존재의 존재함을 희구하는 강력한 발언인 것이다. 체험된 현실이 안온한 삶을 핍박할 때 시는 여러 경로로 분화되어 나가는데, 그 하나는 낭만적 서정으로의 도피를 꾀하여 상상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핍박의 현장을 직시(기억, 회상)하므로써 자신을 무화無化 시켜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여 세계 자체를 부정하거나 욕망의 소멸을 꿈꾸는 것이 무화의 방식이라면 박명숙 시인은 이것을 넘어서서 무화를 욕망하게 만드는 기제基制를 끈질기게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집『이곳의 별들은』이 보여주는 정경의 주류는 혈족血族의 죽음과 이로부터 야기되는 이별과 슬픔이다. 이 시집에 질펀하게 깔려 있는 이러한 하강下降 이미지로 말미암아 전염되는 삶의 허무함을 어찌해야 할까?

 

죽음을 이야기하다

 

표현 表現expession 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눌림 express에 의해서 배어나오는 것이 표현이라면 시는 마땅히 절실함을 수반하는 발언이어야 한다. ‘불타서 재가 되는 / 그 가슴 다 앓고서도 /희석되지 않는 눈물’( 「슬픔」부분), ‘기웃거리다 서둘러 가는 봄, / 병중 病中인 / 내 근황’(「봄날」)에 보이는 신고 辛苦의 절박함은 따지고 보면 보편화된 세상사 世上事 이다. 그러하기에 ‘가난’이나 ‘죽음’ 같은 개인 체험의 표현은 공감의 외연을 넓히는데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시집『이곳의 별들은』에는 이러한 보편적 정서를 다룬 시들이 많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그날」, 「장지에서」, 「하관. 2」, 「故 K 선생님」, 「이장」, 「반월에서」, 「형부」, 「빈소에서 」와 같은 시들은 시인과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 슬픔의 기록이다. 희석되지 않는 눈물이나, 병중인 근황은 이 죽음의 목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주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숨겨져 있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남편, 언니, 형부와 같은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 시우詩友, 은사와 같은 조금 먼 이웃들에게도 애도의 눈빛을 보내는 마음과 더불어 희노애락 喜怒哀樂의 느닷없음을 깨닫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가난은 무능했고/ 수술을 외면’( 「그 날」)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에 대한 애련哀憐 ,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방문도 전화도 뜸했던’( 「장지에서」)혈육에 대한 무관심, ‘좀 더 계실 줄 알고/ 곧 찾아 뵐 거라고’( 「故 K 선생님」)머뭇거리던 후회, ‘한 때 추락한, 그리고 / 그 캄캄한 벼랑을 기어오르던’(「반월에서)친구와 동행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등등의 배면에 자리 잡은 사랑과, 죽음과 같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느닷없는 사건에 대한 경고와 대비를 읽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유용한 시 읽기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 葬地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시 「하관. 1」은 각별하게 읽어야 할 시이다. 시인이 회오悔悟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교감하며 자신을 하관下棺하는 의식의 경건함을 통해 자아의 소멸이 아닌 신생 新生에의 염원을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미 호흡을 가로막고 구속하던 검은 의식들

오늘 비로소

이곳 안식처에 나를 내린다

작열하는 팔월의 눈부신 태양을

서서히 차단하며

 

내가 사랑하고

더러는 나를 아껴주던 이름들

그들의 오열을 다만

바람으로 응시 할뿐

싸늘한 내 몸을 감싸고 덮어주는

따스한 이 어둠에 등을 눕힌다

 

투명한 햇살에 웃고 있는

내 옆의 풀과 나무와 꽃들

그 뿌리를 지켜주는 소중한 흙처럼

어느 훗날

내 몸도 무엇인가 되고

그런 존재위로 태양은 다시 뜨고

지상에서의 사라짐은 어쩌면

또 다른 탄생을 시도하는 전환점일수도

 

그 의미를 반추하며

유년 시절 즐겨 오르던

이 작은 산언덕,

검고 두꺼운 경계 안쪽 깊숙이 누워

모든 통로를 걸어 잠근다

 

죽음이 부화시킨 사랑

 

만일 시인의 체험이 애상哀想에 그친다면 표현의 절실함을 거두어들이기 힘들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하관. 1」이 눈에 아려오는 까닭은 이 시가 시인이 지니고 있는 죽음의식으로부터 신생의 세계로 나아가는 전환점을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 몸도 무엇인가 되고/ 그런 존재위로 태양은 다시 뜨고/ 지상에서의 사라짐은 어쩌면/ 또 다른 탄생을 시도하는 전환점일수도’ 있다고 자신의 죽음을 추체험 追體驗 함으로서 시인의 심층에 가라앉아 있던 관념을 상승의 이미지로 화해 和解시킬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음은 시인이 의식했던, 하지 못했던 간에 매우 소중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연결고리로, 타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애상의 근원이 타자에게 전하지 못했던 시인의 전언 傳言에 있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와 만나게 된다.

 

봄눈 녹고

당신 좋아하던 진달래꽃

 

못 다한 가슴

핏빛설움 토해내듯

온 山 가득

붉게 붉게

구름도 꽃이 되는 하늘가

눈시울 적시는

 

숨 가쁜 얼마를 살다 간,

 

난 왜

그토록 인색했을까

사랑한다는

그런 말들에

 

- 시 「후회」전문

 

시인이 타자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빠졌던 이유는 존재의 사라짐의 반응을 넘어서 아마도 ‘난 왜/ 그토록 인색했을까 / 사랑한다는 / 그런 말들에’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던 회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자신의 감정, 특히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교환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당연히 알고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소통의 부재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별과 병고 앞에서 뒤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 다반사가 아닌가! 차마 머뭇거리며 진실로 전하고 싶은 말을 건네받을 사람이 사라져버렸을 때의 황망함은 더욱 비감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사랑이란 것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가족과 같이 외연이 좁은 대상 간에 주고받는 본능적인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면 보다 고양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애를 넘어서 모든 생물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구현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박명숙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들로 화답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구름도 가로수도 지난다

숨어 버린 듯 태양은 보이지 않고

트럭 위 빽빽하게

서로가 깃털 맞대고

입부리로 더위를 헉헉 대며 두리번거리는

꿈이 무언지조차도 모르는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태어나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행운)

 

거칠게 달리는 가속페달이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처박히며

두려움에 주위를 살피는,

 

빨리 지나치고 싶은 내 핸들

줄곧 따라 오는

풀어진 동공瞳孔

외면 할 수도

추월 할 수도 없는

편도 일차선 굽은 도로

섭씨 35도의 삼복三伏 어느 날

 

- 시 「트럭 위의 그들」전문

 

시인은 삼복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여름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닭들과 마주친다. 아무렇지 않게 식도락의 즐거움을 생각하는 우리의 삶과 이유 없이 태어나고 죄 없이 죽어가야 하는 닭들의 삶이 무엇이 다른가?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국면 속에서 시인은 외면할 수도, 추월할 수도 없는 사랑의 부재를 절절하게 소리치고 있다. 인간 중심의 문명의 허울을 시인은 걷어낼 힘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약자에게 베푸는 강자의 자비 보다 약자가 약자에게 건네는 사랑의 힘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폐품 같은 허리로 폐품을 모으던

그 할머니의 시린 손

오늘은

중심상가에 세워진 크리스마스 추리 앞

찬바람 이는 자선냄비 속에 담겨 있다

 

-시 「세모에」전문

 

사랑은 물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일이다. 사랑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가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내미는 헐벗은 손이다.  짭지만 강열한 의미를 던져주는 위의 시에 더 이상의 덧말은 구차하다. 고대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사랑에서 희망으로

 

시집 『이곳의 별들은』의 주제는 ‘죽음’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감각적 반응이 지금까지 살펴본 시집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슬픔의 토로는 존재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못한(표현하지 못한) 시인 자신의 따뜻한 마음의 부재로 해독할 때 시집 『이곳의 별들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사랑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닷없이 찾아온 타자의 죽음에 반응한 슬픔의 실체인 것이다. 시작 詩作의 선후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대한 시인의 집요한 독백이 단순한 부재에 대한 슬픔의 반영이 아님을, 시「트럭 위의 그들」과「세모에」를 통해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색의 단계를 거쳐 이제 시인은 ‘죽음’과 ‘사랑’을 넘어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려고 한다. 시 「채송화」를 읽어보자.

 

해가 들지 않는 베란다

 

살아낼 것 같지 않던 부실함에

늘 외면당하던,

눈길도 주지 않던 어느 날인가

엷은 미소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저마다의 색깔로

바람을 손짓 한다, 군락을 이루며

 

하늘도 기웃,

햇살 한줌 뿌려주고

흰 구름도 다녀가는,

봄가을 내도록

허접한 내 가슴 베란다를 채워주는

앙증스런 웃음들

 

시인이 ‘언어와의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은 시인이 의도하지 않는 느낌을 ‘상상 想像’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언어의 선택으로 자신의 의도를 굴절시키는 유혹과 싸우는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시가 어떤 유혹에도 휩싸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전히 ‘허접한 내 가슴’이라는 자신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봄이 되 면 당연히 피어날 꽃들이 아니라 ‘살아낼 것 같지 않던 부실함에/ 늘 외면당하던’ 꽃이 피어남을 시인 자신의 정신적 고양과 맞물리게 하는 심리작용은 의도된 시적 표현이 아님은 분명하다. 시집 『이 곳의 별들은』에 혼재하는 죽음과 사랑과 희망의 놓임을 직렬 直列로 읽어내기란 힘든 일지만 우리는 혼재하는 시편들을 죽음 - 사랑 - 희망의 상승의 단계로 받아들일 때 시인의 진정성과 마주할 수 있다.

 

가을에서 겨울 그 사이쯤

한 주일에 닷새정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아침안개를 접한다

 

이곳의 안개군단은

서울의 매캐한 그런 숨 막힘이 아닌,

나름

스릴이 있다

미로를 해매고 싶은 어떤 끌림 같은,

어둠 아닌 어둠에 덮인 안개 속의 시계視界

장님처럼 무엇 하나 볼 수는 없어도

느낄 수 있는 무엇은 있다

 

불빛도 움츠러드는

하늘이 닫힌,

장엄한 이곳의 안개 길을

더듬거리며 한번쯤은 걸어도 볼일이다

 

- 시 「이곳의 안개는」전문

 

 

 

시인은 서울을 떠났다. 시「이주移徙」에 밝힌 바와 같이 40년을 살았던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이주했다. ‘낯설다 / 병원도 약국도 은행도 마트도 미용실도 /콩나물 두부마저도 버스 몇 정류장 저만큼에 있는,/ 아직은 / 열악한 이곳 도램마을 / 하루 해는 멀기만 하다’(「이주移徙」부분)고 낯 선 곳에의 정착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 낯 선 곳에서 ‘미로를 해매고 싶은 어떤 끌림’을 느끼고 ‘ 안개 길을 /더듬거리며 한번쯤은 걸어’ 보겠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당찬 마음도 일으켜 세운다. 이 모든 변화가 단순히 시간이 흘러가며 남긴 퇴행의 흔적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을 견디며 시를 앓아온 빛나는 선물이기에 뜻이 깊은 것이다.

 

온 세상이 고향인 것을

 

그리하여 시인은 이윽고 온 세상이 다 고향임을 깨닫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 기쁨과 슬픔의 경계가 모두 마음이 세운 허상임을 깨닫는다. 시인의 고향인 ‘ 하늘이 자라고 / 꿈이 열리던 /내 살던 *도계 골짜기’( 「옛집」)도, ‘기적汽笛이 머물던 간이역/...../ 어깨를 감싸던 그 사람도 / 지금은 없는’ (「이곳의 별들은」)남편의 고향도 거대한 아파트에 밀려난 산자락들, 철로 변 아래로는 유료 주차장으로, 멀리 고속도로 불빛에 반사되는 터널공사 현장의 팻말이 나부끼는 소멸의 시간으로 잠겨들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고향을 더 넓은 세상으로 품어내고 있다.

 

아이들 도시로 향하고

밤하늘 찾는 이 없어도

마을 가득 별은 쏟아져 내리고

논밭 길 그림처럼 펼쳐진

이곳 *해창 마을

고향 되어 내가 서 있다

*충남 보령 주교면 소재

 

- 시 「이곳의 별들은」마지막 연

 

알맞은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박명숙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고향은 조태일 시인이 그의 시「풀씨」에서 노래한 고향의 인식과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 같지 않기에 전문을 옮겨본다.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그 곳이 나의 고향

그 곳에 묻히리.

 

햇볕 하염없이 뛰노는 언덕배기면 어떻고

소나기 쏜살같이 꽂히는 시냇가면 어떠리

온갖 짐승 제멋대로 뛰노는 산 속이면 어떻고

노오란 미꾸라지 꾸물대는 진흙밭이면 어떠리.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출 곳 없어 언제까지나 떠다니는 골목,

그곳이면 어떠리.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히리.

 

이 글의 서두에서 시인 박명숙을 바람 많은 언덕 위에 선 한 그루 나무라고 말했다. 나무는 강해서 바람에 꺾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맞서면서 강해지는 것이다. 시집『이곳의 별들은』은 바람에 맞서면서 강해진 시인이 침묵을 깨고 20년간의 희노애락을 드러낸 소중한 기록이다. 이 모든 세상을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자유와 도전의 정신으로 무하유지향 無何有之鄕 의 기쁨을 더 크낙한 품을 지닌 시로 전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