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찾아가는 길가엔 봄꽃이 흐드러졌다. 만물이 소생하는 절기임이 확연하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전기의 큰 선비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 선생을 모셔놓은 서원이다. 회재는 외가인 경주부 양좌촌(지금의 양동민속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말년엔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에 터를 잡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회재의 사후에 후학과 유림들이 모여 회재를 본받고자 하여 만든 것이 바로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은거하던 독락당(獨樂堂) 가까이에 있다.1573년(선조 6년)에 창건되었고, 1574년 ‘옥산(玉山)’이라는 사액(賜額) 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도 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아 형태가 잘 보존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재는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킨 한국 성리학의 큰 산맥 중의 한 분이다. 회재라는 호도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중국 송나라 주자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왔다.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마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성리학의 뿌리는 공자의 사상과 닿아있다. 공자의 사상이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렸던 불교의 사상을 포용하여 새로운 체계로 재탄생한 것이 성리학이다.

이언적 선생은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양동 인근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냇가에 독락당과 계정을 지었다. 계정 난간에서 본 계곡의 모습이 한가롭다.
이언적 선생은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양동 인근 경주시 안강읍 옥산의 한 냇가에 독락당과 계정을 지었다. 계정 난간에서 본 계곡의 모습이 한가롭다.

회재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씨 부인 슬하에서 자랐다. 외가살이를 하면서 외삼촌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4~1529)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는 회재를 또래들보다 조숙하게 한 요인이 됐다. 사춘기도 빨리 찾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10세 때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빠져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산다는 것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가?’ 등의 철학적 물음에 눈 뜬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산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명제에 천착하게 했고, 회재는 그 해답을 외삼촌을 통해 배운 성리학에서 찾게 된다. 12살이 되면서 회재는 외삼촌이 관직생활을 하던 양산·김해·상주 등지로 따라다니면서 성리학을 배웠고 성리학에 몰입했다. 회재의 불우한 성장 환경이 불타오르는 진리에의 불길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그의 재능은 정치적 경륜보다 학문에서 더욱 빛났다.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曹漢輔)와의 네 차례에 걸친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辨)은 조선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수많은 철학 논변의 효시가 되었다. 회재는 41세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임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자 바로 고향마을 인근에 있는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기완성의 수양철학에 매진했다. 유학의 근간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다. 수기가 완성되면 치인에 나아가지만 치인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수기를 보완한다. 7년여에 걸친 수기의 과정을 거친 회재는 47세 때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종1품의 의정부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을사사화로 인해 낙향했다가 다시 2년 뒤 발생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의 강계로 유배됐다. 유배는 회재에게 학문을 마무리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회재는 6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구인록 (求仁錄)』 『진수팔규(進修八規)』 등 유학사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완성한다. 유배지 강계에서 63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회재의 일생은 진리를 얻기 위한 철저한 수양의 삶이었고, 그 내용은 그의 저술에 녹아있다. 회재는 이황(李滉)과 함께 한국 수양철학의 거대한 산맥으로 훗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을에서 옥산서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냇물을 건너야 한다. 냇물을 건너는 것은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하는 것이기도 한다. 냇물을 건너면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온다. ‘역락(亦樂)’이란 논어에 나오는 글귀다. 공자는 이 세상에 가장 기쁜 일은 부귀영화를 얻는 것도,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아니라 학문을 통해 군자가 되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기쁜 길을 여럿이 모여 함께 가면 더욱 즐겁다. 그 즐거운 마음이 역락이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역락문에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온다. 현판 옆에 있는 옥산서원기에는 “처음엔 납청루(納淸樓)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납청’이란 맑은 기운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람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과 하나로 통해 있다. 우주의 기운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그냥 우주다. 그것은 뚜껑이 없는 물통이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 물통 속의 물과 물통 밖의 물이 하나이기 때문에 물통은 바다 전체와 하나와 마찬가지인 이치다. 그러나 물통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뚜껑을 닫아버리면 바닷물과 물통 속의 물은 격리된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에게 욕심이 있으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를 차단한다. 뚜껑이 닫힌 물통 속의 물이 돼버린다. 닫힌 물은 썩어버리게 마련인 것처럼 우주의 기운과 단절된 사람은 기운이 고갈되어 병이 든다. 납청을 하여 우주의 맑은 기운을 들여오면 나는 다시 우주와 하나가 돼 한계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이 무변이다. 그러니 납청루와 무변루는 하나로 통한다.

 

무변루를 통과하면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가 나온다. 왼쪽에 있는 기숙사에는 암수재(闇修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 있는 기숙사에는 민구재(敏求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암수’란 남몰래 묵묵히 수양을 한다는 뜻이고 ‘민구’란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특히 민구란 논어의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子曰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 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는 자기가 원래부터 성인이 아니라 열심히 옛 진리를 구하여 얻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공자가 이 말을 한 뜻은 사람들에게 모두 자기 같은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라는 의미다.

 

기숙사 건너편 강당엔 ‘옥산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한눈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체임을 알 수 있다. 사대부의 강직한 기개가 돋보이는 힘차고 정갈한 해서체가 봄볕에 눈부시다. 그 안쪽에 구인당(求仁堂)이란 현판이 또 걸려 있는데, ‘구인’이란 회재 선생이 추구했던 세계의 요체다.

“인(仁)을 구한 사람은 하늘같은 사람이고 우주 같은 사람이다. 인을 구한 사람은 가난해도 행복하고 몸이 죽어도 행복하다. 부처님은 가진 재산도 없었고 벼슬도 없었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인을 얻으면 부처님처럼 되는 것이다.” 학문하는 목적을 성인이 되기 위한데 두었던 회재선생의 가르침이 들리는 듯하다.

 

이언적선생의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위). 석봉 한 호가 쓴 구인당 편액(아래). 김춘식 기자

 

이언적선생의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위). 석봉 한 호가 쓴 구인당 편액(아래). 김춘식 기자

 

구인당 뒤에는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체인문 안에는 체인묘(體仁廟)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과 전사청이 있다. ‘체인’이란 인을 몸으로 체득하여 인의 마음이 몸 밖으로 배어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옥산서원의 부속 건축물들은 정문부터 강당·사당 등이 일직선을 이루고,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의 영역을 형성하는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주변의 자연 경관과 어울려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옥산서원 곳곳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사이 문득 깨닫게 된다. 옥산서원이 바로 군자가 되는 ‘동굴’이라는 것을.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사람의 마음을 찾아갔던 웅녀설화에 등장하는 그 동굴 말이다. 작은 이익에 급급해 아웅다웅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옥산서원은 ‘더 이상 짐승처럼 살지 말고 인간 본래의 한마음을 찾아 참된 사람으로 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기동
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