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몸의 탐구『푸른 빛이 걸어 왔다』(정선희)
나호열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이유를 묻거나 시의 이력履歷을 말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무례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한 편의 시 속에는 시인의 전 생애가 삼투되어 있고, 이미 세상 밖으로 던져진 시는 독자들의 쓰임에 따라 그 거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친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내를 말하는 시인이 있다. “시는 내가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목장 같은 곳, 시 속에서 나는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를 무한정 방생할 수도 있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모범적인 답안처럼 보이는 정선희의 이 발언은 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전편을 관통하는 천방지축과 좌충우돌의 행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체험으로 빚어진 진정성의 개화라고 할만한 성취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유의할만한 것이다. 즉 정선희의 시 쓰기는 그 자체로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이며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나를 무한정 방생’하는 방편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유를 향한 항거를 증언하는 일이 시 쓰기의 중요한 기능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 성과는 간단히 말해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로 받아들이거나 타율他律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을 향해 가는” 행위를 자유로 규정하는 일로 드러난다. 개인이던 집단이던 결정권을 상실한 채 사유와 행동에 구속된다면, 빈곤과 불평등에 의해 자신이 바라지 않는 삶으로 귀속되어버린다면 그는 자유를 상실한 속박의 상태에 있으므로 마땅히 자신의 결정에 따라 운명을 결정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동시켜야 한다. 이럴 때 삶은 아직 구현되지 않은 어떤 이상적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아의 각성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표현되는 일련의 행동들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덕목으로 치부되지만 그 덕목을 체득하기도 전에, 말하자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의에 의한 도덕심, 윤리, 종교, 법과 같은 정치적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사태에 직면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존재에 주어진 그물을 자신을 보호해주는 울타리로 받아들이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와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 같은 그물이나 울타리를 무시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예컨대 범법자나, 정신질환자, 예술적 천재들 - 그와 같은 사회적 장치의 무력함을 비웃거나 항거함으로서 아웃사이더의 길을 걷기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푸른 빛이 걸어왔다』를 관통하는 ‘마음껏 풀어놓음’ 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첫 실마리를 열 개의 “~ 싶다”로 구성된 시「샤르틴 다와」에서 찾는다. 이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나 “무엇을 향해 가는” 상식적 개념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언젠가는 몽골에 가고 싶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외로움이 몸살로 찾아오는 봄날, 몽골에서 온 황사를 따라가고 싶다’로 끝난다. 몽골은 아직까지는 원초적 생명을 간직한 초원과 게르 속에서 한 가족이 사는 공동체의 따스함이 남아있는 곳으로 인식된다. 번잡한 문명이 범접하지 못한 그 땅에 가서 ‘손이 펜치 같은 몽골 사내에게 손을 잡히고 싶다’든가 ‘물속으로 들어가듯 옷을 하나씩 벗고 싶다’든가 하는 일탈행위가 어떤 제약도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 시는 단순한 일탈을 넘어서 현재의 삶이 그러한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시의 서두 ‘언젠가는’이 의미하는 바는 실현될 수도 있을지 모를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선희의 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와 같은 시인이 숨겨놓은 트릭을 찾아내는 일이다. 정선희의 시적 트릭은 역설과 반어에 있다. 이것이라 말하고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하며, 풍자로 보이지만 엄정한 세계법칙을 내포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푸른 빛이 걸어왔다』는 질펀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의 이와 같은 태도는 필연적 결정론에 의한 자유의 존립 불가능을 받아들인 허무나 평화적 공존을 꾀하는 공리주의적 자유관에 경도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조심스럽게 추측한다면 정선희의 ‘자유’는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가 그의『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설파한 자유의 개념과 근사近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가 어떠한 목적을 지닌 것이 아니며, 의식의 영역밖에 있는, 칸트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물자체 物自體Thing in Itself 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개인이 자유를 욕구한다면 그것은 몸을 통하여 전달되는 심리적 반응일 뿐이지 결코 자유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선희가 꿈꾸는 자유로의 이행 移行은 몸이 일으키는 반응의 탐구로부터 시작된다.
몸의 자유, 정신의 자유
유가 儒家에서는 수신 修身을 강조하고, 불가 佛家에서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를 강조한다. 왜 수심이 아니고 수신이며, 왜 물질이 우선이 아니고 마음이 우선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 분리는 은연중에 정신을 신체(몸)보다 우위에 두는, 정신으로 신체를 제어할 수 있음을 묵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정선희는 이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가져오는 경계에 의심을 품는다. 만일 정신이 신체를 제어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 신체가 지닌 매커니즘까지 제어할 수 있는가? “이 쪽과 저 쪽을 분명하게 구분할 때면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다. 이쪽과 저쪽은 내게 선택을 강요할 때가 많다...(중략)...여러 세계가 동시에 내 속에 살고 있다”( 계간 『시와 산문』, 2015년 가을호)는 시인의 언명은 정신과 신체의 구분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세계의 경계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흰색은 흰색이 아니었다/.....중략..../ 흰색은 순수한 색이 아니다 흰색은 여러 가지 빛깔을 감춘 색...(하략)...” (「말을 걸어왔다」 부분), “우리 엄마/ 입지 않던 흰옷을 입을 때마다/ 누군가가 죽었고, 흰옷을/ 자주 입으면서 우리 엄마/ 연애도 끝났지”(「흰색이 수상해」부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흰색이 ‘순수’, ‘청결’등과 같은 통념을 벗어나서 공포와 불결함으로 전복 顚覆되는 장면을 목도할 때 정신과 몸의 경계에 대한 호기심은 증폭된다.『푸른 빛이 걸어왔다』에 실린 몸에 관련된 몇몇의 시들, 「승산이 있다」, 「독비 犢鼻」,「넙치」,「손바닥 별」,「익상편」, 「혓바닥의 비밀」등은 몸의 매커니즘이 정신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유기적으로 정신과 교섭하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통증은 몸이 일으키는 것이지만 통증으로 야기된 아픔은 정신의 작용이 아닌가! 심장의 박동은 정신이 제어할 수 없지만 신체기관의 불인 不仁을 감지하는 것과 혈 穴을 찾아 통증을 해소하는 것은 정신이 작용이 아닌가!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정신은 몸을 감싸는 옷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매저키즘masochism이나 새디즘 sadism은 양가적 兩價的이다. 느닷없이 매저키즘과 새디즘의 양가성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러한 심적 병리 현상이 건설의 욕구만큼 파괴의 본능이, 생존의 욕구만큼, 죽음에의 유혹이 우리 의식의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①
아버지, 처음부터 밑 빠진 독이었다/ 물을 부으면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아무리 부어도 독은 차오르지 않고/ 어머니는 점점 지쳐갔다
②
울지 마시게/ 울지 마시게/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은 어머니/ 두들겨 맞고서야 우네/ 맞은 자리 아파서 울고/서러워서 울고/ 울다가 울음보 터진 어머니/ 악악거리며 우네
③
맞고 나서 더 시원해지는 소나기처럼/ 맞고 나서 더 가벼워지는 마음이 있어
...(중략)...
맞고 나서 숨통이 틔는 하늘처럼/ 맞고 나서 더 신나는 기분이 있어
①은 「밑 빠진 독」의 2연 ②는 「조용한 춤판」의 3연 ③은 「때려줄래요?」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이다. ①에서 시인의 제시하고 있는 ‘아버지’는 능력은 없으면서 권위에 기대어 있는 부권사회의 상징이다. ②와 ③은 부권사회에서 폭력을 당한 - 이 폭력은 꼭 신체적, 성적 폭력에 국한 되지 않는다 - 약자(어머니)의 이야기다. 평생 동안 강자(아버지)의 억압 속에서 살던 어머니가 씻김굿(물리적 폭력)을 통해서 신원 伸寃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맞고 나서야 슬픔과 원한을 해소하는 이와 같은 불가해한 가학과 피학 사이의 간극을 시인은 어떻게 해소하려는 것일까.
존재의 유동성과 물활론 物活論적 사유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정선희가 꿈꾸는 자유는 정신과 몸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경계의 허뭄이 수신 修身이나 경전을 통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시인의 생활사와 몸의 관찰로부터 이루어진 관념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푸른 빛이 걸어왔다』의 많은 시편이 구어체 口語體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번히 시에 차용되고 있는 ‘구름’과 ‘구름’으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의 구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일 또한 『푸른 빛이 걸어왔다』의 얼개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말’과 ‘구름’은 발생되는 순간 휘발되어 버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일초 전의 ‘나’가 일초 후의 ‘나’와 다른 것처럼 영속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다. 영속하는 존재의 부재는 크리슈냐무르티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인과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와 맥이 닿는다.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이 모여 구름이 되고 강물이 되었을까”( 「모두 다 갔다」의 부분)에 드러난 ‘눈물과 한숨이 모여 구름이 되고 강물이 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눈물 속에 함유되어 있는 소금기, 한숨에 서려 있는 불온한 공기, 정형이 없는 유동하는 구름과 구름이 품고 있는 물과 수중기, 그 구름은 따지고 보면 강물의 기화 氣化 일 뿐 무엇이 그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예하리를 찾는 사람들은/ 보신탕을 먹고 이빨을 쑤시며/연꽃을 보러 간다//
예하리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蓮花식당/ 사람들은 개고기와 연꽃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연화식당을 찾고 개다리를 뜯는다//
낮술을 마시고/ 얼굴이 벌건 사내 하나/ 개고기를 씹으며/ 침과 개고기를 튀기며/
목소리를 높인다//
예하리 연꽃이 왜 유난히 붉은 줄 아시오/ 예하리 보신탕이 왜 맛있는지 아시오//
연꽃들이 개고기를 삶는 밤이면/ 코를 벌름거리며 아주 환장을 한다오/
개고기 냄새를 맡고/ 개처럼 짖는 연꽃들/ 그 컹컹 짖는 소리 안들어 본 놈은 모른다오/ 예하리 연꽃이 왜 저리 붉은지/ 그 소리들 왜 그리 깊은지
- 「蓮花 식당」전문
누군가 만일 『푸른 빛이 걸어왔다』에서 명편 名篇을 고르라고 한다면 「페이드 아웃」과 「蓮花 식당」을 주저하지 않고 꼽을 것이다. ‘돌’이 ‘새’라는 놀라운 관찰로부터 빚어진 “그러면 죽은 듯 앉아 있던 돌들이 / 깜짝 놀라서 날아오를까/ 풍덩, 소리가/ 푸드덕으로 바뀌는 순간/ 눈앞이 환해질 것이다〃라는 놀라운 비상이 일으키는 생명의 무한한 확장성을 어쩌랴. ‘페이드 아웃’의 파장으로 말마암은 “나를 놓아줘!/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속하는 나”( 「현은 현」 마지막 연)는 ‘연꽃’과 ‘개’의 속성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절대자유의 지평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서정성을 담보하고 있는 정선희의 시들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지 자못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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