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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스러기… 하지만 우주의 의미 파악하는 기쁨 누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2. 25. 22:11

"나는 부스러기… 하지만 우주의 의미 파악하는 기쁨 누려"

입력 : 2016.02.25 03:00

- '박이문 인문학 전집' 24일 헌정식
시인이자 철학자 박이문 교수에 김병익·정수복·정과리 등 헌사

"저 김병익입니다. 알아보시겠어요?" 여덟 살 아래 후배인 문학과지성사 김 상임고문이 휠체어에 앉은 선배의 손을 끌어안는다. 시인이자 철학자인 박이문(86) 포항공대 명예교수. 24일 오전 일산 풍동의 노인요양원 소강당에서 '박이문 인문학 전집 헌정식'이 열렸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6월부터 입원한 박 교수는 이제 가족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낯설어하는 어린이 같은 상태가 됐다. 2년 전 박이문 평전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를 썼고, 이번 전집 추천사를 쓴 사회학자 정수복(61)은 "철학자가 사고(思考)를 할 수 없다는 건 비극"이라면서도 "그래도 오늘은 선생님 표정이 무척 밝다"며 노학자의 무릎담요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마침 26일은 박 교수의 생일이기도 하다.

지성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학자들의 전집 출간이 드물지는 않지만, 교양 독서 시장이 극도로 위축된 요즘 현실에서 '박이문 전집'(전 10권·미다스 북스)은 이례적이다. 생존 학자, 그것도 전 10권을 한꺼번에 펴내는 일도 희귀하지만, 특정 학파나 공동체에 몸담지 않고 평생 외로운 자유주의자로 일관한 그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후학과 출판사의 자발적 결의로 가능했던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4일 일산 요양원에서 열린 박이문 전집 헌정식에는 사회학자 정수복, 서강대 이덕환 교수, 김병익 문지 상임고문(작은 사진 왼쪽부터), 강학순 안양대 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큰 사진은 건강하던 2014년 당시의 모습. 

 

24일 일산 요양원에서 열린 박이문 전집 헌정식에는 사회학자 정수복, 서강대 이덕환 교수, 김병익 문지 상임고문(작은 사진 왼쪽부터), 강학순 안양대 교수, 정과리 연세대 교수,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큰 사진은 건강하던 2014년 당시의 모습. /이덕훈 기자·장련성 객원기자

 

'박이문 인문학'은 흔히 진리를 향한 전방위적 탐구로 요약된다. 그는 프랑스 소르본에서 시인 말라르메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미국 USC에서 철학자 메를로 퐁티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 작가나 한 철학자 연구로 평생을 바치던 게 학문의 관행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는 발레리, 말라르메, 사르트르, 지드, 앙드레 브르통, 엘뤼아르, 카뮈, 앙드레 말로, 자크 데리다, 장 지오노 등 문학과 철학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독서와 집필로 1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역시 비슷한 학문적 궤적을 걷고 있는 사회학자 정수복은 "그는 어떤 철학 사조나 지적 유행에도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학문을 계속했다"고 했다. 정신이 맑았을 때의 박 교수는 "나는 무한한 우주의 작은 부스러기에 불과하지만, 그 우주의 의미를 파악하는 기쁨을 누린다"고 파스칼의 언어로 학문하는 기쁨을 술회한 바 있다.

같은 1930년대생인 김 고문과 박 교수의 인연은 40여년 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교수의 책 '하나만의 선택'을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는 것. 김 고문은 또 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 박 교수의 일화도 소개했다. 철학자는 '소설이 무엇인가' '왜 소설을 쓰는가'를 진리 탐구하는 소년처럼 물었고, 작가에게는 그게 화두가 됐다는 것. 그 응답으로 나온 소설이 '언어사회학 서설'이었다는 것이다.

10권으로 압축한 이번 전집은 1권 '하나만의 선택-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 마에스트로'를 시작으로, 2권 '나의 문학, 나의 철학', 3권 '노자와 공자, 그리고 하이데거까지' 등 박이문 인문학과 사유의 여정이다. 전집 간행위원은 김병익,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 강학순 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이승종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전집 추천사는 정수복, 이강수 연세대 명예교수, 한자경 이화여대 철 학과 교수, 오종환 서울대 미학과 교수,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정과리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썼다. 박 교수는 이날 특별한 소회를 말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대신 전집 제1권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철이 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빼놓고 말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언제나 명확한 의식을 갖고 내 자의로서 선택해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