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시山林詩의 확장을 위한 제언
나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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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문학』 통권 22호(2015년 가을․ 겨울호)의 마흔 한 분의 시를 읽었다. 이 분들은 모두 산림문학회의 회원으로서 지면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시인들도 있으나 새롭게 회원으로 활동하게 된 분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던 산림문학회의 회원들은 ‘숲 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 정서녹화’로 집약되는 산림문학회의 지향점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일시적인 정감이거나 사물의 단편적인 모습일지라도 알뜰히 문학작품으로 형상화 하는데 더욱 정성을 쏟는 산림문학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권두언(김청광)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산림문학』이 여타의 문학회나 잡지와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지향점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이 없으나, 작품들이 자연의 파괴를 다루는 고발이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영탄詠嘆하던, 자연으로부터 소중한 혜안을 얻었던 기쁨이던, 형상화形象化의 성취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과제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41편의 시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와 소재들이 대부분 나무나 숲에 관련되었던 탓에 아마도 독자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다양한 시선과 시법詩法을 고루고루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숲 사랑은 곧 생명을 존중한다는 의미이며, 생명을 존중하자마자 이는 곧 녹색환경보전의 발심發心에 이르는 것이기에 시인은 이와 같은 통로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정서녹화라는 사명감을 드러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탓에 시는 산문과 달리 동감이 아닌 공감共感의 영역으로 독자를 초대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산림문학』(통권 22호)의 특별기고나 명사기고가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논리적 동감의 영역이라면 시는 보다 심미적인 통찰에 이르는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보다 자유로운 정서적 공감의 영역을 제시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감이 곧바로 탐미적 표현의 통로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려서 공감의 통로가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시『동강할미꽃』(최홍규)은 동강할미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중략)... / 한식 무렵에 피어 봄을 활짝 여는 작지만 예쁜꽃’이라고, 또 ‘수줍은 새 색시처럼 가냘프고 아름다운 꽃이다/ 동강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채 하늘을 우러러 보는 꽃’이라고, 그래서 ‘나는 해마다 4월이 오면 동강할미꽃 보러간다’고 시를 끝맺는다. 이와 같은 주관적 진술은 독자들에게 동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동강 아득한 절벽 위에 핀 동강할미꽃을 머리속에 그려넣고 그곳에 한 번 가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키면서 도대체 왜 동강할미꽃이 귀중하다는 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또 한 편의 시『나무를 심은 사람』은 편백나무 2백5십만 그루, 삼나무 6십3만4천 그루, 밤나무 5만4천 그루를 심어 황폐해진 우리 산을 푸르게 가꾼 임종국의 생애를 소개한다. 시인으로, 사학자로 종국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남은 임종국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사연 아는 자 없고/ 그 사연 들려주는 자 없이/ 그 사람 심어 기른 나무의 혜택만 누리려 하’는 세태를 꾸짖는 것에 감상을 국한시킨다면 이 또한 시인의 시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동강할미꽃』과 마찬가지로 이 시는 한 사람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진술의 표면 아래 미래를 예견하며 후대에게 빛나는 유산을 남겨야 할 우리의 책무를 각성시키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이 두 가지 의 의미망이 교직하는 공감의 영역에서는 장식을 배제한 진술이 오히려 비유의 현란한 장식보다 훨씬 유효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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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있어서의 형상화가 진술(메시지)이 아니라 표현(이미지)이라는 관점에서『동강할미꽃』이나『나무를 심은 사람』은 주제의 희소성과 강열함 탓에 비유를 배제한 대신 진술로서 공감의 영역을 확대한 예이다. 주목받지 못한 희소한 주체(동강할미꽃)나 거대 담론(임종국이라는 인물, 환경, 경제와 같은)을 다룸에 있어서 장식(비유)은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걸림돌에 직면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렇다고 그와 같은 주제를 진술만으로 돌파해낼 수는 없다. 시인이 마주치게 되는 현상이나 사건이 일으키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 중립적인 사실적 진술은 자칫하면 시인으로 하여금 에포케 epoche(판단중지)의 난관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바로 이 때 비유는 그러한 난관을 헤쳐나가는 언어의 연금술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마을의 소나무들이 베어나가는 현장을 목도한 시인은 탄식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맨발로 혹한을 고독으로 맞서며 수 백년을 살아온 조선소나무를 당신은 사용가치로 보는가? 아니면 교환가치로 보는가?
잎새들 사이사이로 빠져나간
한 옥타브 높은 새소리의 악보들도
갈기갈기 흩어져
어디론지 멀리 밀려나 버리었다
- 박명자의 「밀리우는 나무들」마지막 연
위와 같은 시인의 묘사는 정서의 긴장을 유도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며 편리함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관심을 환기한다. 이 때 무심코 지나쳤던 삶을 둘러싼 생태적 관점과 환경적 관점의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나 송전탑은 수많은 생명의 괴멸을 야기할 수 있다.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댐은 생태계의 교란을 가져온다. 주거지 부족을 해결하고자 논과 밭을 갈아엎는 일은 식량의 안전적 확보를 위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고, 댐의 건설과 주택지 개발을 멈춘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될까? 생태적 관점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태도로서 문명이 지닌 편리함과 유용성을 포기하기를 요구한다. 생활의 전기 수요를 줄이는데 따르는 불편함, 가뭄과 홍수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비좁은 공간에서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결단을 우리는 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결단을 주저하는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환경적 관점이다. 환경적 관점은 인간이 욕망을 줄이지 않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주축으로 자연환경의 급격한 파괴를 막으려는 실리적인 태도를 말한다. 과연 당신은 과학의 힘으로 불안과 생명을 위협하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3.
오늘날에 있어서 시인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도 아니고 구도자도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의 감소는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정보나 해결방안을 다른 통로를 통해 획득한다는데 있다. 아름다운 풍경은 정밀한 디지털 사진기를 통해 구현하고 정서의 충족은 여행과 음악같은 자족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 마디로 사물이나 현상을 재현 再現 하는 기술은 놀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Homo ludens을 강화시키면서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단독자가 창조자라는 인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따라서 오늘날 당면한 시인의 임무는 앞 글에서 언급한 바, 우리 삶을 위협하는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언어가 지닌 은유의 힘으로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므로서 생명의 가치를 고양하는데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 다소 퇴행적 시법으로 돌아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인간의 나약함과 옹졸함을 자연의 위대함에 투영시킴으로서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고 뉘우치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임술랑의 「등나무」, 최병암의 「덕유산 주목」, 윤준경의 「오래된 나무」에 눈길이 가는 이유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생명활동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치환하는 어리석음을 경고하는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등나무 서로 엉겨서, 떨어져 있음을 거부하고 있으니
쓸쓸한 이 몸은 그게 부럽다
- 임술랑의 「등나무」부분
죽어서도 꼿꼿한 영혼
그 무언의 호통에 눌리고
죽기 전에 이미 수십 번 누어버린
내 모양이 부끄러워
- 최병암의 「덕유산 주목」부분
그가 살아온 거대한 숙명에 무릎 꿇고
다시 나무로 태어나는
아름다운 윤회를 거듭하며
오래된 나무가 풍기는 깊고 푸른 향
아름드리 그늘의 말씀을 널리 퍼뜨리고 싶다
- 윤준경의 「오래된 나무」부분
이 세 편의 시는 다 같이 나무가 지닌 생명의 속성이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강인함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갱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기계적 인식을 덜어내면서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수많은 시인들이 삶의 표상으로 노래한 나무를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소한 이익을 좆아 만남과 헤어짐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우리들과 등나무는 어떻게 다른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풍우를 견디는 주목과 백 년을 못 사는 욕망을 지닌 자는 누가 더 아름다운가? 신앙도 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나무와 현세를 제쳐두고 극락과 천국을 열망하는 나는 누가 더 어리석은가? 위의 시들의 미덕은 진정성이 결여된 깨달음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을 각성하는 낮은 자세를 보여주는 고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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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흑림黑林은 가로 세로 50킬로미터, 20킬로미터의 광대한 면적을 가진 산림을 말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이 흑림이 파괴되고 나서야 이 숲에 기댄 프라이부르크 사람들은 나무와 숲이 생명의 원천임을 깨닫고 조림造林에 힘을 기울였다. 인구 30만 명의 800년된 이 도시는 자동차의 매연과 쓰레기를 태우는 오염된 공기가 산림을 파괴하고 부메랑처럼 자신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들이 속성수로 심은 가문비나무가 뿌리를 얉게 내리는 까닭에 풍우에 쉽게 넘어지고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프라이부르크 사람들은 간벌을 통해 천천히 자라지만 곧고 굳은 너도밤나무를 식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편리함을 버리는 대신 기다림과 나무와 숲과의 공존을 배운 프라이부르크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우리 또한 광릉수목원의 울창한 숲을 통해 갖게 되었다. 나무들 간의 경쟁, 더 나아가서 숲도 늙어가고 새로이 태어난다는 오랜 시간의 변화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경시하고 차별하는 현대문명의 종말을 막는 것임을 산림문학의 시인들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속성수로 심었던 리기다 소나무가 반 세기가 지나면서 고사하고 있는 반면, 우리 조선 소나무는 천천히 자라지만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리기다 소나무의 뿌리는 수맥을 향하여 맹렬하게 뻗는 통에 빠르게 자라지만 뿌리가 서로 얽히고 눌러 생명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소나무는 뿌리가 넓게 퍼져 성장은 빠르지 않지만 뿌리 간의 공생이 이루어져 단단하고 우아한 나무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만이 우리 삶의 전부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나무와 숲이 가르쳐주는 인고의 긴 기다림과 공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아무리 거듭해도 넘치지 않는 시인들의 과업인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죽은 나무의 몸에서 어린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간호사 나무 Nurse tree를 만난 경험을 통해 공생 共生의 숭고함을 전하고 있고 시인의 전언은 경전의 한 구절만큼 둔중하다.
늙은 나무들의 품에서
죽은 몸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새 목숨 품어 안고 부화하는 중이라고
숲의 귀를 올리며 햇살을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 김영자, 「나무는 나무에게 간다」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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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륜을 더해가는 【산림문학】은 바로 ‘산림’이라는 표제로 말미암아 새로운 과제를 안겨 주었다. 나무와 숲을 주제로 한 시들이 풍성한 식탁으로 차려졌으나 표현의 독창성을 지닌 시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넓게 보아 자연을 향한 영탄의 시, 고발과 반성의 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산림시의 탄생은 불가능한 것인가? 산림의 영역을 꼭 산과 나무와 숲과 꽃에 한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모든 생명현상에 대한 탐구와 탐미, 절제의 미덕을 진정성으로 고양하는 시인들이 스스로 산림 山林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 반년간 『산림문학』(2016년 봄. 여름 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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