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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히 짜인 철학 속으로 들어온 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5. 10. 23:42

촘촘히 짜인 철학 속으로 들어온 문학

입력 : 2016.05.09 03:00

철학자 시인 박이문 교수 잠언집, 서동욱 교수 시집 '곡면의 힘'

문학과 철학이 만났다. 시인·철학자 박이문(86) 포항공대 명예교수가 잠언집 두 권을 냈고, 시인·문학비평가로 활동 중인 서동욱(47) 서강대 철학과 교수가 새 시집 '곡면의 힘'(민음사)을 냈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투병 중인 박이문 교수는 잠언집 '이 순간 이 시간 이 삶'과 '저녁은 강을 건너오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를 미다스북스에서 냈다. 박이문 전집을 낸 출판사가 '박이문 아포리즘'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박 교수의 저작 중에서 '시의 풋풋함'과 '생의 철학'이 담긴 글을 한자리에 모았다고 한다. 박 교수의 아포리즘은 추상적 개념을 짧은 문학적 비유로 표현했다. 가령, 시간에 대해 박 교수는 "잡히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그 속에서 쫓기며 산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일상에서 얻는 삶의 놀라움도 쉽게 풀어냈다. "삼십 년 혹은 사십 년을 살다가도 언뜻 아내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거나 남편의 못이 박인 손을 잡으면 새로 만나게 된 인연의 신비스러움에 새삼 놀라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박 교수는 '삶을 길 위의 순례'라고 불렀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생존할 수 있다. 엄마 젖을 떼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젖 대신 밥을 먹어야 하고(중략) 늙고 싶지 않아도 늙을 수밖에 없고, 죽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

박이문(왼쪽) 포항공대 명예교수와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사진
박이문(왼쪽) 포항공대 명예교수와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이덕훈 기자

서동욱 시인은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땄다. 그는 시집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둔 날' 등을 냈고,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해왔다. 그의 세 번째 시집 '곡면의 힘'에선 철학자 스피노자가 등장한다. 안경알을 갈면서 생계비를 번 스피노자가 렌즈를 갈아 사유의 빛을 반사했듯이, 시인은 언어를 갈아 시를 분사하기 때문이다. 서동욱의 시에서 키워드는 '곡선과 탄력'이다. 그는 렌즈를 가는 작업을 가리켜 '곡면을 통해 빛을 휘어지게 하는 작업'이라고 했고, 엉덩이의 부드러운 곡선을 '중력과 대결하는 살덩어리의 노력'이라고 불렀다. 그의 곡선 사랑은 '반원을 그리며 고개를 숙이는 손잡이'란 이미지를 통해 겸손한 삶의 미덕을 예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서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자연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을 다루고 싶었다"며 "기하학의 곡면, 물리학의 중력과 탄력이 있고, 사람이 앓는 감기도 그런 힘에 속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생과 생을 통과하는 감전/ 나는 마흔을 슬프게 보낸 것 같고'라는 시행처럼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것들도 노래했다. 그는 철학과 시의 차이에 대해 "철학은 꼼꼼하게 짠 하루의 일정표와 같다"며 "문학은 그 일정표에 끼어든 우연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이라고 비교했다. 그는 시집의 마지막을 시 '스피노자'로 장식했다. '모두가 증오했던 저자/ 탐낼 것 없는 이 지위/ 어이없이 덧없는 노력을 요구한다/(중략)/ 글을 쓴다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神)'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해 유대인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뒤 평생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그가 쓴 글은 신성모독이라 출간되기 힘들었다. 그의 대표작 '에티카'는 사후에 나왔다. 시인은 스피노자를 떠올리며 "폭력과 선입견에 맞서서 외롭게 서 있는 인간들을 생각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